13.07.2015 Views

연암 박지원의 牧民書, 七事考 - 단국대학교 | USER계정서버

연암 박지원의 牧民書, 七事考 - 단국대학교 | USER계정서버

연암 박지원의 牧民書, 七事考 - 단국대학교 | USER계정서버

SHOW MORE
SHOW LESS
  • No tags were found...

Create successful ePaper yourself

Turn your PDF publications into a flip-book with our unique Google optimized e-Paper software.

東 洋 學 第 48 輯 (2010 年 8 月 ) 檀 國 大 學 校 東 洋 學 硏 究 所<strong>연암</strong> <strong>박지원의</strong> 牧 民 書 , 七 事 考 42)김 문 식*❙국문초록❙<strong>단국대학교</strong> 연민문고에 있는 沔 陽 雜 錄 은 眄 川 郡 守 로 활동했던 朴 趾 源 이 작성한 글을 모은 책으로,이 책의 최종적인 작성 시점은 1799년 5월에서 1800년 8월 사이가 된다. 이 책은 현재 6책(2, 3, 4, 6, 7,8)만 남은 缺 本 인데, 판심의 하단에 “ 燕 巖 山 房 ”이라 새겨져 있는 <strong>박지원의</strong> 家 藏 本 이다.면양잡록에는 七 事 考 의 필사본 2종이 수록되어 있다. 첫 번째 것은 대부분 초서체로 필사되어 있는데 <strong>박지원의</strong> 親 筆 로 판단된다. 두 번째 것은 해서체인데, 誤 字 가 있으면 글자 위에 두껍게 쓰거나 誤 字에 동그라미를 치고 界 線 상단에 교정된 글자를 썼다. 이는 박지원이 초서체로 작성한 것을 그의 手 下 에있던 書 吏 등이 다시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칠사고는 박지원이 직접 편집한 牧 民 書 으로 총 29항목 190조, 114개의 細 目 으로 구성된다. 박지원은이 책의 성격을 “ 編 輯 ”이라 표시했는데, 기왕에 나온 목민서를 읽으면서 자료를 초록한 것이 대부분이다. 박지원은 牧 民 攷 계열의 목민서를 가장 많이 참고했다.칠사고의 내용에 나타나는 특징은, 사대부 출신의 수령을 위한 지침서라는 점, 각종 공문서를 철저히 관리하고 재화의 이동은 업무상 관련자들이 공동으로 감독하게 했다는 점, 還 穀 과 軍 政 의 운영은 향촌의 기본 단위인 村 落 을 바탕으로 한 統 과 里 를 기준으로 했다는 점, 농사에서 水 利 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서양의 水 車 제도를 도입하자고 한 점을 들 수가 있다.칠사고는 완전한 저작으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에 있다. 이 책이 완전한 저작이 되려면 서문과 목차가 추가되고, 본문의 체계화가 이뤄지며, 항목 별로 <strong>박지원의</strong> 견해를 밝힌 ‘ 按 ’이 추가되어야 한다.칠사고는 문장가이자 농학가였던 박지원에게 牧 民 官 의 측면이 있었음을 주목하게 하는 자료이다.박지원은 관할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오랫동안 축적해 온 실용적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七 事 考 는 그러한 노력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필자는 칠사고는 ‘면천군수 <strong>박지원의</strong> 실용적 지식이 반영된 18세기 말의 목민서’라고 판단한다.[주제어] 박지원, 면양잡록, 칠사고, 목민서, 면천군수* <strong>단국대학교</strong> 사학과 교수 / kmsik@dankook.ac.kr- 21 -


2東 洋 學❙목Ⅰ. 머리말Ⅱ. 필사본 면양잡록의 내용Ⅲ. 칠사고의 편집 방식차❙Ⅳ. 칠사고 내용의 특징Ⅴ. 맺음말Ⅰ. 머리말<strong>단국대학교</strong>에 있는 연민문고는 연민( 淵 民 ) 이가원( 李 家 源 ) 선생(1917~2000)께서 평생을 두고 수집한 도서와 유물자료를 말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자료는 고도서 필사본이라 할 수 있다. 연민문고의 고도서는 총 4천책에 이르고, 선본( 善 本 )이라 할 수 있는 필사본 고도서만 하더라도1천책이 넘는데, 여기에는 박지원( 朴 趾 源 ), 박제가( 朴 齊 家 ), 정약용( 丁 若 鏞 )의 저작이 다수 포함되어있다. 1) <strong>단국대학교</strong> 동양학연구소는 2009년에 연민문고의 고도서 필사본을 대상으로 한 해제 사업을시작했는데, 필자도 이 사업에 참여하면서 박지원이 작성한 칠사고( 七 事 考 )를 만나게 되었다.박지원(1737~1805)은 1780년(정조 4)에 중국의 북경과 열하를 여행한 이후 열하일기를 작성했고,1786년(정조 10)에는 음직( 蔭 職 )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하여 1792년에 안의현감( 安 義 縣 監 ), 1797년에면천군수( 沔 川 郡 守 ), 1800년에 양양부사( 襄 陽 府 使 )를 역임했다. <strong>박지원의</strong> 사환기( 仕 宦 期 )는 전후 15년에 이르는데, 50세라는 상당히 늦은 나이에 관리 생활을 시작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지방관으로 보냈다는 점이 특징이다.박지원은 1797년(정조 21) 7월에 국왕 정조에 의해 면천군수로 임명되어 7월 15일에 충청도 면천에 부임했다. 이후 그는 1800년 8월까지 면천군수로 활동했는데, 현지에서 그가 작성한 글을 모은것이 연민문고에 들어있는 면양잡록( 沔 陽 雜 錄 )이다. 필사본 면양잡록은 현재 낙질본 6책이 남아있는데, 그 중에는 박지원이 작성한 목민서로 파악되는 칠사고의 필사본 2종이 포함되어 있다.본고는 <strong>박지원의</strong> 목민서인 칠사고의 내용과 특징을 소개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 먼저박지원이 작성한 면양잡록의 내용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다음에 칠사고가 편집되는 방식과 그내용에 나타나는 특징을 소개하고자 한다. 박지원이 면천군수 시절에 작성한 글로는 과농소초( 課 農小 抄 )와 「서이방익사( 書 李 邦 翼 事 )」가 널리 알려져 있다. 필자는 이번에 <strong>박지원의</strong> 칠사고를 처음소개함으로써, 그가 뛰어난 문장가이자 농학가임과 동시에 목민관으로서의 측면도 있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1) 연민문고의 도서 현황에 대해서는 김문식, 「단국대 소장 연민문고 필사본의 자료적 가치」, 東 洋 學 43, 2008, 160~164쪽 참조.- 22 -


<strong>연암</strong> <strong>박지원의</strong> 牧 民 書 , 七 事 考 3Ⅱ. 필사본 면양잡록의 내용면양잡록( 沔 陽 雜 錄 )은 23.7×15.5cm 크기의 필사본인데, 현재는 6책(2, 3, 4, 6, 7, 8책)만 남아있는 缺 本 이다. 2) 상하단변( 上 下 單 邊 ) 좌우쌍변( 左 右 雙 邊 )의 선장본( 線 裝 本 )으로 상하에 흑색어미( 黑 魚 尾 )가 있고, 판심의 하단에 “ 燕 巖 山 房 ”이라 새겨져 있는 <strong>박지원의</strong> 가장본( 家 藏 本 )이다. 또 본문에는 <strong>박지원의</strong> 친필이 많이 보이므로, 필사본 면양잡록의 자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면양잡록”이란 ‘면천군수로 근무할 때 작성한 잡다한 기록’이라는 뜻인데, 잡록이라고 할 만큼수록된 글의 종류와 내용이 다양하다. 책의 표지에는 각 책의 내용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는데, 2책은 “ 襍 錄 疏 箚 讞 辭 ”, 3책은 “ 農 書 應 製 農 書 引 用 書 目 抄 出 次 三 ”, 4책은 “ 八 道 戶 口 數 田 結 都 摠 農 書艸 文 □ 3) 抄 出 詩 二 □ 四 ”, 6책은 “ 雜 著 七 事 撮 要 ”, 7책은 “ 七 事 考 ”, 8책은 “ 襍 錄 序 記 墓 文 疏 一蠹 事 實 戊 申 日 記 ”이다. 이를 보면 각 책에는 비슷한 성격의 글들이 모여 있지만, 책 사이의 공통점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후술할 칠사고을 보면 ‘수령으로 부임하는 즉시 공책( 空 冊 ) 5~6권을 만들어 백성들이 올리는 소지( 所 志 )에서 윤기( 倫 紀 ), 전정( 田 政 ), 군정( 軍 政 ), 환곡( 還 穀 ), 관속( 官 屬 )의 폐단에 해당하는 것을 분류하여 기록하라’는 내용이 있는데, 4) 면양잡록은 박지원이 면양군수로 부임한 직후 몇 권의 공책을 만들어 비슷한 성격의 글을 분류하여 기록한 것으로 이해된다.면양잡록이 작성된 시기는 박지원이 면천군수로 재임한 1797년 7월부터 1800년 8월 사이가 된다. 그런데 제1책에는 1799년( 嘉 慶 4) 5월 16일에 나온 관찰사의 감결( 甘 結 )이 베껴져 있고, 제3~4책에는 1799년 봄에 농서를 구하는 정조의 윤음( 綸 音 )에 화답하여 올린 과농소초의 초고가 있으므로,최종적인 시점은 1799년 5월에서 1800년 8월 사이가 된다.면양잡록의 책별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먼저 제2책에는 상소문, 기문( 記 文 ), 서간, 피의자를조사한 언사( 讞 辭 )에 해당하는 글이 있는데, 이를 분류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上 疏 :「 洪 良 浩 上 疏 」, 「 嶺 伯 辭 職 疏 」( 趙 鎭 宅 ), 「 錢 幣 疏 」( 洪 良 浩 )記 文 :「 比 屋 希 音 頌 」( 朴 齊 家 ), 「 咸 陽 學 士 樓 記 」, 「 澹 然 亭 記 」, 「 居 昌 縣 五 愼 祠 記 」, 「 陜 川 華 陽 洞 丙 舍記 」, 「 安 義 縣 縣 司 祀 郭 候 記 」, 「 興 海 掾 房 記 」( 成 大 中 )書 簡 :「 賀 族 姪 拜 因 論 寺 奴 書 」, 「 答 表 姪 朴 見 卿 」( 李 栽 ), 「 答 李 監 司 謫 中 書 」, 「 呈 上 渭 城 使 君 」( 無 名 氏 )讞 辭 :「 扶 餘 梁 臥 乙 伊 被 懸 空 致 死 獄 案 題 辭 」, 「 禮 山 金 分 德 被 縊 死 及 徐 種 租 自 縊 死 屍 身 覆 檢題 辭 」, 「 永 春 李 應 令 推 擠 其 妹 阿 只 以 致 溺 死 事 題 辭 」, 「 恩 津 金 履 一 同 推 狀 書 目 題 辭 」, 「 泰 安 車命 天 推 溺 其 妻 金 女 致 死 事 狀 題 」, 「 泰 安 車 命 天 妻 金 女 被 溺 致 死 覆 檢 狀 題 」, 「 黃 澗 金 召 史 招 引 丁女 事 現 發 後 羞 愧 自 裁 狀 題 )」, 「 牙 山 長 在 淵 中 三 屍 檢 報 題 」, 「 平 澤 頭 里 浦 口 屍 親 檢 報 題 」, 「 淸 州2) 1968년 國 會 圖 書 館 에서 작성한 韓 國 古 書 綜 合 目 錄 에는 朴 趾 源 의 후손인 朴 泳 範 이 필사본 沔 陽 雜 錄 6책을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김윤조 역주, 역주과정록, 태학사, 1997, 157쪽, 주 25) 참조).3) □는 종이가 문드러져 判 讀 이 되지 않은 글자를 표시한 것이다. 이하 동일함.4) 주 36) 참조.- 23 -


4東 洋 學秦 夢 打 殺 秦 士 得 後 自 斃 檢 狀 題 」, 「 海 美 吳 星 哲 金 今 山 崔 巡 業 相 詰 後 飮 滷 事 檢 狀 題 」, 「 淸 州 秦 士得 被 打 致 死 檢 狀 題 」公 文 :「 巡 營 甘 結 」(1799년 5월 16일)이를 보면 제2책에는 다른 사람이 작성한 글, 박지원이 작성한 글, 박지원이 관리로 근무하면서받은 공문서가 섞여 있다. 이중 「 咸 陽 學 士 樓 記 」, 「 澹 然 亭 記 」, 「 居 昌 縣 五 愼 祠 記 」, 「 陜 川 華 陽 洞 丙 舍 記 」,「 安 義 縣 縣 司 祀 郭 候 記 」는 박영철본 <strong>연암</strong>집에도 수록된 <strong>박지원의</strong> 글인데, 함양, 거창, 합천, 안의란지명은 그가 안의현감으로 근무할 때 인근에 있던 지역이다. 5)제3책은 과농소초의 초고( 草 稿 )에 해당한다. 제일 앞에는 “ 羣 書 目 ”이라 하여 인용서목이 나오는데, 중국본 29종, 조선본 6종을 합하여 총 35종의 목록이 정리되어 있다. 6) 과농소초의 인용서목은박영철본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 자료이다. 본문의 제목 아래에는 “ 沔 川 郡 守 臣 朴 趾 源 編 輯 ”이라 기록하고, 본문에서는 “ 經 ” 다음에 유교 경전에서 농업과 관련된 구절을 뽑아 정리하고, 각 조목의 끝에 작은 글자로 출전을 기록했다. 계선( 界 線 )의 상단에 항목별 일련번호를 붙였는데 “ 一 ”에서 “ 七 十四 ”까지 있으며, “ 七 十 五 ”의 글은 박영철본 과농소초 권수( 卷 首 )의 「편제( 編 題 )」에 해당하는데, 초서체로 필사하고 수정한 표시가 있다. 여기서 수정한 내용은 박영철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맨 마지막 글은 「 進 課 農 小 抄 文 」에 해당하는데 해서체로 깨끗하게 필사했다. 책 표지에 “ 抄 出 次 ”라 기록했고, 본문에는 경( 經 )에서 초록한 자료만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과농소초의 첫 번째 상태를 보여주는 초고로 판단된다.제4책에는 박지원이 작성한 글, 다른 사람이 작성한 글, 과농초소의 초고가 섞여 있는데, 이를분류하면 다음과 같다.<strong>박지원의</strong> 글:「 海 印 寺 唱 酬 詩 序 」(1795. 9. 20), 「 朴 烈 婦 傳 」, 「 馹 汛 隨 筆 序 」, 「 楊 經 理 鎬 致 祭 文代 撰 」, 「 邢 軍 門 玠 致 祭 文 代 撰 」, 「 答 巡 使 書 」, 「 答 巡 使 論 賑 政 書 」타인의 글:「 蘇 雲 卿 傳 」, 「 杜 五 郞 傳 」, 「 五 部 八 道 戶 口 都 數 記 」(1639~1798)과농소초 초고:「 進 課 農 小 抄 文 」 초고, 「 限 民 名 田 議 」 초고 1, 「 限 民 名 田 議 」 초고 2, 「 課 農小 抄 總 目 」, 「 課 農 小 抄 諸 家 總 論 」 「 課 農 小 抄 占 候 」 「 課 農 小 抄 農 器 」 7)5) 金 榮 鎭 은 「 咸 陽 學 士 樓 記 」의 작성 연대를 1794년, 「 澹 然 亭 記 」는 1787~1795년, 「 居 昌 縣 五 愼 祠 記 」는 1792~1793년, 「 安義 縣 縣 司 祀 郭 候 記 」는 1795년으로 고증했는데, 이는 沔 陽 雜 錄 의 작성이 시작되는 시점과 관련하여 유의할 필요가있다(「 朴 趾 源 의 필사본 小 集 들과 작품 창작년 고증」, 大 東 漢 文 學 제23집, 2005, 69쪽 참조).6) 中 國 本 목록은 筦 子 , 商 子 , 呂 覽 , 亢 倉 子 , 氾 勝 之 書 ( 漢 儒 ), 濟 民 要 術 ( 元 魏 賈 思 勰 ), 四 時 纂 要 ( 唐 韓 鄂 ), 勸 農 文 ( 朱 子 ), 農 書 ( 宋 全 眞 子 陳 雱 文 獻 通 考 中 攷 出 ), 農 桑 輯 要 ( 明 苗 好 謙 ), 農 說 ( 馬 一 龍 ), 農 桑 通 訣 ( 元 王禎 ), 山 林 經 濟 籍 ( 明 屠 隆 ), 神 隱 , 種 樹 書 ( 兪 貞 木 ), 務 本 新 書 , 四 民 月 令 ( 崔 寔 ), 閑 情 錄 , 四 時 類 要 , 陸 桴亭 ( 明 陸 世 儀 ), 纂 文 , 纂 要 補 , 傳 子 , 種 蒔 直 說 , 韓 氏 直 說 , 直 說 補 , 農 桑 直 說 , 田 園 必 考 , 居 家 必 用 이다. 다음으로 朝 鮮 本 목록은 衿 陽 雜 錄 ( 姜 希 孟 ), 穡 經 ( 朴 世 堂 ), 農 事 直 說 ( 申 洬 ), 增 補 山 林 經 濟 ( 柳 重 霖 ), 攷事 新 書 ( 徐 命 膺 ), 田 家 月 令 이다.7) 「 農 器 」의 細 目 에는 耒 耟 , 犁 , 櫌 , 方 耙 , 人 字 耙 , 耖 , 勞 , 耬 車 , 瓠 種 , 磟 碡 , 撻 , 砘 車 , 銕 刃 杴 , 銕 搭 , 秧 馬 , 耨 , 耰鉏 , 耬 鋤 , 鐮 , , 連 耞 , 碓 , 礱 磨 , 輾 , 海 靑 輾 , 連 磨 , 䃺 , 颺 扇 이 있다.- 24 -


<strong>연암</strong> <strong>박지원의</strong> 牧 民 書 , 七 事 考 5이중 「 楊 經 理 鎬 致 祭 文 」과 「 邢 軍 門 玠 致 祭 文 」은 판심에 “ 燕 巖 山 房 ”이 있고 세로 20행, 가로 10행의선이 인쇄된 용지에 기록했는데, 이는 금석문을 기록하는 <strong>박지원의</strong> 전용 원고지에 해당한다. 제4책의 과농소초 초고는 제3책의 초고보다 더욱 정리된 형태이고, 낙질( 落 帙 )인 제5책은 제4책에 수록된 「 課 農 小 抄 總 目 」과 박영철본 과농소초를 비교할 때 과농소초의 「 授 時 」, 「 田 制 」, 「 耕 墾 」, 「 糞壤 」, 「 水 利 」, 「 擇 種 」, 「 播 穀 」, 「 諸 穀 品 名 」, 「 鋤 治 」, 「 收 穫 」, 「 養 牛 」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제6책의 전반부는 연상우필( 烟 湘 偶 筆 )인데, 제목 아래에 “ 潘 南 朴 趾 源 美 仲 著 ”라고 기록했다. 박지원은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관아 자리에 연상각( 烟 湘 閣 )이란 건물을 지었고, 박영철본에는 연상각선본( 烟 湘 閣 選 本 )이 들어있기도 하다. 연상우필에는 박지원이 서적에서 보거나 직접 경험한 내용을표제어를 뽑고 그에 관한 자료들을 정리했는데, 표제어는 다음의 48개이다.擁 奴 矦 , 小 卿 判 事 , 莎 , 踏 秧 鬚 , 萬 卷 堂 , 順 濟 廟 , 海 印 寺 , 銅 人 腧 穴 , 四 月 八 日 放 燈 , 五 絃 琵 琶 ,獅 子 , 降 仙 樓 , 李 榮 賢 , 王 越 試 券 , 皇 明 科 年 定 制 , 天 順 七 年 會 試 貢 院 火 , 新 羅 戶 , 證 高 麗 史 ,朝 鮮 牧 丹 , 艾 虎 , 十 可 笑 , 移 離 畢 , 張 欽 閉 關 三 疏 , 子 規 , 洪 光 寺 圓 殿 , 慶 壽 寺 大 藏 經 碑 , 詤 糧 臺 ,碽 妃 , 胡 元 理 學 之 盛 , 拜 荊 , 還 鄕 河 , 桂 苑 筆 耕 , 兩 衝 京 尹 , 千 佛 寺 , 涿 郡 漢 昭 烈 皇 帝 廟 碑 , 落 翮 山 ,一 胎 四 男 , 海 東 靑 , 省 吾 , 嘉 慶 元 年 春 無 花 , 四 視 , 頃 刻 碑 , 天 馬 歌 , 天 主 二 字 , 祭 天 金 人 , 幻 人 ,荒 山 大 捷 之 碑 , 薊 門 烟 樹 , 武 庫 火이 중 24개는 열하일기 「구외이문( 口 外 異 聞 )」의 후반부를 구성하고, 2개( 天 主 二 字 , 幻 人 )는 <strong>연암</strong>집 권2, 연상각선본, 「답순사서( 答 巡 使 書 )」에 박종채( 朴 宗 采 , 1780~1835)가 추가한 부록에 포함되어 있다. 9)제6책의 후반부와 제7책은 칠사고인데, 이에 대해서는 3장에서 설명하기로 한다.제8책의 표지에는 “ 襍 錄 序 記 墓 文 疏 一 蠹 事 實 戊 申 日 記 ”라 했는데, 다양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를 분류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記 文 :「 換 鵝 亭 記 」( 宋 時 烈 ), 「 換 鵝 亭 重 新 記 」( 李 景 奭 ), 「 瀟 灑 亭 記 」( 李 勉 齊 )鄭 汝 昌 (1450~1504) 관련:「 一 蠹 事 實 」, 「 行 狀 」墓 文 :「 雪 壑 齋 鄭 公 神 道 碑 銘 」( 鄭 存 謙 ), 「 神 道 碑 銘 」( 鄭 經 世 ), 「 曾 王 考 中 直 大 夫 行 通 禮 院 引 儀 公8) 박영철본 課 農 小 抄 는 編 題 , 進 課 農 小 抄 文 , 諸 家 總 論 , 授 時 , 占 候 , 田 制 , 農 器 , 耕 墾 , 糞 壤 , 水 利 , 擇 種 , 播 穀 , 諸 穀品 名 , 鋤 治 , 收 穫 , 養 牛 , 限 民 名 田 議 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에서 제4책에는 進 課 農 小 抄 文 , 限 民 名 田 議 , 諸 家 總 論 , 占候 , 農 器 부분이 있으므로, 제5책에는 授 時 , 田 制 , 耕 墾 , 糞 壤 , 水 利 , 擇 種 , 播 穀 , 諸 穀 品 名 , 鋤 治 , 收 穫 , 養 牛 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9) 김명호 교수의 敎 示 를 따른 것이다. 熱 河 日 記 「 口 外 異 聞 」에 포함된 24개 표제어는 擁 奴 矦 , 莎 , 順 濟 廟 , 海 印 寺 ,四 月 八 日 放 燈 , 五 絃 琵 琶 , 獅 子 , 降 仙 樓 , 李 榮 賢 , 王 越 試 券 , 天 順 七 年 會 試 貢 院 火 , 新 羅 戶 , 證 高 麗 史 , 朝 鮮 牧 丹 , 艾 虎 ,十 可 笑 , 子 規 , 慶 壽 寺 大 藏 經 碑 , 詤 糧 臺 , 胡 元 理 學 之 盛 , 拜 荊 , 還 鄕 河 , 桂 苑 筆 耕 , 千 佛 寺 이다.- 25 -


6東 洋 學墓 碣 銘 」( 禹 汝 楙 )기타:「 山 城 實 蹟 」, 「 居 昌 縣 戊 申 討 逆 日 記 」, 「 朴 烈 婦 傳 」이상에서 환아정( 換 鵝 亭 )은 산청, 「 居 昌 縣 戊 申 討 逆 日 記 」은 거창, 「 一 蠹 事 實 」과 「 行 狀 」은 함양 출신鄭 汝 昌 (1504~1610), 「 山 城 實 蹟 」과 「 神 道 碑 銘 」은 안음현감 곽준( 郭 䞭 , 1551~1597), 「 朴 烈 婦 傳 」은 안의출신 박씨 여인의 행적과 관련이 있으므로, 박지원이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와 관련이 있는 글이라 할수 있다. 이중에서 <strong>박지원의</strong> 글은 「 朴 烈 婦 傳 」인데, 이는 박영철본 「 烈 女 咸 陽 朴 氏 傳 」의 초고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문에 수정표시가 있고, 계선 상단에 내용을 추가하는 첨지가 많이 붙어있다. 10) 또한「 曾 王 考 中 直 大 夫 行 通 禮 院 引 儀 公 墓 碣 銘 」은 금석문을 기록하는 전용 원고지에 기록했다.제8책의 마지막에 있는 단구관집( 丹 邱 館 集 )은 시집이다. 시 제목은 「 官 樓 月 夜 」 「 矗 石 樓 」 「 挽 河樓 月 夜 」 「 泛 舟 閒 山 島 」 「 制 勝 堂 」 「 月 夜 回 舟 」 「 洗 兵 館 觀 樂 」 「 夜 宿 山 淸 時 主 倅 以 差 員 赴 京 」 「 安 義 孔 雀 館 」「 咸 陽 別 主 倅 瓜 歸 」인데, 진주, 한산도, 산청, 안의, 함양 등의 지명이 나타난다. 이들 시가 <strong>박지원의</strong>작품인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다.이상에서 보듯 면양잡록에는 박지원이 지은 글과 수정을 가한 것, 다른 사람이 지은 글의 전문( 全 文 )을 베끼거나 일부분을 초록( 抄 錄 )한 것이 뒤섞여 있다. 이는 박지원이 글을 지을 때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초고를 작성하며, 초고를 수정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데, <strong>박지원의</strong> 글이 작성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Ⅲ. 칠사고의 편집 방식1. 2종의 필사본칠사고는 2종의 필사본이 있는데, 1종은 면양잡록 제6책 후반부(85면, 이하 ‘A본’이라고 함)에있고, 나머지 1종은 면양잡록 제7책(133면, 이하 ‘B본’이라고 함)에 있다. 책 이름의 “칠사( 七 事 )”란 수령칠사( 守 令 七 事 )에서 나온 것이므로, 11) 칠사고란 ‘수령이 해야 할 일을 고찰하는 서적’이라10) 「 朴 烈 婦 傳 」은 沔 陽 雜 錄 의 제4책과 제8책에 수록되어 있는데, 두 곳 모두 내용을 추가하거나 문구를 삭제한 표시가 많이 있어 원문의 대조가 필요하다.11) 七 事 考 「 時 措 」.“ 高 麗 顯 宗 九 年 , 定 州 府 貞 額 , 奉 行 六 條 . 一 察 民 苦 , 二 察 長 吏 能 否 , 三 察 盜 賊 奸 猾 , 四 察 民 犯 禁 , 五 察 民 孝 悌 廉 潔 , 六 察 吏 錢穀 放 失 . 辛 禑 元 年 , 敎 守 令 考 績 五 事 , 田 野 闢 , 戶 口 增 , 賦 役 勻 , 詞 訟 簡 , 盜 賊 息 . 辛 昌 卽 位 , 趙 俊 上 書 , 請 以 田 野 闢 , 戶 口 增 ,詞 訟 簡 , 賦 役 勻 , 學 校 興 五 事 , 巡 察 州 郡 , 而 黜 陟 之 . 本 朝 經 國 大 典 , 爲 七 事 , 比 勝 國 之 制 加 詳 , 而 守 令 無 能 此 七 事 者 .조선시대에는 七 事 問 答 七 事 擧 란 書 名 을 가진 牧 民 書 가 있고, 「 守 令 七 事 問 答 」 「 七 事 提 要 」 「 七 事 綱 領 大 志 」 등의 항목이 포함된 牧 民 書 도 있었다(김선경, 「조선후기 목민학의 계보와 목민심서」, 朝 鮮 時 代 史 學 報 52, 2010,162~173쪽).- 26 -


<strong>연암</strong> <strong>박지원의</strong> 牧 民 書 , 七 事 考 7는 뜻이다. 이중에서 A본은 부분적으로 해서체가 있지만 대부분 초서체로 되어 있는데, <strong>박지원의</strong> 친필로 판단된다. 이는 면천군수 박지원이 각종 서적을 읽으면서 목민과 관련된 내용을 초록하여 빠른속도로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B본은 해서체인데, 오자( 誤 字 )가 있으면 글자 위에 두껍게 쓰거나 글자에 동그라미를 치고 계선 상단에 교정 글자를 썼다. B본의 내용은 A본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박지원이 작성한 A본을 바탕으로 그의 수하( 手 下 )에 있던 서리( 書 吏 ) 등이 다시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칠사고는 박지원이 편집한 목민서( 牧 民 書 )이다. 여기서 “편집”이라 하는 이유는 A본의 첫째 면에 박지원 자신이 “ 七 事 考 編 輯 ”이라 기록한데다, 여러 서적에서 목민에 관련된 내용을 초록하여 본문을 만든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strong>박지원의</strong> 저작은 여러 단계를 거쳐 완성되었는데, 그가 과농소초를 편찬할 때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다음은 <strong>박지원의</strong> 아들인 박종채( 朴 宗 采 )가 작성한 것이다.기미년(1799, 정조 23) 봄에 교지를 받들어 농서를 편찬하여 올렸다. 선군( 先 君 , 박지원)께서<strong>연암</strong>협( 燕 巖 峽 )에 들어가신 이후에는 농가( 農 家 )류 서적 읽기를 가장 좋아하여 글상자에 초록이풍부하게 있었다. 이해 정월에 상(정조)께서 특별히 「농정( 農 政 )을 권하고 농서( 農 書 )를 구하는윤음( 綸 音 )」을 내려 관찰사와 수령에게 각자 편찬하여 올리게 하셨다. 선군께서 드디어 예전에초록해 놓은 것을 가지고 안설( 按 說 )을 짓고, 연행( 燕 行 ) 때 본 것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실천할만한 것을 참고하였다. 모두 14편(권)이며, ‘과농소초’라고 했다. 따로 「한민명전의( 限 民 名 田 議 )」1편을 편찬하여 그 끝에 붙여서 올렸다. 모두 선군께서 강마( 講 磨 )하셨던 것으로, 국내에서 한번 시험해 보려 하신 것이다. 12)이상에서 박지원이 과농소초를 편찬한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 평소에 서적을 읽으면서 필요한 사항을 초록하여 모아둔다.2. 초록한 것을 바탕으로 안설을 작성한다.3. 중국에서 목격한 것 가운데 조선에서 실천할 만한 것을 참고하여 반영한다.4. 「한민명전의」를 따로 편찬하여 끝에 붙인다.이러한 과정을 <strong>박지원의</strong> 칠사고에 적용해 보면 첫 번째와 세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박지원이기왕에 나온 목민서를 읽으면서 자료를 초록한 것이 대부분이고, 중국의 역사서 등에서 목민에 관한내용을 초록한 것이 추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A본은 자료를 초록한 상태 그대로이지만, B본은이를 다시 정사( 精 寫 )하고 추록( 追 錄 )한 내용도 있으므로, 첫 번째 단계에서 좀 더 진전된 것으로 볼12) 過 庭 錄 권3.“ 己 未 春 , 奉 旨 撰 進 農 書 . 先 君 , 入 峽 以 後 , 最 喜 讀 農 家 子 類 , 盎 葉 縹 緗 , 抄 錄 富 有 . 及 是 歲 正 月 , 上 特 下 「 勸 農 政 求 農 書 綸音 」, 使 方 伯 守 宰 , 各 自 撰 進 . 先 君 , 遂 因 昔 日 所 抄 錄 者 , 而 作 按 說 , 參 以 燕 行 所 見 之 可 行 於 吾 東 者 , 凡 十 有 四 編 , 名 之 曰 ‘ 課農 小 抄 ’. 別 撰 「 限 民 名 田 議 」 一 篇 , 以 附 其 末 , 以 奏 之 . 皆 先 君 , 所 嘗 講 磨 , 欲 一 試 於 域 中 者 也 .”- 27 -


8東 洋 學수 있다.칠사고의 목차는 총 29항목 190조, 114개의 세목( 細 目 )으로 구성되는데, 이를 정리하면 과같다. 칠사고의 목차번호 목차 條 目 細 目 인 용 비 고1 姦 猾 息 27漢 書 後 漢 書 晉 書北 史 宋 史宋 名 臣 錄2 臨 民 政 要 12 13尤 菴 明 齋 歸 尾歸 鹿3 自 治 而 治 人 74 得 人 心 65 除 拜 46 中 路 7 歸 鹿7 嚴 內 外 8尤 菴 牧 民 攷 에는 尤 齋8 坐 衙 39 聽 訟 10 2010 儲 置 米 還 穀 附 9 4 斗 升 式11 統 還 法 1 412 分 統 法 1 713 統 捧 法 1 914 治 民 1 1415 家 坐 法 1 216 五 家 統 事 目 1 10 肅 廟 朝 元 年 乙 卯 (1675)17 文 報 1 218 官 廳 用 餘 記 付 庫 1 319 反 庫 1 120 武 備 121 軍 政 1 1422 田 政 1 923 刑 獄 7 歸 鹿24 歉 歲 125 賑 政 126 時 措 46 227 敎 化 328 聽 訟 24(+2) 北 史 , 風 俗 通29邪 學 本 以 昇 天 之 說誨 誘 愚 民 本 出 柔 然계 190 114(1)各 面 風 約 尊 位 處 傳 令 ,單 子 規 式 ,年 分 單 子 規 式- 28 -


<strong>연암</strong> <strong>박지원의</strong> 牧 民 書 , 七 事 考 9A본과 B본을 대조하면, A본에 없던 2개 조가 B본의 「 聽 訟 」에 추가되었고, A본에 있던 1개 조( 邪學 本 以 昇 天 之 說 誨 誘 愚 民 本 出 柔 然 )가 B본에서는 사라졌다. 이들 3개 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글자가 일치하는 부분은 진하게 표시했다. 資 治 通 鑑 권283, 後 晉 紀 4( 齊 王 天 福 八 年 ), 自 烈 祖 相 吳 , 禁 壓 良 爲 賤 , 令 買 奴 婢 者 , 通 官 作 券 .⇒ 七 事 考 「 聽 訟 」25. 13) 禁 厭 良 爲 賤 , 令 賣 奴 婢 者 , 通 官 作 券 , 此 南 唐 烈 祖 之 良 法 . 盖 古 有 其 制 , 而 列 朝 申 嚴 之 也 . 資 治 通 鑒 권289, 後 漢 紀 4丁 亥 , 汝 州 奏 防 禦 使 劉 審 交 卒 . 吏 民 , 詣 闕 上 書 , 以 審 交 有 仁 政 , 乞 留 葬 汝 州 , 得 奉 事 其 丘 壟 , 詔 許 之 .州 人 相 與 聚 哭 而 葬 之 . 以 爲 立 祠 , 歲 時 享 之 . 太 師 馮 道 曰 , “ 吾 嘗 爲 劉 君 僚 佐 , 觀 其 爲 政 , 無 以 逾 人 , 非 能減 其 租 賦 , 除 其 繇 役 也 , 但 推 公 廉 慈 愛 之 心 , 以 行 之 耳 . 此 亦 衆 人 所 能 爲 , 但 他 人 不 爲 , 而 劉 君 獨 爲 之 , 故汝 人 愛 之 如 此 . 使 天 下 二 千 石 , 皆 效 其 所 爲 , 何 患 得 民 不 如 劉 君 哉 .”⇒ 七 事 考 「 聽 訟 」26. 五 代 時 , 漢 汝 州 防 禦 使 劉 審 交 卒 . 汝 州 吏 民 , 詣 闕 上 書 , 以 審 交 有 仁 政 , 乞 留 葬 汝 州 , 得 奉 事 其 壟 墓 ,許 之 . 州 人 爲 立 祠 , 歲 時 享 之 . 馮 道 曰 , “ 吾 嘗 爲 劉 君 僚 佐 , 觀 其 爲 政 , 無 以 踰 人 , 非 能 減 其 租 賦 , 除 其 繇 役也 . 但 推 公 廉 慈 愛 之 心 , 以 行 之 耳 . 此 亦 衆 人 之 所 能 爲 , 而 但 他 人 不 爲 , 獨 劉 君 爲 之 . 故 汝 人 愛 之 如 此 . 使天 下 二 千 石 , 皆 效 其 所 爲 , 何 患 得 民 不 如 劉 君 哉 .” 資 治 通 監 권149, 梁 紀 5初 , 柔 然 佗 汗 可 汗 納 伏 名 敦 之 妻 , 候 呂 陵 氏 , 生 伏 跋 可 汁 及 阿 那 瑰 等 六 子 , 伏 跋 既 立 , 忽 亡 其 幼 子 祖 惠 ,求 募 不 能 得 . 有 巫 地 萬 言 , “ 祖 惠 今 在 天 上 , 我 能 呼 之 .” 乃 於 大 澤 中 , 施 帳 幄 , 祀 天 神 . 祖 惠 忽 在 帳 中 , 自雲 恒 在 天 上 . 伏 跋 大 喜 , 號 地 萬 爲 聖 女 , 納 爲 可 賀 敦 . 地 萬 , 既 挾 左 道 , 復 有 姿 色 , 伏 跋 , 敬 而 愛 之 , 信 用其 言 , 干 亂 國 政 . 如 是 積 歲 , 祖 惠 浸 長 , 語 其 母 曰 , “ 我 常 在 地 萬 家 , 未 嘗 上 天 . 上 天 者 , 地 萬 教 我 也 .” 其母 , 具 以 狀 告 伏 跋 , 伏 跋 曰 , “ 地 萬 能 前 知 未 然 , 勿 為 讒 也 !” 既 而 地 萬 懼 , 譖 祖 惠 於 伏 跋 而 殺 之 . 候 呂 陵氏 , 遣 其 大 臣 具 列 等 , 絞 殺 地 萬 .⇒ 七 事 考 「 邪 學 本 以 昇 天 之 說 誨 誘 愚 民 本 出 柔 然 」1. 柔 然 可 汗 伏 名 敦 之 妻 , 候 呂 陵 氏 , 生 伏 跋 可 汗 及 阿 那 瑰 等 六 子 . 伏 跋 旣 立 , 忽 亡 其 幼 子 祖 惠 , 有 巫 地萬 言 , ‘ 祖 惠 今 在 天 上 , 我 能 呼 之 ’. 乃 於 大 澤 中 , 施 帳 幄 , 祀 天 神 , 祖 惠 忽 在 帳 中 , 有 言 ‘ 恒 在 天 上 .’ 伏 跋 大喜 , 號 地 萬 爲 聖 女 , 立 爲 可 賀 敦 . 祖 惠 浸 長 , 語 其 母 曰 , ‘ 我 常 在 地 萬 家 , 上 天 者 , 地 萬 敎 我 也 .’ 其 母 以 告 ,伏 跋 不 信 . 旣 而 地 萬 , 譖 祖 惠 殺 之 . 候 呂 氏 , 遣 其 大 臣 具 列 等 , 殺 地 萬 . 此 柔 然 亂 正 之 始 .13) “25”라는 숫자는 條 目 의 차례로 필자가 임의로 부여한 것이다. 이하 동일함.- 29 -


10東 洋 學이상을 보면 A본과 B본에서 차이가 나는 3개 조는 모두 자치통감에서 초록한 것이다. 이를 보면 박지원은 칠사고를 작성하던 마지막 단계에서는 자치통감을 읽으면서 목민에 관한 내용을초록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A본의 마지막은 「 邪 學 」으로 끝나지만, 14) B본의 마지막에는 발문에해당하는 글이 추가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人 有 恒 言 , 善 治 之 餘 , 爲 官 甚 難 , 吾 則 以 爲 不 然 . 善 治 者 , 已 有 規 模 , 不 踰 彀 律 . 故 後 來 者 , 苟 能 一遵 約 束 , 易 以 爲 治 , 終 歲 無 事 . 而 所 謂 不 治 者 , 卽 貪 饕 也 . 昏 亂 也 . 乖 謬 也 . 顚 倒 也 . 貪 饕 故 利 慾 蔽 之而 心 先 昏 亂 , 昏 亂 故 做 事 乖 謬 , 乖 謬 故 至 於 顚 倒 . 顚 倒 由 於 乖 謬 , 乖 謬 由 於 昏 亂 , 昏 亂 由 於 貪 饕 . 於 是焉 , 猾 吏 姦 民 , 乘 間 闖 發 , 賄 賂 嗾 囑 , 幻 弄 公 貨 , 訟 捷 非 理 , 公 行 攘 奪 . 一 年 二 年 之 間 , 事 事 受 病 , 一團 亂 麻 , 風 僞 渝 澆 , 遂 成 痼 瘼 . 後 來 者 , 雖 良 手 , 猝 莫 能 矯 捄 . 人 心 趨 利 , 如 水 就 下 , 逐 利 者 多 , 故 爲非 者 衆 .사람들은 항상 ‘잘 다스려진 다음에는 관리 노릇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않다고 생각한다. 잘 다스려졌다는 것은 이미 규모가 있어 정해진 규율을 벗어나지 않았으므로,뒤에 온 사람도 하나같이 약속한 것을 지키기만 하면 쉽게 다스려지고, 한해가 가도록 아무런일이 없다.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욕심이 과하고, 혼란하고, 어그러지고, 넘어진다는것이다. 욕심이 과하므로 이욕( 利 慾 )에 가려져 마음이 먼저 혼란해지고, 혼란하므로 일을 하는것이 어그러지고, 어그러지기 때문에 넘어지기에 이르는 것이다. 넘어지는 것은 어그러지는 것에서 나오고, 어그러지는 것은 혼란한 데서 나오며, 혼란한 것은 욕심이 과한 것에서 나온다.이 때 교활한 아전과 간사한 백성이 틈을 엿보다가 나타나, 뇌물을 보내고 사주하며, 공적인재화를 제 멋대로 다루고, 송사가 있으면 비리를 저지른 자가 이기고, 공공연히 약탈을 한다.한두 해 사이에 일마다 잘못되고, 한번 난마와 같이 얽히면 속이는 풍조가 넘쳐나 드디어 고질이 되어, 뒤에 온 사람이 비록 훌륭하다고 해도 갑자기 바로잡을 방도가 없다. 인심이 이익을좇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 같다. 이익을 좇는 자가 많기 때문에 비리를 저지르는 자가 많은 것이다.이상의 상황을 종합하면 박지원은 A본을 친필로 작성한 다음 이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 B본을 필사하게 했고, B본에 내용을 추가하던 중에 편찬 작업이 중단된 것으로 판단된다.2. 목민고와 칠사고의 비교박지원이 칠사고를 작성하면서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은 목민고( 牧 民 攷 ) 계열의 목민서였다. 15)14) A본의 「 邪 學 本 以 昇 天 之 說 誨 誘 愚 民 本 出 柔 然 」은 燕 巖 集 권2, 烟 湘 閣 選 本 , 「 答 巡 使 書 」에 포함되어 있다.15) “ 牧 民 攷 계열의 목민서”라고 표현한 것은 다른 목민서에도 牧 民 攷 와 일치하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김용흠은 조선후기의 목민서를 牧 民 攷 류와 先 覺 류로 구분하고, 治 郡 要 訣 牧 民 攷 四 政 考 居 官 大 要 牧 綱 은목민고류에 속한다고 했다(「18세기 ‘ 牧 民 書 ’와 지방통치」, 조선의 목민학 전통과 목민심서, 실학박물관 2010년특별전 기념 학술대회 발표문, 2010, 41~43쪽).- 30 -


<strong>연암</strong> <strong>박지원의</strong> 牧 民 書 , 七 事 考 11목민고는 현재 2종의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는데, 저자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18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 칠사고에는 목민고에서 초록한 내용이 많이 보이는데, 우선 목민고의 73개항목 가운데 칠사고와 일치하는 항목은 16개이다. 이를 진하게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17)1) 居 官 大 要 , 2) 自 治 , 3) 嚴 內 外 , 4) 得 人 心 , 5) 除 拜 , 6) 中 路 , 7) 到 任 , 8) 坐 衙 , 9) 聽 訟 ,10) 傳 令 , 11) 臨 下 , 12) 鄕 所 , 13) 得 人 , 14) 文 報 , 15) 考 察 文 書 下 記 , 16) 官 廳 , 18) 17) 接 客 式 ,18) 衙 客 食 床 每 員 , 19) 祭 需 , 20) 朔 燈 油 每 房 , 21) 工 房 , 22) 五 日 饌 物 式 例 , 23) 反 庫 , 24) 謹 守 公穀 , 25) 糶 糴 法 , 26) 先 整 斗 斛 升 合 , 27) 以 附 近 作 統 法 , 28) 定 日 分 給 , 29) 分 糴 , 30) 分 給 科 式 ,31) 還 上 還 捧 法 , 32) 治 民 , 33) 正 風 俗 , 34) 勸 農 業 , 35) 考 案 籍 , 36) 家 坐 法 , 37) 某 面 某 里 第 幾 統幾 戶 某 人 , 38) 五 家 統 事 目 , 39) 興 學 校 , 40) 小 學 講 節 目 , 41) 居 齋 節 目 , 42) 武 備 , 43) 火 藥 改 擣法 , 44) 束 伍 , 45) 軍 布 收 捧 法 , 46) 里 定 節 目 , 47) 里 定 報 草 , 48) 良 役 變 通 節 目 (1711), 49) 私 奴 婢弊 端 , 50) 乙 亥 減 尺 時 事 目 , 51) 治 盜 法 , 52) 治 盜 節 目 , 53) 田 政 , 54) 傳 令 , 55) 單 子 規 式 , 56) 作結 法 , 57) 養 戶 之 弊 , 58) 折 給 之 法 , 59) 火 田 新 加 耕 附 , 60) 虛 卜 , 61) 結 卜 來 移 去 之 弊 , 62) 復 戶 ,63) 査 括 漏 結 法 , 64) 踏 驗 定 式 , 65) 獄 政 , 66) 刑 杖 , 67) 上 司 , 68) 別 星 秩 , 69) 節 用 , 70) 賑 政 ,71) 解 由 , 72) 刑 獄 , 73) 私 酬 應다음으로 항목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목민고의 내용을 초록한 것이 있다. 가령 칠사고의 「임민정요( 臨 民 政 要 )」는 목민고의 「거관대요( 居 官 大 要 )」에서 초록한 것이 많이 나타나는데, 목민고의 제1, 제2, 제3, 제5, 제7, 제9, 제10 조목이 칠사고의 제1~제7 조목으로 변화했다.박지원이 목민고를 초록하는 방식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가장 흔한 것은 목민고의 조목 하나를 간추려 하나의 조목으로 만든 경우인데, 다음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하에서 진하게 표시한 글자는 내용이 일치하는 부분이다. 牧 民 攷 「 里 定 報 草 」10. 物 故 案 , 不 卽 成 出 之 弊 , 盖 因 小 民 蠢 愚 , 初 不 卽 告 官 . 旣 告 , 被 邑 吏 索 賂 物 , 官 捧 作 紙 , 一 案 之 成 ,須 用 錢 四 五 兩 . 故 難 於 辦 此 , 遂 延 打 耳 . 嚴 加 約 束 , 不 卽 告 官 者 , 重 究 而 □ 革 吏 習 , 俾 不 敢 索 賂 , 官 亦多 捧 作 紙 . 每 告 , 則 仔 細 檢 屍 , 旣 檢 , 卽 就 眼 案 前 , 成 立 案 , 招 屍 親 給 送 , 仍 置 籍 記 , 隨 卽 充 補 爲 當 .官 無 威 稜 , 則 民 纔 受 案 出 門 , 吏 復 還 奪 而 索 錢 矣 .16) 필사본 목민고는 장서각(B12FB11)과 규장각(고 5120-172)에 소장되어 있다. 목민고의 작성 시기에 대해 內 藤吉 之 助 와 金 善 卿 은 규장각본의 경우 영조 초기로 보았고, 김용흠은 장서각본은 18세기 중엽, 규장각본은 18세기 후반으로 추정했다.內 藤 吉 之 助 , 「 牧 民 篇 解 說 」 朝 鮮 民 政 資 料 牧 民 編 , 1942(영인본, 以 文 社 , 1977). 17~19쪽.金 善 卿 , 「 朝 鮮 民 政 資 料 叢 書 해제」, 朝 鮮 民 政 資 料 叢 書 , 驪 江 出 版 社 , 1986, 4쪽.김용흠, 윗 논문, 2010, 43~51쪽.17) 朝 鮮 民 政 資 料 叢 書 에 수록된 규장각본 牧 民 攷 를 대본으로 하였다.18) 필사본 牧 民 攷 의 표지에는 官 廳 다음에 工 庫 , 縣 司 , 氷 庫 3항목이 기록되어 있고, 內 藤 吉 之 助 도 이것이 目 錄 에포함된 것으로 언급했지만, 실제 본문에서는 해당 항목이 나타나지 않는다.- 31 -


12東 洋 學⇒ 七 事 考 「 軍 政 」1-8. 19) 物 故 立 案 , 不 得 成 給 之 弊 , 盖 緣 小 民 愚 蠢 , 不 卽 告 官 . 或 寡 婦 孤 兒 , 無 所 知 識 , 亦 被 色 吏 ,推 索 例 情 , 而 難 於 辦 此 , 遷 延 歲 月 者 , 有 之 . 官 無 威 嚴 , 則 雖 軫 念 此 等 弊 端 , 除 其 例 捧 , 卽 爲 檢 驗 , 卽成 文 狀 以 給 . 而 纔 出 官 門 , 吏 則 奪 其 成 案 , 而 如 前 索 錢 矣 . 牧 民 攷 「 自 治 」3. 七 情 之 中 , 惟 怒 最 難 制 , 臨 事 而 怒 , 則 心 動 而 昏 , 處 置 輒 乖 . 猛 加 抑 制 , 從 容 熟 思 而 處 之 .⇒ 七 事 考 「 自 治 而 治 人 」2. 七 情 之 中 , 惟 怒 最 難 制 , 臨 事 而 怒 , 則 心 動 而 識 昏 , 處 事 乖 當 . 居 官 者 , 宜 先 以 暴 怒 爲 戒 .다음으로 목민고의 조목 2개를 간추려 하나의 조목으로 만든 경우인데, 다음이 이에 해당한다. 牧 民 攷 「 聽 訟 」1. 所 志 , 勿 拘 寢 食 時 , 與 未 開 坐 , 隨 到 卽 呈 , 事 成 榜 文 , 貼 付 大 中 門 , 可 也 . 牧 民 攷 「 聽 訟 」2. 所 志 , 必 令 狀 者 , 入 庭 躬 呈 . 以 嚴 禁 其 自 外 阻 搪 者 , 隨 現 猛 杖 , 可 也 . 嚴 飭 都 司 令 , 毋 得 阻 搪 .雖 率 下 司 令 , 恐 喝 村 民 , 阻 搪 入 門 者 , 隨 現 重 罪 都 司 令 , 可 也 .⇒ 七 事 考 「 聽 訟 」1. 民 所 志 , 勿 拘 時 卽 呈 . 雖 寢 睡 食 時 , 隨 來 隨 題 , 書 付 官 門 . 必 令 狀 者 , 躬 親 呈 之 , 勿 令 自 外 阻 搪 .다음으로 목민고의 조목 1개를 나누어 2개의 조목으로 만든 경우도 있다. 牧 民 攷 「 聽 訟 」7. 爲 宰 者 , 埋 頭 牒 訴 , 卽 是 末 務 . 精 神 有 限 , 而 汨 沒 於 此 役 , 則 日 亦 不 足 , 何 事 可 做 . 若 以 民 訴 中 ,應 有 之 事 , 推 類 思 之 , 預 講 數 十 条 條 套 語 例 題 , 使 三 四 刑 房 , 就 民 訴 分 類 , 隨 類 隨 題 , 而 題 下 , 必 書 告課 刑 吏 姓 名 , 以 防 幻 弄 , 則 可 以 不 煩 精 力 , 日 掃 萬 牒 .⇒ 七 事 考 9-6. 爲 守 宰 者 , 埋 頭 汨 沒 於 牒 訴 , 卽 是 末 務 , 精 神 有 限 , 日 亦 不 足 矣 .⇒ 七 事 考 9-7. 若 以 民 訴 中 , 應 有 之 事 , 推 類 思 之 , 預 講 數 十 条 套 語 例 題 , 使 三 四 刑 房 , 就 民 訴 , 分 類 逐 題 ,而 題 下 , 必 書 考 課 刑 吏 姓 名 , 以 防 弄 奸 之 弊 , 則 可 以 不 煩 精 神 , 而 日 掃 萬 牒 矣 .마지막으로 칠사고가 완고( 完 稿 )가 아님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가 있는데, 같은 내용이 앞뒤에19) “1-8”에서 1은 條 目 의 차례, 8은 細 目 의 차례를 표시한 것이다. 이하 동일함.- 32 -


<strong>연암</strong> <strong>박지원의</strong> 牧 民 書 , 七 事 考 13서 중복되어 나오는 경우이다. 이는 박지원이 앞서 초록한 내용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자료를 뽑았음을 의미하는데, 다음이 이에 해당한다. 이하에서 진하게 표시한 글자는 같은 내용을두 번 초록하면서 글자가 달라진 부분이다. 七 事 考 「 姦 猾 息 」11. 近 世 , 某 人 爲 楊 根 郡 守 , 境 多 盜 賊 . 常 於 民 人 往 來 時 , 密 問 其 里 , 有 可 疑 人 , 私 自 記 之 . 糶 糴 賦役 , 人 民 聚 會 時 , 必 招 錄 中 人 , 嚴 謗 之 , 盜 賊 斂 迹 . 七 事 考 「 聽 訟 」19. 近 世 , 某 人 爲 楊 根 郡 守 , 境 多 盜 賊 . 常 民 人 往 來 時 , 密 問 其 里 之 可 疑 人 , 私 自 記 之 . 糶 糴 賦 役 ,人 民 多 會 時 , 必 招 其 人 , 嚴 飭 之 , 盜 賊 斂 迹 . 七 事 考 「 姦 猾 息 」10. 北 周 , 韓 褒 爲 雍 州 刺 史 , 多 有 盜 賊 . 褒 密 訪 之 , 並 豪 右 所 爲 也 . 而 陽 不 知 , 厚 禮 遇 , 謂 曰 , ‘ 刺 史 ,起 自 書 生 , 安 知 督 盜 所 賴 . 卿 等 共 分 其 憂 耳 .’ 乃 悉 召 鄕 里 桀 黠 , 爲 鄕 里 患 者 , 置 爲 主 帥 , 公 其 地 界 , 有盜 發 而 不 獲 者 , 以 故 縱 論 . 於 是 , 諸 被 置 者 , 莫 不 惶 怖 , 皆 首 伏 曰 , ‘ 前 盜 殺 者 , 並 某 等 爲 之 .’ 所 有 徒侶 , 皆 列 其 姓 名 , 或 亡 名 隱 匿 者 , 亦 悉 言 其 所 在 . 褒 乃 取 盜 名 簿 , 藏 之 , 因 大 榜 州 門 曰 , ‘ 自 知 行 盜 , 可急 來 首 , 卽 除 其 罪 . 盡 今 月 , 不 首 者 , 戮 身 籍 沒 , 以 賞 前 首 者 .’ 旬 月 間 , 諸 盜 , 咸 悉 首 告 . 褒 取 名 簿 ,勘 之 無 差 . 並 原 之 , 許 以 自 新 . 由 是 , 羣 盜 屛 息 .[ 北 史 ] 七 事 考 「 聽 訟 」20. 北 周 , 韓 褒 爲 雍 州 刺 史 , 州 多 盜 賊 . 褒 密 訪 之 , 並 豪 右 所 爲 也 . 而 陽 不 知 , 厚 加 禮 遇 , 謂 曰 , ‘ 刺 史 ,起 自 書 生 , 安 知 督 盜 所 賴 . 卿 等 共 分 其 憂 耳 .’ 乃 悉 召 鄕 里 桀 黠 , 爲 鄕 里 患 者 , 置 爲 主 帥 , 公 其 地 界 , 有盜 發 而 不 獲 者 , 以 故 縱 論 . 於 是 , 諸 被 置 者 , 莫 不 惶 懼 , 皆 首 伏 曰 , ‘ 前 盜 殺 者 , 並 某 等 爲 之 .’ 所 有 徒侶 , 皆 列 其 姓 , 或 無 名 隱 匿 者 , 亦 悉 言 其 所 在 . 褒 乃 取 盜 簿 , 藏 之 , 因 大 榜 州 門 曰 , ‘ 自 知 行 盜 者 , 可 急來 自 首 , 卽 除 其 罪 . 盡 今 月 , 不 首 者 , 戮 身 籍 沒 , 以 賞 前 首 告 者 .’ 旬 月 間 , 諸 盜 , 咸 相 首 實 . 褒 取 名 簿 ,勘 之 無 差 . 並 原 其 罪 , 許 以 自 新 . 由 是 , 羣 盜 屛 息 .[ 北 史 ]이상의 사례들을 보면 칠사고는 목민고를 비롯한 여러 서적에서 자료를 초록한 상태이며, 완성된 저작으로 가는 중간 단계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Ⅳ. 칠사고 내용의 특징칠사고의 내용을 검토하기에 앞서 이를 <strong>박지원의</strong> 저작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 33 -


14東 洋 學자. 칠사고가 여러 서적에서 자료를 뽑아 편집한 수준이라면 <strong>박지원의</strong> 저작으로 보기가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필자는 칠사고를 <strong>박지원의</strong> 저작으로 간주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같다.먼저 박지원은 면양잡록에 수록된 글의 성격을 “ 著 ”와 “ 編 輯 ”으로 구분했는데, 연상우필( 烟 湘偶 筆 )은 “ 著 ”, 과농소초와 칠사고는 “ 編 輯 ”에 해당한다. 이는 박지원이 과농소초와 칠사고의 성격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정약용의 경학 연구서를 보면 “ 著 ” “ 述 ” “ 編 ” “ 編 次 ”“ 輯 ”과 같은 표현이 나타나는데, 20) 박지원이나 정약용의 저작 중에는 “ 編 次 ” “ 編 輯 ”으로 표현되는저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1) 또 조선시대의 저작이 자료를 초출( 抄 出 )하여 편집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점을 감안한다면, 칠사고는 <strong>박지원의</strong> 저작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다음으로 박지원이 칠사고를 편집하면서 자신의 의지와 경험을 반영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조선후기의 목민서는 대부분 저자가 분명하지 않은데, 그 작성 시기를 추정할 때 “ 昇 平 百 年 , 民 不 知兵 , 久 矣 .”라는 구절을 주목한다. ‘전쟁이 끝난 지 100년’이라는 언급에서 작성 시기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22) 박지원은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 “ 昇 平 數 百 年 , 民 不 知 兵 , 久 矣 .”로 바꾸어 자신의 시대에 맞추었다. 또한 목민고에서는 지방관이 평소 익혀야 할 책으로 수교집록( 受 敎 輯 錄 ) 결송류취( 決 訟 類 聚 ) 무원록( 無 寃 錄 ) 종덕편( 種 德 編 ) 의옥집( 疑 獄 集 )을 거론했는데, 박지원을 여기에1786년(정조 9)에 편찬된 대전통편( 大 典 通 編 )을 추가하여 역시 자신의 시대를 맞추었다. 23)박지원이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한 경우도 있다. 자신의 경험을 직접 언급한 경우인데, 지방의 토호( 土 豪 )들이 면임( 面 任 )과 결탁하여 환곡을 받아먹고 도망자로 처리해 버리는 폐단을 언급하면서 안의현감 시절의 경험을 소개한 것이다. 24) 조선후기의 목민서는 편지글, 집안 가훈, 자신의 목민 경험,다른 목민서를 편집하는 등 자유로운 방식으로 기록한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다. 25)이러한 이유 때문에 필자는 칠사고가 <strong>박지원의</strong> 저작이며, 그 본문에는 <strong>박지원의</strong> 의사가 반영된것으로 본다.칠사고의 내용에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면, 첫 번째로는 사대부 출신의 수령을 위한 지침서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박지원은 마음을 보존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군자[ 存 心 愛 物 之 君 子 ]가 수령이 되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국가의 근본을 바르게 하고 백성을 돌보는 국왕을 돕는 행위로 파악했다.20) 金 文 植 , 朝 鮮 後 期 經 學 思 想 硏 究 - 正 祖 와 京 畿 學 人 을 중심으로, 一 潮 閣 , 1996, 184~191쪽.21) 東 京 大 學 河 合 文 庫 에는 정약용이 기존의 목민서를 수집하여 정리한 것으로 알려진 從 政 要 覽 이 있는데, 여기에는“ 洌 水 丁 若 鏞 編 ”으로 기록되어 있다(노경희, 「일본 소재 丁 若 鏞 필사본의 소장 현황과 書 誌 的 특징」 茶 山 學 9,2006, 200~201쪽).22) 內 藤 吉 之 助 , 앞의 논문, 16쪽.23) 주 26) 참조.24) 七 事 考 「 統 捧 法 」.“1-8. 鄕 品 土 豪 作 夫 時 , 養 戶 虛 戶 , 皆 以 奴 名 立 戶 . 結 還 , 則 渠 自 受 食 , 及 其 捧 上 之 時 , 潛 囑 面 任 稱 逃 亡 , 不 爲 備 納 , 在 在皆 然 . 雖 以 安 義 土 豪 之 養 戶 , 言 之 , 或 以 金 夫 得 立 戶 , 或 以 李 突 伊 立 戶 , 或 以 徐 德 立 戶 . 夫 得 者 , 穉 松 也 . 突 伊 者 , 石 也 . 徐德 者 , 大 坪 也 .”25) 김선경, 앞의 논문, 2010, 178쪽.- 34 -


16東 洋 學부 출신으로서 양반과 소민 사이의 상하 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을 중시했다.두 번째 특징은 각종 공문서를 철저히 관리하고 재화의 이동은 업무상 관련자들이 공동 관리하게했다. 수령이 되어 부임하면 관할 지역을 총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읍도( 邑 圖 )와 읍지( 邑 誌 )가 필요했다. 박지원은 수령이 관아에서 근무할 때 면·촌·리의 배치와 관아로부터의 거리가 기록된 읍도를 벽 위에 붙여놓고 보라고 했고, 31) 현직 서리나 퇴직한 서리 가운데 유식한 사람들을 만나 현지의 상황을 파악하되 그때까지 해결되지 못한 폐단이나 소송까지도 파악하게 했다. 32) 관할 지역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이었다.다음으로 박지원은 문서의 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공동으로 관리하게 했다. 먼저 호적을 작성할 때에는 각 면에 있는 통기( 統 記 )와 장적( 帳 籍 )을 미리 거둬들인 다음 풍헌( 風 憲 )이 각 리( 里 )의 대표자를 데리고 와서 경작 상황을 기록하게 하고, 그 내용을 서원( 書 員 )이 가진 깃기( 衿 記 ) 및 거둬들인통기와 일일이 대조하는 방법을 썼다. 이렇게 호적이 작성된 이후에는 민( 民 )이 관부에 올 때마다 사실을 기록하게 하여 해당 내용을 확인하고, 매월 말일에 각 리( 里 )·통( 統 )의 경작 상황을 풍헌으로부터 보고받아 호적의 기록을 관리하게 했다. 33)대동미와 환곡의 관리는 복수의 문서를 작성하고 공동으로 관리하게 했다. 그는 도록치부책( 都 錄置 簿 冊 )과 별도로 방하치부책( 放 下 置 簿 冊 )과 환곡분급치부책( 還 穀 分 給 置 簿 冊 )을 작성하여 항상 수령의곁에 두며, 색리( 色 吏 )와 유향소의 공형( 公 兄 ), 해당 읍에서 함께 회계하고 서명하게 했다. 34) 또한 환곡을 내어줄 때에는 도록책과 분급책을 별도로 만들어 유향소의 공형이 함께 출납하고, 각 통에서환곡의 분배를 요청하는 원수성책( 願 數 成 冊 )을 만들면 이를 호적 및 통기와 대조한 후 1건은 담당색리가 가지고, 1건은 수령의 책상에 두며, 장건기( 長 件 記 , 統 에서 巡 별로 내어야 할 곡식의 숫자를且 令 洞 契 之 人 , 皆 設 書 齋 , 擇 定 訓 長 , 日 課 敎 督 . 每 月 朔 , 輪 選 二 三 人 , 共 詣 鄕 校 , 同 行 焚 香 . 禮 畢 設 講 , 課 其 所 讀 , 講 論 義理 , 以 行 勸 獎 . 才 不 足 者 , 不 必 嚴 辭 譴 責 , 誠 心 誘 掖 , 而 作 成 之 責 , 專 爲 訓 長 .”31) 위의 책, 「 坐 衙 」.“3. 作 邑 圖 , 各 面 村 里 , 遠 近 四 隣 , 官 里 數 , 付 諸 壁 上 恒 見 處 , 可 也 .”32) 박지원이 기록한 항목에는 幅 員 ( 面 村 의 수, 사방도로의 거리), 田 結 ( 實 摠 , 雜 頉 ), 民 戶 ( 兩 班 , 常 人 ), 各 色 軍 摠 ( 番 軍 ,正 軍 , 保 人 , 牙 兵 , 束 伍 ), 錢 穀 , 費 用 支 放 , 倉 庫 , 還 上 , 吏 奴 , 獄 囚 , 進 上 物 種 件 , 俸 祿 斛 , 關 防 所 ( 津 梁 , 險 厄 , 烽臺 ), 場 市 , 學 宮 ( 書 院 , 講 堂 ), 神 壇 ( 社 稷 , 厲 壇 , 城 隍 , 祈 禱 處 ), 寺 刹 ( 僧 居 , 應 稅 ), 譯 院 , 酒 幕 , 四 方 의 接 境 , 民 習 ( 四 民恒 業 ), 土 宜 ( 畓 穀 , 田 穀 , 桑 麻 , 楮 紙 綿 布 , 海 錯 , 果 實 ) 등이 있었다. 다만 官 況 의 厚 薄 이나 官 用 의 多 少 에 대해서는절대로 묻지 말라고 했다( 七 事 考 , 「 時 措 」. “6. 一 一 詳 問 於 吏 輩 及 退 吏 之 有 識 者 , 可 也 . 至 於 官 況 厚 薄 , 官 用 多 少 , 不開 口 問 之 .”).33) 七 事 考 「 時 照 」.“41. 如 欲 申 明 籍 法 , 各 面 所 在 統 記 及 民 間 帳 籍 , 沒 數 收 入 . 卽 令 風 憲 , 招 其 各 里 頭 頭 人 等 , 從 實 書 之 耕 作 多 少 , 則 自 有 書 員衿 記 , 可 以 考 驗 , 而 亦 有 爲 人 並 作 者 , 戶 雖 富 貴 , 而 當 無 衿 記 . 此 則 嚴 飭 面 任 , 如 有 一 毫 欺 隱 , 各 別 重 繩 , 少 勿 饒 貸 . 籍 畢後 , 委 之 各 面 書 員 , 與 本 統 記 考 準 , 統 記 所 錄 者 不 入 , 則 亦 論 罪 . 考 準 後 , 原 統 記 及 民 籍 , 一 一 還 給 . 而 考 準 時 , 該 吏 當 於 面前 爲 之 , 以 防 奸 僞 . 42. 籍 法 旣 成 後 , 民 入 官 府 時 , 或 乘 暇 , 而 其 生 理 豐 薄 , 田 畓 幾 卜 , 眷 屬 多 少 , 潛 自 記 之 , 可 以 驗 其 眞 僞矣 . 46. 每 朔 末 , 各 里 保 正 收 聚 , 各 統 內 生 産 物 故 , 告 於 風 憲 , 風 憲 , 轉 報 于 官 . 流 民 欲 爲 居 接 者 , 及 移 來 者 , 自 某 邑 移 來 ,具 由 牒 報 , 備 書 續 籍 .”34) 위의 책, 「 儲 置 米 [ 還 穀 附 ]」.“3. 官 廳 大 同 及 還 上 , 各 樣 公 庫 公 物 , 必 爲 都 錄 置 簿 冊 , 又 爲 放 下 置 簿 冊 , 還 穀 分 給 置 簿 冊 , 常 置 座 榜 , 此 等 重 大 文 書 , 不可 只 付 該 掌 色 吏 而 已 , 必 使 鄕 所 公 兄 與 該 邑 , 眼 同 會 計 , 同 爲 列 名 着 署 然 後 , 始 可 成 貼 踏 印 也 .”- 36 -


<strong>연암</strong> <strong>박지원의</strong> 牧 民 書 , 七 事 考 17기록한 문서)를 만들어 통수( 統 首 )에게 나눠주도록 했다. 35) 이는 담당자들이 문서를 공동으로 확인하거나 동일한 문서를 나눠가지는 방식이었다.소송에 관한 문서는 통인( 通 引 )이 관리하게 했다. 박지원은 수령으로 부임하면 5~6권의 공책을 만들고, 통인에게 접수된 소지( 所 志 )의 내용을 윤기( 倫 紀 ), 전정( 田 政 ), 군정( 軍 政 ), 환곡, 관속작폐( 官 屬作 弊 ) 등으로 분류하여 관아에서 내준 제사( 題 辭 ), 원고와 피고의 이름을 기록하게 했다. 수령은 처리 날짜가 지났는데 조치가 이뤄지지 않는 사안을 확인하여 따로 기록한 뒤 전령( 傳 令 )에게 그 정황을 파악하게 하며, 사건이 처리된 후에는 반드시 공책에 표시하여[ 爻 周 ], 통인들의 농간을 방지하도록 했다. 36) 이는 수령이 수많은 사건을 직접 처리하지는 못하지만, 문서 기록을 관리함으로써 면임과 통인의 농간을 예방하려는 방안이었다.세 번째 특징은 환곡과 군정의 운영을 향촌의 기본 단위인 통리를 기준으로 했다는 점이다. 박지원은 대동미나 환곡 같은 전곡( 錢 穀 )의 운영은 국가 경영 뿐 아니라 수령의 신상에도 영향을 미치는사안이므로 그 운영에 신중을 기하라고 했다. 37) 그는 환곡을 분배하거나 거둘 때에는 반드시 통을단위로 하도록 했는데, 38) 그가 주장하는 통의 규모는 10호( 戶 ) 정도가 되는 촌락을 기반으로 했다.이는 리나 면을 통으로 하면 그 규모가 너무 커서 구성원들이 실상을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보았기때문이다. 39) 통이 구성되면 중인이나 상한 중에서 농사에 힘쓰고 통솔력이 있는 사람[ 有 氣 力 農 率 統 內者 ] 1인을 선발하여 통수( 統 首 )로 임명하고, 통수는 통의 호적과 환곡 원수성책의 작성을 주도한다.또한 통수는 통민을 인솔하여 창고로 가서 환곡을 직접 받고, 환곡을 납부할 때는 통 단위로 거둬서관아에 납부하게 했다. 40) 환곡의 운영 단위를 통으로 하고 운영은 통수와 관아를 직결시킴으로서,면임이나 감색( 監 色 )들의 중간 개입과 농간을 차단시키는 방법이었다.35) 위의 글.“4. 還 穀 , 以 統 分 給 , 以 統 捧 上 , 則 可 防 假 名 虛 戶 冒 受 之 弊 . 亦 作 都 錄 冊 , 分 給 冊 , 使 鄕 所 公 兄 , 眼 同 出 納 , 考 籌 成 貼 , 一 如大 同 儲 置 之 制 , 可 免 虛 踈 之 患 .”윗책, 「 分 統 法 」.“1. 各 統 願 受 成 冊 , 與 戶 籍 統 紀 査 準 之 後 , 一 件 書 , 付 該 色 . 一 件 書 , 置 案 上 . 又 作 長 件 記 , 書 給 各 其 統 首 .”36) 위의 책, 「 聽 訟 」.“9. 到 任 初 , 必 造 空 冊 五 六 卷 , 每 番 通 引 中 , 擇 其 識 字 者 數 三 人 , 每 日 所 志 中 , 關 係 倫 紀 · 田 政 · 軍 政 · 還 穀 及 官 屬 作 弊 等事 , 分 類 移 謄 錄 其 題 辭 , 而 某 事 某 事 下 , 亦 爲 詳 懸 某 里 居 住 原 告 元 隻 之 姓 名 . 計 其 日 子 , 若 過 捉 來 推 卞 之 限 , 而 終 無 皂 白 ,則 抄 出 後 錄 , 傳 令 査 問 於 各 該 面 任 , 收 賂 私 和 與 否 , 强 弱 不 敵 . 或 本 事 虛 謊 , 或 出 於 嘗 試 官 長 之 計 , 嚴 査 痛 治 . 旣 治 之 後 ,各 其 名 下 , 卽 爲 爻 周 , 以 防 通 引 弄 奸 之 弊 .”37) 위의 책, 「 儲 置 米 [ 還 穀 附 ]」.“1. 典 守 錢 穀 , 何 莫 非 緊 重 , 而 至 於 大 同 儲 置 米 , 卽 國 家 正 供 之 截 留 者 也 . 還 上 各 穀 , 乃 軍 國 兵 荒 之 所 需 也 . 大 有 關 於 身 名 ,大 則 禁 錮 徒 配 , 小 則 種 種 牢 狴 . 或 有 能 吏 手 滑 , 郍 移 反 作 , 而 陷 身 贓 汚 , 遺 毒 一 邑 者 , 固 無 足 言 . 或 有 措 大 迃 闊 , 不 知 錢 穀去 來 , 不 察 文 簿 首 尾 , 往 往 爲 奸 鄕 猾 吏 之 所 欺 弄 , 不 問 不 覩 之 中 , 身 已 入 於 反 作 虛 錄 之 科 , 誠 可 閔 也 .”38) 위의 글.“4. 還 穀 , 以 統 分 給 , 以 統 捧 上 , 則 可 防 假 名 虛 戶 冒 受 之 弊 .”39) 統 의 규모는 촌락에 7~10 戶 정도가 있으면 그대로 1 統 을 만들지만, 규모가 큰 촌락이면 統 을 나누고, 규모가 작은山 村 이면 부근의 다른 戶 와 합쳐서 統 을 만들도록 했다( 七 事 考 「 統 還 法 」. “1. 矯 捄 之 策 , 附 近 作 統 , 而 作 統 之 法 ,若 以 一 里 作 統 , 一 面 作 統 , 則 人 民 輩 耳 目 , 亦 有 所 未 及 . 故 必 以 一 村 落 屋 籬 相 接 之 戶 爲 一 統 , 或 十 家 九 家 七 八 家 , 不 妨 隨 所在 , 作 爲 一 統 . 或 三 四 十 戶 大 村 , 則 家 坐 第 次 , 分 作 三 四 統 . …… 山 村 三 四 戶 , 入 於 附 近 作 統 ”).40) 七 事 考 「 統 還 法 」;「 分 統 法 」;「 統 捧 法 」.- 37 -


18東 洋 學군정의 운영은 리를 단위로 하고 이임( 里 任 )이 담당하게 했는데, 족징( 隣 徵 )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박지원은 군정의 다섯 가지 폐단을 거론하며 첫 번째로 인징을 꼽았는데, 그 폐단이 1인이 10인의 군포를 담당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41) 그는 본리( 本 里 )에 도망자가 생기면 본리에서 15세이상의 한정( 閑 丁 )으로 충당하고, 본리에 한정이 없으면 가장 가까운 리( 里 ), 여기에도 없으면 부근의리에서 한정을 선발하도록 했다. 42) 이는 면임이 본리의 사정을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문제를 빨리 해결할 수 있고, 설령 본리에서는 속여도 그 부담을 대신하는 이웃 리에서 감시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43) 박지원은 리를 정할 때 호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장적( 帳 籍 )과 비교한다면, 누호( 漏 戶 )가 저절로 드러나고 장적도 엄격하게 관리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44)네 번째 특징은 농사에서 수리( 水 利 )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서양의 수차( 水 車 ) 제도를 도입하자고한 것이다. 박지원은 태서( 泰 西 )의 수차 제도는 간편하면서도 사용하기 쉬우므로, 재주가 띄어난 장인( 匠 人 )에게 그 제도를 강구하여 제작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1612년에 북경에서 간행된 우르시스( 熊 三 拔 , P. Sabbathinus de Ursis‚ 1575~1620)의 태서수법( 泰 西 水 法 )을 거론하며 여기에 수록된 5종의수차법( 水 車 法 : 龍 尾 車 , 玉 衡 車 , 恒 升 車 , 雙 車 , 水 車 )은 농가의 보기( 寶 器 )라 평가했고, 조선에서는 덕산( 德 山 )의 이철환( 李 嚞 煥 )이 용미차( 龍 尾 車 )를 처음 만들었고, 안산( 安 山 )의 이조환( 李 祖 煥 )이 그 방법을계승했다고 언급했다. 45) 박지원은 과농소초 「수리( 水 利 )」편에서 서광계( 徐 光 啓 )의 농정전서( 農 政 全書 )에 수록된 태서수법의 수차들을 소개하고, 수리를 일으키려면 방백과 수령에 적임자를 뽑아 오랫동안 이 일을 맡겨야 한다고 했다. 46) 이는 칠사고와 동일한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41) 위의 책, 「 軍 政 」.“1. 軍 政 有 五 弊 . 物 故 逃 亡 之 代 , 使 其 一 族 切 隣 , 密 封 定 納 , 一 也 . 物 故 立 案 之 不 卽 成 出 , 二 也 . 逃 亡 者 , 無 十 年 公 文 , 則 不得 代 定 , 三 也 . 奸 吏 之 僞 死 僞 逃 , 難 以 覈 實 , 四 也 . 官 吏 面 任 之 操 縱 需 色 , 難 以 遍 察 , 五 也 .”“1-1. 隣 族 望 納 之 弊 , …… 遂 至 一 人 納 十 人 之 布 , 富 戶 實 民 , 無 不 殘 敗 .”42) 위의 글.“1-2. 每 本 里 有 逃 故 , 則 卽 使 下 有 司 , 率 現 里 中 年 十 五 以 上 閑 丁 , 捧 疤 充 定 . 而 本 里 中 , 閑 丁 或 優 , 則 一 從 年 次 率 現 , 定 爲恒 式 , 永 絶 推 諉 之 弊 .”“1-3. 本 里 中 , 閑 丁 或 無 , 則 就 其 最 傍 近 里 責 出 , 一 如 本 里 之 法 . 如 又 全 無 , 則 又 次 及 傍 近 里 . 而 但 統 有 元 定 第 次 , 而 里 則無 之 , 四 面 附 近 , 必 相 推 諉 , 莫 如 預 將 面 內 各 里 , 定 爲 第 次 一 二 三 四 五 如 統 規 . 又 將 此 面 之 初 , 接 於 彼 面 之 終 , 循 環 連 綴 ,俾 得 按 此 而 相 及 .”43) 위의 글.“1-4. 里 中 閑 丁 , 里 任 輩 , 常 時 洞 知 之 矣 . 不 待 推 捉 搜 覓 , 而 聞 令 卽 可 率 現 矣 . 一 從 年 次 , 則 先 後 素 定 , 絶 其 猜 怨 , 豪 右 息望 , 不 復 圖 免 矣 . 設 令 , 本 里 欺 隱 , 次 及 傍 里 , 則 必 相 猜 疾 發 告 矣 .”44) 위의 글.“1-14. 近 來 , 法 網 解 弛 , 漏 籍 者 多 . 常 時 , 則 有 難 一 一 摘 發 , 而 若 於 里 定 之 時 , 計 其 家 坐 第 次 , 男 丁 名 數 , 而 憑 準 帳 籍 , 則漏 戶 自 露 , 而 帳 籍 之 法 , 亦 不 敢 嚴 而 自 嚴 矣 .”45) 위의 책, 「 時 措 」.“35. 課 農 , 莫 如 興 水 利 , 興 水 利 , 莫 如 水 車 , 水 車 之 制 , 莫 善 於 泰 西 . 其 法 , 簡 而 易 行 , 當 得 巧 匠 , 講 究 而 行 之 . 萬 曆 間 ,泰 西 人 熊 三 拔 , 撰 水 車 五 法 . 一 曰 龍 尾 車 , 引 江 河 之 水 , 小 則 慨 田 , 大 則 灌 城 . 二 曰 玉 衡 車 , 引 井 泉 之 水 . 三 曰 恒 升 車 . 四 曰雙 車 , 與 恒 升 · 玉 衡 同 , 而 其 用 尤 速 . 五 曰 水 車 , 雖 高 峯 山 城 , 積 水 如 積 穀 . 旣 爲 之 說 , 又 爲 之 圖 , 名 其 圖 與 書 曰 ‘ 泰 西 水法 ’. 其 用 , 至 簡 而 易 行 , 誠 農 家 之 寶 器 也 . 近 有 德 山 士 人 李 嚞 煥 , 始 制 龍 尾 車 , 安 山 李 祖 煥 , 傳 其 法 云 .”46) 課 農 小 抄 「 水 利 」.“ 盖 勸 農 而 興 水 利 , 乃 牧 養 斯 民 之 首 務 . …… 當 於 藩 臬 守 令 之 中 , 愼 擇 其 人 , 使 之 殫 心 講 究 而 久 任 , 以 責 其 成 , 隨 之 以 慶 讓殿 最 之 法 , 則 利 興 而 民 不 煩 矣 .”- 38 -


<strong>연암</strong> <strong>박지원의</strong> 牧 民 書 , 七 事 考 19Ⅴ. 맺음말<strong>박지원의</strong> 둘째 아들인 박종채는 ‘부친이 평소 경제에 관심을 두어 균전( 均 田 ), 사창( 社 倉 ), 상평( 常平 ), 이갑( 里 甲 ) 등의 제도에 대한 강구한 정론( 定 論 )을 분류 정리해 두었는데, 만년에 이를 하나의책으로 완성하려 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47) 이를 보면 박지원은 당대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세가의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1799년 봄에 박지원은 정조의 명에 따라 과농소초를 작성해 올리면서 제일 끝에 「한민명전의」라는 글을 첨부했다. 농정을 일으키려면 농민들의 토지 소유가 균등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제한된면적을 초과하는 토지를 가점( 加 占 )하지 못하게 하자는 제안이었다. 학계에서는 이를 ‘<strong>박지원의</strong> 한전론( 限 田 論 )’으로 이해한다. 48) 박지원은 「한민명전의」에서 면천군의 현황에 대해 매우 자세한 수치를제시했는데, 면천에 부임한지 2년이 된 수령으로서 관할 지역의 폭원( 幅 員 ), 호구, 전결( 旱 田 , 水 田 )현황과 생산량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49) 여기에 칠사고를 더하여 보면, 면천군수 박지원은목민관으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농서인 과농소초와 목민서인 칠사고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고 하겠다.연민문고의 면양잡록은 면천군수 <strong>박지원의</strong>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는 그가 면천군수 시절에 직접 작성한 글이나 다양한 서적들 50) 을 읽으면서 초록한 글이있는데, 특히 과농소초, 칠사고, 「열녀함양박씨전」은 초고를 볼 수가 있다.칠사고는 편집의 중간 단계, 즉 여러 서적에서 목민과 관련이 있는 조목을 뽑아 정리하는 단계에 있었으므로, 완전한 저작으로서 갖추어야 할 요소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면양잡록에 있는과농소초의 초고와 박영철본의 과농소초를 기준으로 판단할 때, 칠사고가 완전한 저작이 되려면 서문과 목차가 추가되고, 본문의 체계화가 이뤄지며, 항목 별로 자신의 견해를 밝힌 ‘ 按 ’이 추가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런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칠사고는 문장가이자 농학가로 알려진 박지원에게 목민관이란 또 다른 측면이 있었음을 주목하게 하는 자료이다. 박지원은 늦은 나이에 벼슬길을 시작하여 고위직으로 진출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지만, 자기의 관할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오랫동안 축적해 온 실용적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47) 過 庭 錄 권4.“ 先 君 平 居 , 留 心 經 濟 , 如 均 田 · 社 倉 · 常 平 · 里 甲 · 選 擧 · 考 績 · 軍 制 · 海 防 , 皆 有 講 究 定 論 , 部 分 條 列 , 幾 成 腹 稿 , 而 未及 屬 筆 . 晩 年 , 亟 欲 解 官 閒 居 , 成 就 一 部 書 , 而 未 及 焉 . 芝 溪 公 ( 李 在 誠 ) 祭 文 有 云 , ‘ 歸 歟 之 志 , 火 急 著 書 ’ 者 , 謂 此 也 . 嗚 呼惜 哉 .”48) 宋 贊 植 , 「 朴 趾 源 의 「 燕 巖 集 」」, 實 學 硏 究 入 門 , 一 朝 閣 , 1973, 180쪽.49) 課 農 小 抄 「 限 民 名 田 議 」.“ 臣 之 得 罪 本 郡 , 已 經 二 秋 , 間 値 一 豊 一 歉 . 雖 美 能 逐 田 踏 量 , 隨 土 相 宜 . 然 其 耕 穫 之 功 , 食 實 之 數 , 亦 有 所 領 略 矣 .”50) 박지원은 安 義 縣 監 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500~600권의 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過 庭 錄 권2, “ 先 君 作 宰 也 , 隨 身往 來 , 書 冊 五 六 百 卷 , 及 筆 硯 一 具 , 香 鼎 茶 鎗 . 車 後 駄 載 , 輒 爲 四 五 馬 匹 .”).- 39 -


20東 洋 學필자는 이번에 소개하는 칠사고가 ‘면천군수 <strong>박지원의</strong> 실용적 지식이 반영된 18세기 말의 목민서’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牧 民 攷 沔 陽 雜 錄 燕 巖 集 , 朴 榮 喆 本 .김윤조 역주, 역주과정록, 태학사, 1997.金 文 植 , 朝 鮮 後 期 經 學 思 想 硏 究 ― 正 祖 와 京 畿 學 人 을 중심으로, 一 潮 閣 , 1996.김문식, 「단국대 소장 연민문고 필사본의 자료적 가치」, 東 洋 學 43, 2008, 159~181쪽.金 善 卿 , 「 朝 鮮 民 政 資 料 叢 書 해제」, 朝 鮮 民 政 資 料 叢 書 , 驪 江 出 版 社 , 1986, 1~5쪽.김선경, 「조선후기 목민학의 계보와 목민심서」, 朝 鮮 時 代 史 學 報 52, 2010, 157~196쪽.金 榮 鎭 , 「 朴 趾 源 의 필사본 小 集 들과 작품 창작년 고증」, 大 東 漢 文 學 제23집, 2005, 47~82쪽.김용흠, 「18세기 ‘ 牧 民 書 ’와 지방통치」, 조선의 목민학 전통과 목민심서, 실학박물관 2010년 특별전 기념 학술대회 발표문, 2010, 41~71쪽.內 藤 吉 之 助 , 「 牧 民 篇 解 說 」 朝 鮮 民 政 資 料 牧 民 編 , 1942(영인본, 以 文 社 , 1977), 11~51쪽.노경희, 「일본 소재 丁 若 鏞 필사본의 소장 현황과 書 誌 的 특징」, 茶 山 學 9, 2006, 177~216쪽.宋 贊 植 , 「 朴 趾 源 의 「 燕 巖 集 」」, 實 學 硏 究 入 門 , 一 朝 閣 , 1973, 177~181쪽.* 이 논문은 2010년 6월 25일에 투고되어,2010년 7월 1일에 편집위원회에서 심사위원을 선정하고,2010년 7월 15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2010년 7월 19일에 편집위원회에서 게재가 결정되었음.- 40 -


<strong>연암</strong> <strong>박지원의</strong> 牧 民 書 , 七 事 考 21❙Abstract❙Yeon-am Bak Ji-won’s Book of Local Administration, Chilsago51)Kim, Moonsik*Myeonyangjapnok is the book which gathered the poetry and prose written by Bak Ji-won whenhe was the county chief of Myeoncheon. Now the Book is the collection of Yeonmin-mungoDankook University. I guess the book was made between May 1799 and August 1800. Currently, thebook remains 6 volumes only, but it was edited by Bak Ji-won himself.There is two types of Chilsago within Myeonyangjapnok. The one written in a cursive hand isBak’s own handwriting and the other written in the printed style is re-handwritten book by hisfollower. Chilsago is composed of 29 items, 190 clauses, 114 details. Bak edited the book byexcerpting the data from several books of local administration, particularly from Mokmingo.The main features of Chilsago’s contents are as follows.1. Bak Ji-won edited the book for the local government officials from the men of high birth.2. Bak wanted the local government officials should take charge of the official documents andshould supervise local government office’s money and properties jointly.3. He insisted imposing taxes was based on the Tong and Ri, the smallest unit of the country.4. He stressed the need of utilization of water and insisted to introduce the western water wheeltechnology.Chilsago wasn’t a perfect book but a book on the course of editing. To became a perfect book,he should add a preface and a table of contents and should systemize the text more. And he shouldtell what he thought on the book.Chilsago is very important book, because we can know Bak Ji-won was not only a popular poetand agriculturist but also a capable official of local administration from the book. I think Chilsago isthe book of local administration in the last-half of 18th century which contains the practicalknowledge of the county chief of Myeoncheon Bak Ji-won’s.[Key Words] Bak Ji-won, Myeonyangjapnok, Chilsago, book of local administration, the county chief ofMyeoncheon* Professor, Dankook University- 41 -

Hooray! Your file is uploaded and ready to be published.

Saved successfully!

Ooh no, something went w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