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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아집첩(漢衕雅集帖)과 오세창의 시회활동(詩會活動)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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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 洋 學 第 48 輯 (2010 年 8 月 ) 檀 國 大 學 校 東 洋 學 硏 究 所<strong>한동아집첩</strong>( 漢 衕 雅 集 帖 )<strong>과</strong> <strong>오세창의</strong><strong>시회활동</strong>( 詩 會 活 動 ) <strong>연구</strong>55)김 예 진*❙국문초록❙<strong>한동아집첩</strong>은 오세창·김돈희·이도영·고희동 등의 서화가, 시인인 이기, 승려인 박한영, 역사학자인 최남선 등 7명이 시회를 갖고 이를 기념하여 남긴 시회첩이다. 이들은 동인의 집을 돌아가면서 시회를 가졌으며, 시회가 열릴 때마다 이를 기념하여 시회첩<strong>과</strong> 시회도권 등의 시서화 작품 등을 함께 남겼다.이 시회의 결성<strong>과</strong>정<strong>과</strong> 활동내용, 그리고 작품의 제작<strong>과</strong>정 등은 <strong>오세창의</strong> 시고인 경고실음고에 전하고있어 일제강점기 시회의 일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strong>한동아집첩</strong><strong>과</strong> 경고실음고의 기록, 그리고 시회에서 제작된 서화작품들을 살펴보면, 오세창이 활동하였던 시회의 성격은 19세기말 여항시사의 계승, 방고적인 시회 문화, 은일지사를 표방하는 동인들의태도 등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오세창을 비롯한 동인들 대부분이 기술직 중인집안 출신으로서이들의 시회 활동은 육교시사의 전통<strong>과</strong> 방고적인 시회문화를 따르고 있으며,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에서도 지조를 잃지 않는 은일지사의 풍류를 추구하였다. 오세창·최남선·고희동 등은 근대문명을 섭렵한 신지식층이면서도 고전<strong>과</strong> 민족문화의 <strong>연구</strong>에 몰두하였으며, 시회는 이들이 전통<strong>과</strong> 고전의 가능성을모색하고 탐구하는 공간이 되었다.[주제어] 오세창, 최남선, 박한영, 고희동, <strong>한동아집첩</strong>, 경고실음고, 시회첩, 육교시사❙목Ⅰ. 머리말Ⅱ. 한동아집의 결성<strong>과</strong> <strong>한동아집첩</strong>의 제작차❙Ⅲ. <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strong>과</strong> 그 성격Ⅳ. 맺음말* 고려대학교 박물관 학예<strong>연구</strong>사 / heesoo25@gmail.com- 105 -


<strong>한동아집첩</strong>( 漢 衕 雅 集 帖 )<strong>과</strong> <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 詩 會 活 動 ) <strong>연구</strong>3부( 中 部 )에서 다섯 번째 모임을 개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한동아집이다. 4) 그리고 이 시회에 모인동인들이 시서화로 함께 꾸민 시회첩이 <strong>한동아집첩</strong>이다. 이에 대하여 오세창은 “정월 15일 눈 오는 날에 나는 난타 이기·석전 박한영·성당 김돈희·관재 이도영·춘곡 고희동·육당 최남선을 나의 집에 초대하였다. 이전의 모임을 이어서 한동원소집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어서, 오세창이 대보름날 한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 동인들을 초대하여 시회를 열고 이를 한동원소집이라 한것을 알 수 있다. 5) <strong>오세창의</strong> 한동아집에 참석한 동인은 <strong>과</strong> 같다. 한동아집 동인 명단 7명이름 호 생몰년 활동 분야이기( 李 琦 ) 난타( 蘭 坨 ) 1856~1935 한학자오세창( 吳 世 昌 ) 위창( 葦 滄 ) 1864~1953 서화가·언론가박한영( 朴 漢 永 )석전( 石 顚 )법명:정호( 鼎 鎬 )1870~1948 승려김돈희( 金 敦 熙 ) 성당( 惺 堂 ) 1871~1937 서화가이도영( 李 道 榮 )관재( 貫 齋 )벽허자( 碧 虛 子 )1884~1933 서화가고희동( 高 羲 東 ) 춘곡( 春 谷 ) 1886~1965 서화가최남선( 崔 南 善 ) 육당( 六 堂 ) 1890~1967 문학가·사학자동인들의 구성을 보면 황현( 黃 玹 , 1855~1910)·김택영( 金 澤 榮 , 1850~1927)<strong>과</strong> 함께 구한말 3대 시인으로 불리는 이기부터, 김돈희·이도영·고희동 등의 서화가, 그리고 사학자인 최남선<strong>과</strong> 승려인 박한영 등 나이·지위·활동 등이 제각기 다르다. 이들이 시회를 결성하고 수차례 모임을 지속할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오세창을 중심으로 이들의 교유관계와 1920년대 중반 무렵의 활동양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한동아집을 주관한 오세창은 대대로 역관을 배출한 중인집안 출신으로, 부친 역매( 亦 梅 ) 오경석( 吳慶 錫 , 1831~1879)은 구한말의 대표적인 개화지식인이었다. 오세창은 의관 출신의 개화사상가인 대치( 大 致 ) 유홍기( 劉 鴻 基 , 1831~?)를 가숙( 家 塾 )으로 모시고 학문을 익혔으며, 가업을 이어 16세인 1879년 역<strong>과</strong>에 합격하여 1880년부터 관직을 시작하였다. 부친 오경석<strong>과</strong> 스승인 유홍기를 통해 일찌감치개화사상<strong>과</strong> 문물에 눈을 뜬 오세창은 1886년에 박문국 주사로 임명되어 한성순보 발간에 참여하였4) 박한영, 「한동아집서」, <strong>한동아집첩</strong>, 1925, “ 一 自 漢 鼎 覆 餗 以 後 , 漢 上 藝 苑 , 極 至 荒 廢 , 所 謂 渢 渢 風 雅 不 可 復 見 , 亦 爲 齎志 者 , 咄 咄 深 嘆 久 矣 …… 然 漢 衕 雅 集 , 不 自 雅 集 起 因 , 實 自 客 歲 小 春 之 北 苑 , 初 集 焉 耳 , 且 初 集 之 起 , 已 提 苑 南 二 集 之 首 ,簡 固 不 足 重 言 , 而 歲 將 暮 , 爲 東 園 三 集 , 又 今 年 頭 , 爲 西 園 四 集 , 及 此 上 元 , 爲 五 集 於 中 府 漢 衕 …….”5) 오세창, 경고실음고, 1924~1925, “ 正 月 十 五 日 雪 中 , 余 招 蘭 陀 石 顚 惺 堂 貫 齋 春 谷 六 堂 于 敞 廬 , 續 前 會 , 是 曰 漢 衕 元 宵 集 .”- 107 -


4東 洋 學으며, 독립협회가 결성되자 간사원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일심회에가담하였다가 1902년 일본으로 망명하여 천도교에 입도하였다. 귀국 후에는 천도교가 발행한 만세보의 사장이 되었으며, 1907년 윤효정( 尹 孝 定 , 1858~1939)·권동진( 權 東 鎭 , 1861~1947) 등<strong>과</strong> 대한협회를 설립하여 한일합방 때까지 대한협회를 이끌었다. 6) 그러나, 1919년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가하여 옥고를 치른 후에는 서화와 전각 등 예술활동에 전념하였다.<strong>오세창의</strong> 서화활동은 1911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서화교육기관인 경성미술원 서화미술회에 회원으로 참여하는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7) 오세창은 1918년 5월 19일 일본인 화가들의 협회 조직<strong>과</strong>전람회 등의 활동에 자극을 받은 서화가들이 서화협회를 조직하자 안중식( 安 中 植 , 1861~1919)·조석진( 趙 錫 晉 , 1853~1920)·이도영·김돈희·고희동 등<strong>과</strong>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8) 서화협회 전람회에 왕성하게 작품을 출품하면서 전서( 篆 書 ) <strong>연구</strong>에 몰두하여 자신만의 서체( 書 體 )를 이 시기에 형성하였다. 오세창은 서화단체의 결성<strong>과</strong> 서화교육기관의 설립 등에 활발히 참여하면서 서화가들<strong>과</strong> 교유하였고, 특히, 안중식<strong>과</strong>는 3·1운동 다음날까지도 안중식의 사숙( 私 塾 )인 경묵당( 耕 墨 堂 )에 나와 어울릴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9) 따라서, 안중식의 경묵당을 드나들던 문하생 고희동·이도영이나 서예가 김돈희·안종원 등<strong>과</strong>도 친목이 두터웠으리라 생각된다.김돈희와 이도영은 안중식<strong>과</strong> 조석진이 잇달아 타계한 뒤 각각 서화협회 4대·5대 회장을 맡으며화단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서화가들이었다. 이도영은 명문가 출신이지만 안중식 문하에 입문하여 그림을 배웠고, 안중식을 통해 오세창을 소개받은 후 국민교육회·대한자강회·대한협회 등의 애국계몽단체에서 활동하며 교<strong>과</strong>서 삽화와 소설 삽화 등을 제작하였다. 이도영은 오세창이 사장으로 있던대한민보에 우리나라 최초로 시사만평을 그릴 정도로 애국계몽기의 출판운동에서 서화가로서 중요한 역할을 선도하였던 인물이었다. 10) 또한 안중식<strong>과</strong> 더불어 서화 교육가로서 후진양성에 참여하였으며, 안중식이 타계한 뒤인 1920년대부터는 화단의 원로로 부상하였다. 11)안중식·조석진 등<strong>과</strong> 더불어 이도영이 교수로 있었던 서화미술회는 젊은 서화가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면서 한편으로는 서화를 애호하는 지식인·정치가·실업가 등이 서화가들<strong>과</strong> 어울려 시회와화평회( 畵 評 會 )를 갖는 사랑방 역할도 하였는데, 서화미술회를 출입하는 인사들 중에는 당시 한창 정치활동을 하던 오세창<strong>과</strong> 동경유학생 고희동도 있었다. 12) 고희동은 동경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서양화가였지만 일본유학 중에도 방학에는 오세창·이도영 등의 서화가들<strong>과</strong> 어울렸으며, 안중식<strong>과</strong> 조석진6) <strong>오세창의</strong> 정치활동에 대해서는 김경택, 「중인층의 개화활동<strong>과</strong> 친일개화론」, 역사비평 23, 역사문제<strong>연구</strong>소, 1993,255~258쪽.7) 이승연, 위창 오세창, 이회문화사, 2000, 135~136쪽.8) 최열, 한국근대미술의 역사, 열화당, 1998, 107쪽.9) 김은호, 書 畵 百 年 , 중앙일보사, 1981, 91쪽.10) 이도영의 인쇄미술에 대해서는 현영이, 「 貫 齋 李 道 榮 의 생애와 인쇄미술」,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2004 참조.11) ‘ 李 道 榮 氏 長 逝 ; 畵 壇 의 巨 擘 三 十 년 동안 미술 진흥에 노력’, 동아일보 1933년 9월 23일자; ‘조선 화단의 거인이도영 화백 長 逝 , 21일 夜 자택에서’, 조선중앙일보, 1933년 9월 23일자.12) 김은호, 앞의 책, 47~48쪽, 58~59쪽.- 108 -


<strong>한동아집첩</strong>( 漢 衕 雅 集 帖 )<strong>과</strong> <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 詩 會 活 動 ) <strong>연구</strong>5타계 후 이도영<strong>과</strong> 함께 서화협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한동아집에 참여했던 동인 가운데 주목되는 인물은 오세창<strong>과</strong> 함께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였던 최남선이다. 최남선은 우리나라 근대적 종합잡지의 효시를 이루는 소년(1908~1910)·붉은저고리(1913)·아이들보이(1913)·새별(1913)·청춘(1914~1918)을 발간하는 등 근대문화의 소개와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역사학·민속학·문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1910년대 최남선이 이끈 조선광문회와 신문관은 국수보존운동( 國 粹 保 存 運 動 )의 중심이 되었으며 당시 신지식인들의 출입이 빈번했던 곳이다. 특히, 고서수집 및 간행을 위해 설립된 조선광문회는 민족운동가들<strong>과</strong> 문화운동가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였던 곳으로서, 오세창·고희동·박한영 등은이곳을 출입하면서 한학자들<strong>과</strong> 교류하였다. 이도영 역시 조선광문회의 고문으로 있었던 부친 이인승( 李 寅 承 )<strong>과</strong> 삽화 제작<strong>과</strong> 관련하여 이곳을 드나들었던 다수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광문회 출입인사들<strong>과</strong> 교류하였으리라 여겨진다. 13)최남선은 3·1운동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출옥한 후에는 낙산 중턱에 있는 일람각( 一 覽閣 )에서 <strong>연구</strong>에 몰두하는 한편 장안의 시객들을 불러 모아 일주일에 두세 번씩 시회를 열었다. 14) 최남선은 금강산·지리산·백두산 등의 국토를 순례하고 기행문을 서술하면서 민족<strong>과</strong> 민족문화를 탐구하였고, 「불함문화론( 不 咸 文 化 論 )」(1925)을 비롯한 단군론을 발표하면서 고대사를 <strong>연구</strong>하였다. 1920년대 조선학을 주도하였던 최남선의 역사<strong>연구</strong>와 국토순례는 민족의 자아(조선/조선인)를 찾고 이를 통해 민족문화를 부흥시키고자하는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한자문화권에서 조선이 갖는 독자적인 문화적 위치를 찾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15) 최남선은 오세창·이도영 등의 전통 서화가 및 한학자들<strong>과</strong> 공통된 관심사를 형성하였을 것이다.최남선의 국토순례 동반자였던 박한영은 일제의 한국불교 장악에 맞서 민족불교의 정통성을 지키는 데 앞장서며 개혁적 성향의 불교유신운동을 광범위하게 펼쳤던 근대 불교계의 고승으로서, 이기·오세창·김돈희·이도영·변영만·고희동·정인보·최남선 등 당대의 학계·언론계·문화예술계지식인들<strong>과</strong> 폭넓게 교유하였고 시문( 詩 文 )에도 조예가 깊었다. 16) 천도교도였던 오세창 역시 집안의영향으로 불교에 깊이 심취해 있었으며 박한영<strong>과</strong>는 “늘상 침식을 같이 할 지경”으로 가까운 사이였다. 17) 박한영은 1922년 5월 불교청년운동의 주축인 중앙학림의 학장직에서 물러난 뒤 1926년 7월 서13) 오영섭, 「 朝 鮮 光 文 會 硏 究 」, 韓 國 史 學 史 學 報 3, 한국사학사학회, 2001, 83~85쪽, 124~130쪽; 1933년 6월 이도영의타계 직전에 결성된 ‘이도영화회( 李 道 榮 畵 會 )’의 발기인 명단에는 서화가들 외에도 신문관 출입인사들이었던 송진우·현상윤·김성수 등도 보여서 이도영<strong>과</strong> 문화계몽운동 인사들<strong>과</strong>의 교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현영이, 앞의 논문, 38~41쪽.14) ‘ 學 界 의 重 鎭 六 堂 崔 南 善 氏 : 駱 山 一 覽 閣 에서 讀 書 昹 詩 로 消 日 , 時 代 日 報 로 죽을 쑨 륙당, 지금은 고유종교를 <strong>연구</strong>’,동아일보, 1925년 8월 10일자.15) 류시현, 최남선 <strong>연구</strong>, 역사비평사, 2009, 150~156쪽.16) 성락훈, 「 華 嚴 宗 主 映 湖 堂 大 宗 師 浮 屠 碑 銘 幷 序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 편, 「석전 정호 스님의 생애와 행적」, 석전 정호스님 행장<strong>과</strong> 자료집, 2009, 104쪽에서 재인용).17) 이동국, 「 葦 滄 의 學 藝 淵 源 <strong>과</strong> 書 畵 史 硏 究 」, 葦 滄 吳 世 昌 : 亦 梅 · 葦 滄 兩 世 의 學 問 <strong>과</strong> 藝 術 世 界 , 예술의 전당,1996, 225쪽.- 109 -


<strong>한동아집첩</strong>( 漢 衕 雅 集 帖 )<strong>과</strong> <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 詩 會 活 動 ) <strong>연구</strong>7오세창이 근역서화징에서 최남선에 의해 1929년 계명구락부에서 출판되었던 것을 비롯하여, 23)이도영이 1920년대 초부터 고대사를 주제로 한 역사고사화와 신라와 가야 토기를 모티프로 한 기명절지화 등을 발표하고, 서양화가였던 고희동이 1920년대 중반 무렵부터 한국화가로 전향하였던 것은이들이 당시 고조되었던 문화주의의 경향을 수용한 결<strong>과</strong>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일제의 문화통치가더욱 공고화된 1920년대 이후 문예계 인사들은 새로운 활동방향을 모색하고 있었고, 마침 오세창이1924년 10월 환갑을 맞이한 것을 계기로 시회결성을 도모하게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2. <strong>한동아집첩</strong>의 구성<strong>과</strong> 내용<strong>한동아집첩</strong>은 크기는 세로 18.0cm·가로 12.0cm이며 8절14면의 지본절첩( 紙 本 折 帖 )으로 되어 있다. 비단으로싸인 표지에는 안종원이 전서( 篆 書 )로 쓴 제첨이 붙어 있으며내지에는 와 같이 동인들의 시서화가 있다. 첩을 펼치면 앞부분에 김돈희·이기·고희동·이도영의 서화작품이 차례로 실려 있으며, 뒤이어 박한영이 쓴 「한동아집서( 漢 衕 雅集 敍 )」와 동인들의 시가 각각 자필로 수록되어 있다. 이기부터 최남선까지 <strong>오세창의</strong> 집에 초대된 동인 6명이 나이 순서대로 자신이 지은 칠언율시를 직접 썼으며, 마지막으로 시회의 주최자인 오세창이 시를 남겼다. 오세창 외, <strong>한동아집첩</strong>,1925년, 국립중앙도서관 <strong>한동아집첩</strong>의 구성차례 작가 작품 비고표지 석정 안종원 < 漢 衕 雅 集 帖 石 丁 簽 > 제첨내지 1면 성당 김돈희 < 漢 衕 元 宵 集 > 예서2면 난타 이기 < 可 人 如 玉 步 屧 尋 幽 > 행서3면 춘곡 고희동 < 花 卉 圖 > 지본담채4면 벽허자 이도영 < 簫 來 天 霜 琴 生 海 波 > 전서5면( 右 面 ) 성당 김돈희 < 達 摩 圖 > 지본담채5면( 左 面 )~6면 석전 박한영 < 漢 衕 雅 集 敍 >선양하여 신문화를 건설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지원, 「일제하 민족문화 인식의 전개와 민족문화운동 ― 민족주의 계열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173쪽.23) 홍선표, 한국 근대미술사, 시공사, 2009, 183쪽.- 111 -


8東 洋 學차례 작가 작품 비고7면 난타 이기 칠언율시8면 석전 박한영 칠언율시9면 성당 김돈희 칠언율시10면 벽허자 이도영 칠언율시11면 춘곡 고희동 칠언율시12면 육당 최남선 칠언율시13면 위창 오세창 칠언율시제첨을 쓴 안종원( 安 鍾 元 , 1877~1951)은 서예가이자 교육가로서 안중식의 8촌 동생이다. 안종원은당시 서화가들<strong>과</strong> 서화애호가들의 사랑방이었던 안중식의 경묵당<strong>과</strong> 서화미술회에 자주 드나들었으며,안중식의 사후에는 장사동에 있는 자신의 사랑채에 ‘경묵당’이라는 같은 당호( 堂 號 )를 붙이고 화가들을머무르게 하면서 크고 작은 아회( 雅 會 )를 베풀었다. 24) 안종원은 한동아집의 동인은 아니지만 1925년 2월<strong>과</strong> 3월 사이 네 차례에 걸쳐 오세창<strong>과</strong> 함께 시모임에 참여하였고, 25) 오세창은 <strong>한동아집첩</strong>이 완성된 이후 동인들<strong>과</strong> 왕래가 잦았던 서예가 안종원에게 제첨을 요구하여 표제를 꾸민 것으로 보인다. 김돈희, 이기, 내지를 펼치면 대보름 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김돈희가 쓴 제자 ‘한동원소집( 漢 衕 元 宵 集 )’이 예서로 쓰여 있다. 김돈희는 전서·예서·해서·행초서의 각체를 두루 잘 썼고 세련된 선<strong>과</strong> 획의변화로 작품전체를 부드러우면서도 기백있는 강한 필치를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김돈희는 예서와24) 안종원의 경묵당은 서화협회 사무실을 겸하였을 정도로 서화가들의 친목 및 교류 활동에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였다. 김예진, 「경묵당<strong>과</strong> 근대 서화가들의 활동」, 근대 서화의 요람, 耕 墨 堂 , 고려대학교박물관, 2009, 10~15쪽.25) Ⅲ장의 참조.- 112 -


<strong>한동아집첩</strong>( 漢 衕 雅 集 帖 )<strong>과</strong> <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 詩 會 活 動 ) <strong>연구</strong>9해서에 특히 뛰어났으며, 예서에서는 한예( 漢 隸 )를 깊이 <strong>연구</strong>하여 자유분방하고 변화가 많은 예서 서풍을 이룩하였다. 26) 김돈희의 예서는 분방한 필세로 우견( 右 肩 )이 위로 올라가는 결구상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27) 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볼 수 있다. 글자 획수의 다수에 따라 ‘ 元 ’자와같이 굵고 힘 있는 필선으로 중량감 있게 쓰기도 하고, ‘ 雧 ’자와 같이 갈필의 가벼운 필세를 사용하는 등 김돈희 특유의 변화를 보인다.2면에 이기가 행서로 쓴 글씨 ‘가인여옥 보섭심유( 可 人 如 玉 步 屧 尋 幽 )’는 중국 당말( 唐 末 )의 시인사공도( 司 空 圖 , 837~908)의 시론( 詩 論 ) 이십사시품( 二 十 四 詩 品 ) 가운데 제16 ‘청기( 清 奇 )’의 한 구절이다. 28) 이십사시품은 시의 의경( 意 境 )을 24품으로 나누고 각 품을 2언의 운어( 韻 語 ) 12구로구성하여 모두 288구로 쓴 장문의 시로서 18세기 후반 전당시가 조선에 유입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여 신위·김정희 등 19세기 문인들 사이에서 감상되었다. 29) ‘청기’는 작품의 깨끗한 소재와 남다르게 기이한 분위기를 의미하며, 그 가운데 ‘가인여옥 보섭심유( 可 人 如 玉 步 屧 尋 幽 )’는 진세( 塵 世 )를벗어나 벗을 찾아 나서는 선비의 고결하고 청아한 아취를 나타낸다. 30) 고희동, 이도영, 이기의 시 구절에 이어 고희동이 담채( 淡 彩 )로 그린 그림은 수선화·매화·구기자를 한 폭에 그린소폭의 화훼도이다. 이른 봄을 알리는 수선화와 매화, 그리고 장수를 상징하는 구기자는 일제강점기라는 혹한을 이겨내는 동인들의 아취고절( 雅 趣 高 節 )을 기리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그26) 김돈희의 서풍에 대해서는 김윤경, 「 惺 堂 金 敦 熙 의 書 藝 硏 究 」, 원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30~31쪽.27) 김양동, 「한국근대서예의 전개와 양상」, 한국서예일백년, 예술의 전당, 1988, 308쪽.28) 사공도, “ 娟 娟 群 松 下 有 漪 流 晴 雪 滿 汀 隔 溪 漁 舟 可 人 如 玉 步 屧 尋 幽 載 瞻 載 止 空 碧 悠 悠 神 出 古 異 澹 不 可 收 如 月 之曙 如 氣 之 秋 ”; 최근 학계에는 이십사시품이 명대 회열( 懷 悅 )의 이십사품에 근거해 위조하고 당대 사공도의 이름을 의탁한 위작이라는 설도 있다. 민유삼, 「사공도 이십사시품 위작 논쟁 추이」, 中 語 中 文 學 27, 한국중어중문학회, 2001 참조.29) 금지아, 「이십사시품이 조선후기 문예이론사에서 차지하는 자리」, 중국어문학 52, 영남중국어문학회, 2008,163~165쪽.30) 사공도는 14세기 고려 말에 수용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백거이( 白 居 易 , 772~846)와 함께 은거를 상징하는 인물로 언급되기도 했다. 금지아, 앞의 논문, 162쪽.- 113 -


10東 洋 學려진 것이다. “한매( 寒 梅 )·녹균( 綠 筠 )·창포( 菖 蒲 )·수선( 水 仙 ) 등이 서로 어울려 가지가 얽혀있고 그밖에 정헌( 庭 軒 )의 진기한 여러 물건이 있으니, 하나라도 장엄한 시해( 詩 海 )가 아님이 없었다.”라고한 박한영의 서문에서 보듯 고희동은 <strong>오세창의</strong> 서가에 있는 매화와 수선화 등에서 소재를 취하여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고희동은 화면의 우측 하단에 얽혀 있는 화훼를 통해 동인들 간의 조화와친목을 우의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수선화와 매화 꽃, 그리고 구기자 열매에 화사한 채색을 가하여곧 다가올 봄의 정취를 청신하게 표현하였다.이도영은 전서( 篆 書 ) 를 남겼다.. ‘소래천상 금생해파’는 성령설( 性 靈 設 )을 주장하였던 청대( 淸 代 ) 시인 원매( 袁 枚 , 1716~1797)의 수원시화( 隨 園 詩 話 )에나오는 구절로서 원매의 성령설은 18세기 후반 박지원( 朴 趾 源 , 1737~1805)<strong>과</strong> 그의 문하생인 이덕무( 李 德 懋 , 1741~1793)·박제가( 朴 齊 家 , 1750~1805) 등에 의해 조선에 소개되었고, 19세기에는 김정희를거쳐 최성환( 崔 瑆 煥 )·조희룡( 趙 熙 龍 , 1789~1866) 등의 여항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도영의전서는 이기의 행서와 더불어 19세기 여항문인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던 청조문예의 잔영을 보여주는작품이라고 하겠다. 31) 이도영은 부친 이인승<strong>과</strong> 스승 안중식의 영향으로 한학 및 서예에도 일가견이있었으며 특히 행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32) 전서로 쓴 는 정제되고 연미한 이도영의 필세가 잘 드러난다. 시첩의 한쪽 면에 작은 크기로 그려진 김돈희의 는 소품이지만 유려하면서도 빠른 필선으로 그린 얼굴<strong>과</strong> 대담한 갈필로 그린 의습( 衣 褶 )이 대조를 이루며 달마의 강한인상을 잘 포착하였다. 또 의습에 담채( 淡 彩 )로 푸른색을 가하여 세속에 초탈한 달마의 이미지를 고조시키고 있다. 김돈희의 좌측에는 바로 이어 박한영의 가 있다. 박한영, 김돈희, 31) 원매의 성령설에 대해서는 具 敎 賢 , 「 袁 枚 의 性 靈 設 이 조선 후기 문단에 미친 영향 <strong>연구</strong>」, 중국어문한논집 59, 중국어문학<strong>연구</strong>회, 2009, 197~419쪽.32) 이도영의 부친 이인승은 조선광문회의 신자전( 新 字 典 ) 편찬에서 정확한 용례를 밝히기 위해 다양한 전적에서 추출한 전거들을 가지고 한자 어휘들을 검토하고 강구하는 역할을 맡을 정도로 한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오영섭, 앞의 논문, 79~85쪽.- 114 -


<strong>한동아집첩</strong>( 漢 衕 雅 集 帖 )<strong>과</strong> <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 詩 會 活 動 ) <strong>연구</strong>11한 번 국운이 기운 뒤로 서울의 예원이 지극히 황폐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른바 아름다운 풍아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고, 뜻을 품은 자들도 혀를 차며 깊은 한숨을 내쉰 지 오래되었다. 그러니 돌이켜보건대 이번 한동의 아집은 장차 풍아를 다시 있게 할 길광편우( 吉 光片 羽 ) 33) 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동의 아집은 말 그대로 아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실은 지난해 10월에 북원에서 처음으로 모임을 가졌다. 첫 모임이 일어나자 금새 두 번째 모임을 서둘러 당기게 되었으니 그 엉성함이야 더 이상 말할 게 없다. 그런데 한 해가 저물녘에 동원에서세 번째 모임을 가졌고, 또 금년 벽두에 서원에서 네 번째 모임을 가졌다. 급기야 이번 정월보름에 중부의 한동에서 다섯 번째 모임을 갖게 되었으니, 다섯 번째 모임은 그런대로 규모를갖춰 문란하지 않은 것 같다. 다섯 차례의 모임이 점점 나아갈수록 성대해져 실로 한강물이 넓고 멀리 굽이도는 기세를 갖추게 되었다.모임을 같이하는 사람들로 말할 것 같으면 나이·위상·취미·조예 등이 혹 같지 않고, 세상에 들어가거나 속세를 벗어나는 행업도 모두들 다르다. 그러나 이치에 닿는 말로 감개하게하고 흉금을 크게 열어젖혀 호산연하( 湖 山 煙 霞 )의 사이에서 서로 팔을 끼고 정신으로 교유하여모두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닌데 우연히 의기투합하는 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아집의 좋은 약속에 꼭 참석하려 하면서도 나중에 혹 호사에 얽혀 바빠서 시를 읊조리며 한바탕 웃을 겨를이없는 지경에 이를까 걱정하는 일도 있다. 오늘 밤은 정월 대보름으로 달이 티 없이 밝고 문 앞엔 눈이 이미 한 자나 쌓였다. 다들 눈길에 빠지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혹 병든 몸을 이끌고 도롱이를 쓰고 혹 우산을 지고 나막신을 끌고서 일제히 나아오니, 마치 이문을 좇는자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드는 듯하였다. 위창 노인이 걸상을 내려 맞아들이는데 기상이 몹시 훌륭했다. 금석<strong>과</strong> 도서가 서가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을 보니 마치 이유산( 二 酉 山 )의 정경을 띠고 있는 듯 정신이 멍해졌다. 게다가 매화·대나무·창포·수선 등이 서로 어울려 가지가 얽혀있고 그밖에 정헌( 庭 軒 )의 진기한 여러 물건이 있으니, 하나라도 장엄한 시해( 詩 海 )가 아님이없었다. 차를 다 마시고 술이 거나해지자 나란히 연반( 硏 畔 )에 앉아 꽃이 한창 고운 때를 상상하며 그림 그리는 사람은 붓을 적시고 글씨 쓰는 사람은 한 번 팔뚝을 휘둘러보고 시를 짓는사람은 어깨를 곧추세우며 각자 솜씨를 발휘하니, 진실로 하나같이 조화의 오묘함을 드러내었다. 우두커니 앉아있는 돌중인 나는 전혀 재주가 없으니 그저 아집의 후서( 後 敍 )를 한 단락 지어 훗날에 부치는 바이다.을축년 정월 대보름 석전산민( 石 顚 山 民 )은 삼가 기록하다. 34)33) 길광( 吉 光 )은 짐승의 이름이다. 十 洲 記 에 “한무제( 漢 武 帝 ) 천한( 天 漢 ) 3년에 서국왕( 西 國 王 )의 길광의 모구( 毛 裘 )를바쳤는데 색이 황백으로 대개 신마( 神 馬 )의 류( 類 )이다. 그 모구가 물에 들어가서 여러 날이 되어도 가라앉지 아니하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후인들이 문인의 시장( 詩 章 )이 잔여( 殘 餘 )에서 겨우 발견된 것을 칭하여 길광편우라 하였다.34) 박한영, 「한동아집서」, <strong>한동아집첩</strong>, “ 一 自 漢 鼎 覆 餗 以 後 , 漢 上 藝 苑 , 極 至 荒 廢 , 所 謂 渢 渢 風 雅 不 可 復 見 , 亦 爲 齎 志 者 ,咄 咄 深 嘆 久 矣 , 顧 此 漢 衕 雅 集 , 將 無 出 風 雅 再 然 之 吉 光 與 , 然 漢 衕 雅 集 , 不 自 雅 集 起 因 , 實 自 客 歲 小 春 之 北 苑 , 初 集 焉 耳 ,且 初 集 之 起 , 已 提 苑 南 二 集 之 首 , 簡 固 不 足 重 言 , 而 歲 將 暮 , 爲 東 園 三 集 , 又 今 年 頭 , 爲 西 園 四 集 , 及 此 上 元 , 爲 五 集 於 中府 漢 衕 , 五 集 之 序 , 殆 若 準 擬 而 不 紊 , 五 集 之 漸 進 漸 盛 , 諒 有 江 漢 之 屈 曲 瀚 遠 勢 耳 , 若 夫 同 會 諸 子 , 其 年 位 趣 操 , 有 或 不 同 ,入 世 出 世 之 行 業 , 亦 不 遵 一 軌 , 然 及 其 理 遺 感 慨 , 開 蕩 心 胸 , 交 臂 神 游 於 湖 山 煙 霞 之 間 , 咸 有 不 謀 而 偶 協 焉 , 是 以 必 踐 雅 集之 佳 約 , 有 恐 後 至 綢 繆 好 事 , 亦 似 奔 走 不 暇 可 發 吟 吟 一 笑 已 , 是 宵 上 元 也 , 明 月 無 緣 , 門 前 雪 , 已 尺 深 , 諸 子 不 拘 雪 泥 , 或扶 病 披 簑 , 或 擔 簦 飛 屧 , 而 齊 進 如 趍 利 者 之 穣 穣 , 葦 滄 老 人 下 榻 而 引 入 , 氣 象 甚 喜 , 觀 夫 金 石 圖 書 , 籖 架 秩 秩 , 似 帶 二 酉- 115 -


12東 洋 學박한영은 국운이 기운 뒤로 서울의 문예가 황폐해진 것을 안타까워한 동인들이 이처럼 시회를 결성하게 되었으니, 한동아집으로 인해 문인들의 시장( 詩 章 )이 끊어지지 않고 후인들에게까지 아름다운풍아가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면서 아집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한동아집이 열린 이날 밤에는 동인들이 겨우내 쌓인 눈으로 험한 길을 무릅쓰고 한자리에 모였으며, <strong>오세창의</strong> 서가에 가득한 금석도서를 완상하고 차를 한잔씩 마신 뒤 거나하게 술자리를 벌이고흥취가 오르자, 각자 자신의 특장을 발휘하여 시서화를 남기고 박한영이 서문을 지었다. <strong>한동아집첩</strong>에는 모임의 주최자인 오세창<strong>과</strong> 학자인 최남선을 제외한 모든 동인들은 한자리에서 시서화를 남겼으며, 시를 수창( 酬 唱 )하는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제작된 서화들은 여기적( 餘 技 的 )이고 간일한 작풍을 보여준다. 35)서화에 뒤이은 시들은 “고적( 古 蹟 )으로 빛나는 집은 우하( 虞 夏 )가 아득”하고 속세의 때를 씻고 시서화로 무르익은 “고상한 회포를 어부와 나무꾼에게 기대지 않아도 되겠네.”라는 최남선의 시처럼,금석도서가 가득한 <strong>오세창의</strong> 서가를 칭송하고 모임의 고아한 청취를 읊고 있다.百 年 無 月 幾 元 宵莫 恨 同 雲 未 易 消已 見 人 間 成 玉 界何 須 物 外 步 虹 橋오래도록 달없는 대보름이 몇 번째인가먹구름이 사라지지 않음을 한스러워 마시게.이미 인간이 옥계를 이룬 것 보았으니굳이 물외에서 홍교를 건널 필요 있겠는가.竗 心 觀 壁 葦 滄 濶 신묘한 마음으로 벽을 바라보니 갈숲 강이 광활하고古 蹟 耀 堂 虞 夏 遥 고적으로 빛나는 집은 우하가 아득하네.浣 盡 塵 膓 猶 有 術 묵은 창자를 다 씻어내 오히려 재주가 생겨나니雅 懷 不 必 寄 漁 樵 고상한 회포를 어부와 나무꾼에게 기대지 않아도 되겠네. 36)벽에는 갈숲이 그려진 산수화가 걸려 있고 서가에는 고적이 가득한 <strong>오세창의</strong> 서실에서 동인들은금석도서 및 시서화를 감상하면서 선계( 仙 界 )의 아취( 雅 趣 )를 즐겼다. 오세창은 동인들의 풍류를 초부( 樵 夫 )와 어부( 漁 夫 )의 청담( 淸 談 )에 비유하였다. 세속을 멀리하여 자연에 묻혀 사는 은일지사( 隱 逸 之士 )에 대한 은유는 모든 동인들의 시에서 공통되게 나타나는 것으로 <strong>한동아집첩</strong>의 서화와 마찬가지로 도가적인 탈속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山 之 景 , 怳 矣 , 復 有 寒 梅 綠 筠 菖 蒲 水 仙 並 蒂 交 柯 外 , 他 庭 軒 之 珍 恠 諸 品 , 無 一 非 莊 嚴 詩 海 已 , 而 茶 罷 酒 闌 , 列 坐 硏 畔 , 想 華方 艶 , 畵 君 䑛 毫 , 書 君 試 腕 , 詩 君 聳 肩 , 各 逞 手 眼 , 允 同 化 工 之 妙 著 , 塊 坐 石 衲 , 殆 無 能 也 , 只 敍 一 端 如 右 , 雅 集 有 後 , 付在 來 日 矣 . 乙 丑 上 元 石 顚 山 民 謹 識 .”; 석문( 釋 文 )에 도움을 주신 유지복 선생님에게 감사드린다.35) 박한영의 석전문초에는 동인들이 박한영의 초대로 최남선의 일람각에서 시회를 갖고 차좌동림첩( 借 座 東 林 帖 )을만들면서 쓴 서문이 있는데, 경고실음고의 날짜와 박한영이 서문을 쓴 날짜가 일치하여 시회첩의 제작이 모임에서 함께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박한영, 「 借 座 東 林 酬 唱 序 」, 石 顚 文 鈔 , 法 寶 院 , 1962, 45~46쪽; 한동아집의동인들이 가진 시회들<strong>과</strong> 시화첩 제작에 대해서는 Ⅲ장에서 다시 논하겠다.36) 최남선, 「칠언율시」, <strong>한동아집첩</strong>.- 116 -


<strong>한동아집첩</strong>( 漢 衕 雅 集 帖 )<strong>과</strong> <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 詩 會 活 動 ) <strong>연구</strong>13龍 公 似 妒 月 明 宵行 雪 春 空 積 未 銷高 燭 難 紅 連 甍 屋萬 枝 垂 白 隔 磎 橋용공이 달 밝은 밤을 시기한 듯봄 하늘에 내린 눈은 녹지를 않네.높은 촛대 어지러운 불빛은 기와집마다 줄짓고만 가지에 내린 눈은 시내 다리에 이어있네.茶 廚 煙 纈 齋 猶 冷 차 달이는 부엌 연기에도 집은 아직 차가운데佛 海 香 深 漏 漸 遙 바다같은 불도는 향이 깊어 점점 멀리 스며드네.已 唱 □ 陽 何 所 憶 이미 □양을 노래했으니 어느 곳을 생각하리오綠 江 南 路 伴 漁 樵 푸른 강<strong>과</strong> 남쪽 길이 어초와 짝하는 곳이라네. 37)승려인 박한영은 눈 내리는 밤 차 향기가 퍼지는 가운데 넓고 깊은 불도( 佛 道 )가 어우러지는 모습을 노래하였다. 오세창·최남선 등 일제강점기 지식인들 사이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박한영의 서문 옆에 김돈희가 달마도를 그린 것처럼 한동아집에서는 시서화의 아취 가운데에 불도가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이처럼 5점의 서화와 7수의 시로 구성된 <strong>한동아집첩</strong>은 시회의 결성<strong>과</strong>정<strong>과</strong>모임의 정경, 그리고 참석한 동인들의 심상( 心 象 ) 등을 시서화를 통해 다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strong>오세창의</strong> 서실에 모인 동인들은 은일을 자처하면서 서화고동( 書 畵 古 董 )을 함께 완상하고 차와 술을 나누면서 암울한 시대현실의 시름을 잊고 청류( 淸 流 )를 노래했다. 그리고 오세창은 초대된 동인들에게서화를 요청하여 시회첩을 제작한 뒤 본인이 직접 소장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Ⅲ. <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strong>과</strong> 그 성격1. <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strong>과</strong> 경고실음고오세창은 여러 인사들<strong>과</strong> 활발한 <strong>시회활동</strong>을 가지면서 지은 자신의 시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한동아집<strong>과</strong> 관련하여 경고실음고( 竟 沽 室 吟 藁 )라는 시고( 詩 稿 )가 전하여 <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을 조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오세창가에 전하는 경고실음고는 1924년 음력 10월에 동인 7명이 고희동의 춘곡서실에서 가진 원북소집( 苑 北 小 集 )부터 1925년 3월 23일 탑동 승사에서 가진 6명의 모임까지총 25회의 시회가 기록되어 있다. ‘경고실( 竟 沽 室 )’은 <strong>오세창의</strong> 당호( 堂 號 ) 중의 하나였던 듯,<strong>오세창의</strong> 근역인수( 槿 域 印 藪 )에는 ‘경고주인( 竟 沽 主 人 )’<strong>과</strong> ‘경고실이( 竟 沽 室 鑈 )’라고 새겨진 주문방인이 전한다. 38)37) 박한영, 「칠언율시」, <strong>한동아집첩</strong>.38) 오세창, 槿 域 印 藪 , 國 會 圖 書 館 , 1968, 545쪽, 556쪽.- 117 -


14東 洋 學 오세창, 경고실음고, 1924~1925, 개인소장 ‘경고주인’, ‘경고실이’박한영은 「한동아집서」에 음력 10월에 첫 모임으로 북원초집이 열렸으며 뒤이어 원남이집·동원삼집·서원사집·한동오집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는데, <strong>오세창의</strong> 경고실음고에는 10월 30일의 원북소집을 비롯하여 남원속집( 南 苑 續 集 )·동원세모( 東 園 歲 暮 )·서원춘초( 西 園 春 初 )·한동원소집( 漢 衕 元 宵集 ) 등 이름을 조금 달리 기록하였으나 시기와 장소, 참석자 등이 서로 일치한다. 39) 이기 대신 윤희구가 참석한 서원사집(서원춘초)을 제외하면 이들 모임에 참석한 인물들은 한동아집의 동인<strong>과</strong> 일치하며, 그 밖의 모임에는 때에 따라 안종원·동주( 東 州 ) 심인섭( 沈 寅 燮 , 1875~1939)·성석( 醒 石 ) 이응균( 李 應 均 , 1883~?)·정재( 靜 齋 ) 오일영( 吳 一 英 , 1896~?)·묵재( 黙 齋 ) 최우성( 崔 愚 誠 ) 등이 참여하였다. 모임의 참가자들은 경고실음고의 총 25회의 모임 중 이 다섯 모임에만 시회명( 詩 會 名 )을붙였다. 첫 모임인 원북소집은 1924년 10월 30일 고희동이 이기·오세창·박한영·김돈희·이도영·고희동·최남선을 초대하여 술을 마시고 시서화를 즐기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2월 19일 이도영이 동인을 초대하여 남원속집을 가졌으며, 일주일 뒤인 12월 25일에는 최남선이 동인들을초대하여 동원세모, 이듬해 1월 8일에는 김돈희가 모임을 주관하여 서원춘초를 열었다. 그리고 1월11일<strong>과</strong> 13일 이종익의 집<strong>과</strong> <strong>오세창의</strong> 집에서 두 번의 모임을 연 뒤에 다시 1월 15일 <strong>오세창의</strong> 집에서 동인들이 모여 한동원소집을 가졌다.39) 박한영의 석전시초( 石 顚 詩 鈔 )에는 1924년 9월 5일<strong>과</strong> 11월 3일 사이에 기록한 오언율시 ‘ 北 苑 小 集 ’<strong>과</strong> 이듬해 겨울에 쓴 칠언율시 ‘ 仲 冬 龜 山 在 日 高 春 谷 來 訪 示 余 苑 北 詩 會 紀 念 諸 作 追 和 同 人 韵 郤 寄 ’가 실려 있는데, 첫모임인 북원소집의 모임장소가 고희동의 집이었으므로 그때의 작품을 고희동이 보관하고 있다가 이듬해 겨울 박한영에게 보여주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북원소집<strong>과</strong> 원북시회는 같은 모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석전시초에 실려있는 시 가운데 오언율시 ‘북원소집’<strong>과</strong> 칠언율시 ‘ 西 園 春 初 小 集 ( 金 惺 堂 家 乙 丑 正 月 初 八 日 )’, 그리고 3월 5일부터 최남선<strong>과</strong> 함께 지리산을 순례하며 지은 시들은 그 시기와 내용이 <strong>오세창의</strong> 경고실음고와 일치한다. 박한영, 석전시초 (한국역대문집총서 2881), 한국문집편찬위원회, 1999, 59쪽, 73쪽.- 118 -


<strong>한동아집첩</strong>( 漢 衕 雅 集 帖 )<strong>과</strong> <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 詩 會 活 動 ) <strong>연구</strong>15 경고실음고의 시회기록날짜 <strong>오세창의</strong> 기록 참가자 시회명·장소1 1924년10월 30일2 12월 19일3 12월 25일4 1925년1월 8일5 1월 11일6 1월 13일1924년 10월 30일 춘곡 고희동이 난타 이기·석전 박한영·성당 김돈희·관재 이도영·육당 최남선<strong>과</strong> 나를 초대하여술을 마시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이름하여 원북소집이라 하였다. ( 甲 子 十 月 三 十 日 高 春 谷 ( 羲 東 ) 招 李蘭 坨 ( 琦 ) 石 顚 上 人 ( 鼎 鎬 ) 金 惺 堂 ( 敦 熙 ) 李 貫 齋 ( 道 榮 ) 崔 六 堂 ( 南善 ) 及 余 治 樽 拈 韻 惑 畵 惑 書 名 曰 苑 北 小 集 …)12월 19일 이도영이 동인을 초대하여 배파회를 흉내내니,이를 남원속집이라 하였다. 박한영이 호상으로부터 새로 돌아왔다. ( 十 二 月 十 九 日 李 貫 齋 ( 道 榮 ) 招 同 人 擬 拜 坡 會 是 曰 南苑 續 集 時 石 顚 上 人 自 湖 上 新 歸 )12월 25일 최남선이 동인들을 초대하니 이를 동원세모라 하였다. ( 十 二 月 二 十 五 日 崔 六 堂 ( 南 善 ) 招 同 人 是 曰 東 園 歲 暮 )1925년 1월 8일 김돈희가 동인들을 초대하니 이를 서원춘초라 하였다. 이기는 병으로 인하여 오지 못하고 우당 윤희구가 와서 참가하였다. ( 乙 丑 正 月 八 日 金 惺 堂 ( 敦 熙 ) 招 同 人 是 曰西 園 春 初 李 蘭 坨 因 病 未 赴 尹 于 堂 ( 喜 求 ) 來 參 )정월 11일 석천 이종익 家 에서 楓 嶽 記 游 之 會 가 있었다. 나또한 초대되어 야란으로 시를 지었다. ( 正 月 十 一 日 李 石 泉( 鍾 翊 ) 家 有 楓 嶽 記 游 之 會 余 亦 披 招 夜 闌 拈 韻 )정월 13일 고희동<strong>과</strong> 최남선이 찾아와서 시를 지었다. 동주심인섭이 마침 왔다. ( 正 月 十 三 日 春 谷 六 堂 見 訪 拈 韻 沈 東 洲( 寅 燮 ) 適 至 )7 1월 15일정월 15일 눈오는 날에 나는 이기·박한영·김돈희·이도영·고희동·최남선을 집에 초대했다. 이전의 모임을 이어서 한동원소집이라 하였다. ( 正 月 十 五 日 雪 中 余 招 蘭 陀 石 顚惺 堂 貫 齋 春 谷 六 堂 于 敞 廬 , 續 前 會 是 曰 漢 衕 元 宵 集 )8 1월 17일 정월 17일 박한영·최남선이 함께 왔다. ( 正 月 十 七 石 顚 六 堂同 至 )9 1월 20일10 1월 22일11 1월 26일12 1월 29일정월 20일 박한영·고희동·최남선이 와서 시를 지었다.( 正 月 二 十 日 石 顚 春 谷 六 堂 又 訪 拈 韻 )정월 22일 이기가 박한영·김돈희·심인섭·이도영·최남선 및 나를 춘곡 고희동의 서옥에 초대하여 문진입실첩을만들었다. ( 正 月 二 十 二 日 李 蘭 陀 ( 琦 ) 招 石 顚 惺 堂 東 洲 貫 齋 六堂 及 余 于 高 春 谷 之 苑 北 書 屋 作 聞 晉 入 室 帖 )정월 26일 송석 김완규가 호중으로부터 서울에 왔다. 여러친구들<strong>과</strong> 함께 왔다. ( 正 月 二 十 六 日 金 松 石 ( 完 圭 ) 自 湖 中 入洛 , 與 數 朋 共 至 )정월 29일 박한영이 이기·김돈희·심인섭·이도영·고희동 및 나를 최남선의 일람각에 초대하여 차좌동림첩을 만들었다. ( 正 月 二 十 九 日 石 顚 上 人 招 蘭 陀 惺 堂 東 洲 貫 齋 春 谷 及 余于 崔 六 堂 之 一 覽 閣 成 借 座 東 林 帖 )이 기, 오세창,박한영, 김돈희,이도영, *고희동,최남선이 기, 오세창,박한영, 김돈희,*이도영, 고희동,최남선이 기, 오세창,박한영, 김돈희,이도영, 고희동,*최남선윤희구, 오세창,박한영, *김돈희,이도영, 고희동,최남선오세창, *이종익등…*오세창, 고희동,최남선, 심인섭이 기, *오세창,박한영, 김돈희,이도영, 고희동,최남선*오세창, 박한영,최남선,*오세창, 박한영,고희동, 최남선*이 기, 오세창,박한영, 김돈희,심인섭, 이도영,최남선*오세창, 김완규등이 기, 오세창,*박한영, 김돈희,이도영, 고희동,최남선1‘원북소집’고희동의 춘곡서실2‘남원속집’이도영의 관재서옥3‘동원세모’최남선의 일람각4‘서원춘초’김돈희의 집‘풍악기유지회’이종익의 집<strong>오세창의</strong> 집5‘ 漢 衕 元 宵 集 ’<strong>오세창의</strong> 집<strong>오세창의</strong> 집<strong>오세창의</strong> 집6≪ 聞 晉 入 室 帖 ≫춘곡서실<strong>오세창의</strong> 집7≪ 借 座 東 林 帖 ≫최남선의 일람각- 119 -


16東 洋 學13 2월 6일14 2월 7일15 2월16 2월 12일17 2월 13일날짜 <strong>오세창의</strong> 기록 참가자 시회명·장소2월 6일 심인섭이 동인을 초대하여 춘곡서실에서 모였다.( 二 月 六 日 東 洲 招 仝 人 集 春 谷 書 室 )2월 7일 박한영·이도영·고희동·최남선·안종원이 왔다.어린 조카(정재 오일영)가 함께 왔다. ( 二 月 七 日 ( 陽 三 月 一 日也 ) 石 顚 貫 齋 春 谷 六 堂 石 汀 至 英 姪 亦 來 )2월 □일 박한영·심인섭·이도영·고희동·최남선이 왔다. 황산 이종린은 늦게 도착했다. ( 二 月 □ 日 石 顚 東 洲 貫 齋春 谷 六 堂 至 凰 山 遲 到 )2월 12일 눈오는 날에 심인섭<strong>과</strong> 함께 관재서옥에 모였다. 박한영을 맞이하여 함께 시를 지었다. ( 二 月 十 二 日 雪 中 與 東 洲集 貫 齋 書 屋 邀 石 顚 共 賦 )2월 13일 이도영·고희동·박한영·최남선·심인섭·안종원 및 이응균이 왔다. 내일 있을 성 동쪽 일람각의 모임을의논했다. ( 二 月 十 三 日 貫 齋 春 谷 石 顚 六 堂 東 洲 石 汀 及 醒 石 至議 明 日 集 城 東 一 覽 閣 )18 2월 14일 2월 14일 모두 일람각에 모였다. 묵재 최우성도 왔다. ( 二 月十 四 日 仝 一 覽 閣 崔 黙 齋 愚 誠 亦 來 )19 2월 15일 2월 15일 심인섭을 보내고 부상에서 놀았다. ( 二 月 十 五 日 送東 洲 遊 扶 桑 )20 2월21 2월 22일22 3월 2일23 3월 8일24 3월 9일25 3월 23일2월 □일 박한영·이도영·고희동·최남선이 왔다. ( 二 月 □日 石 顚 貫 齋 春 谷 六 堂 至 )2월 22일 비오는 중에 박한영·고희동·최남선은 시를 지었다. 박한영<strong>과</strong> 최남선은 장차 두류산을 여행한다. ( 二 月 二 十二 日 雨 中 石 顚 春 谷 六 堂 來 賦 石 顚 六 堂 將 遊 頭 流 山 )3월 2일 박한영·이도영·고희동·최남선, 조카(오일영)가함께 시를 지었다. ( 三 月 二 日 石 顚 貫 齋 春 谷 六 堂 英 姪 共 賦 )3월 8일 이도영·고희동<strong>과</strong> 함께 풍로진 주루에서 함께 시를지었다. ( 三 月 八 日 共 貫 齋 春 谷 風 鷺 津 酒 樓 共 賦 )3월 9일 안종원·이도영·고희동<strong>과</strong> 함께 청량사에서 놀았다. ( 三 月 九 日 同 石 丁 貫 齋 春 谷 游 淸 涼 寺 )3월 23일 김돈희·안종원·이도영·이응균·고희동<strong>과</strong> 함께탑동 승사에 갔다. ( 三 月 二 十 三 日 同 惺 堂 石 丁 貫 齋 醒 石 春 谷往 塔 洞 僧 舍 )*심인섭, 이 기,오세창, 박한영,김돈희, 이도영,고희동, 최남선*오세창, 박한영,이도영, 고희동,최남선, 오일영*오세창, 박한영,심인섭, 이도영,고희동, 최남선,이종린*오세창, 심인섭,이도영, 박한영*오세창, 이도영,고희동, 박한영,최남선, 심인섭,안종원, 이응균오세창, 이도영,고희동, 박한영, *최남선, 심인섭,안종원, 이응균,최우성오세창, 심인섭 등*오세창, 박한영,이도영, 고희동,최남선*오세창, 박한영,고희동, 최남선*오세창, 박한영,이도영, 고희동,최남선, 오일영오세창, 이도영,고희동오세창, 안종원,이도영, 고희동오세창, 김돈희,안종원, 이도영,이응균, 고희동비고:참가자 중에서 그날의 모임을 주관한 사람은 *표시를 하였다.7명의 동인이 결성한 정규 시회에는 시회명에 편의상 1~7까지 연번을 붙였다.고희동의춘곡서실<strong>오세창의</strong> 집<strong>오세창의</strong> 집이도영의관재서옥<strong>오세창의</strong> 집최남선의 일람각<strong>오세창의</strong> 집<strong>오세창의</strong> 집<strong>오세창의</strong> 집풍로진 주루청량사탑동 승사- 120 -


<strong>한동아집첩</strong>( 漢 衕 雅 集 帖 )<strong>과</strong> <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 詩 會 活 動 ) <strong>연구</strong>17그리고, 나머지 모임 중 1월 22일<strong>과</strong> 1월 29일 모임에는 7명의 동인이 모두 모여 문진입실첩<strong>과</strong>차좌동림첩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북원초집(원북소집)부터 한동오집(한동원소집)까지의 5회와 문진입실첩<strong>과</strong> 차좌동림첩을 만든 2회의 모임을 합치면 동인의 수와 같은 7회가 된다. 박한영은 자신의 문집에 「차좌동림수창서」를 남겨서 7명의 동인이 자신의 집을 돌아가며 시회를 가진 경위를 설명해 준다.수창( 酬 唱 )을 대접하는 순서가 이미 육자( 六 子 )의 윤단( 輪 壇 )을 돌아서 일개 중인 석전( 石 顚 )의 쓸쓸한 바리때에 이르렀으나 어느 곳에 시단을 만들어서 음식을 대접하겠는가. 다행히 최남선이 자신의 동림 한자리와 나누어줄 음식을 빌려주므로 차좌동림( 借 座 東 林 )이라 하였다. 어찌다른 말이 있겠는가. (중략) 낙하칠자( 洛 下 七 子 )라 함은 누구를 말하는가. 난타 이기·위창 오세창·성당 김돈희·관재 이도영·춘곡 고희동·육당 최남선·사문( 沙 門 ) 석전 박한영이다. 40)즉, 오세창을 비롯한 7명의 시 동인들은 번갈아가면서 시회를 주관하였으며 당시 거처가 일정치않던 박한영만이 최남선의 일람각을 빌려 모임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경고실음고에 기록된 25회의 모임들 중 이들 모임들에만 이기가 참석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당대 한시단( 漢 詩 壇 )의원로인 이기를 맹주로 하여 시회를 결성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기가 병으로 참석하지 못한 1월 8일의 서원춘초( 西 園 春 初 )에는 한학자인 우당( 于 堂 ) 윤희구( 尹 喜 求 , 1867~1929)가 대신 참석하여 이기의 역할을 대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오세창<strong>과</strong> 박한영의 기록을 정리해보면, 이들의 시회는 이기를 맹주로 하여 결성되었으며, 의 1부터 7에서 보듯 춘곡서실·관재서옥·일람각 등 동인들의 서실( 書 室 )을 돌면서 일곱 차례 개최되었다. 그리고 동인들은 “그런대로 규모를 갖춘” 한동오집부터는 <strong>한동아집첩</strong>·문진입실첩·차좌동림첩<strong>과</strong> 같은 시회첩을 꾸몄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으로만 전하는 문진입실첩·차좌동림첩이 발굴된다면 이들이 시회에서 즐긴 서화의 내용<strong>과</strong> 화풍( 畵 風 )을 보다 구체적으로 고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도영 외, , 1925, 지본담채·지본묵서, 19.9×120.0cm, 개인소장40) 박한영, 「차좌동림수창서( 借 座 東 林 酬 唱 序 )」, 석전문초, 法 寶 院 , 1962, 45~46쪽. “…… 酬 唱 主 餉 之 序 , 已 轉 六 子 之 輪壇 殿 及 石 顚 子 …… 洛 下 七 子 者 , 爲 誰 , 李 蘭 坨 琦 吳 葦 滄 世 昌 金 惺 堂 敦 熙 李 貫 齋 道 榮 高 春 谷 羲 東 崔 六 堂 南 善 沙 門 石 顚漢 永 , 乙 丑 正 月 二 十 九 日 .”- 121 -


18東 洋 學한편, 경고실음고에 보이는 다른 모임들은 때에 따라 구성원을 달리하는 여기적이고 즉흥적인회합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1925년 3월 23일 오세창·김돈희·안종원·이도영·이응균·고희동이함께 탑동 승사에서 가진 모임에서 제작된 시권( 詩 卷 )이 개인소장으로 전하여 주목된다.이 시권의 앞부분에는 이도영이 를 그리고 김돈희가 ‘기인( 奇 人 )들이 다리뻗고 쉬다’라는 뜻으로 ‘기인산각( 畸 人 散 脚 )’이라는 제를 달았으며, 뒤이어 6명의 동인들이 지은 칠언율시가 있다. 이도영은 소나무와 석탑 주변에 모인 동인들<strong>과</strong> 차를 끓이는 동자의 모습을 수묵담채로 소략하게 그렸는데, 각 인물들의 동태와 정겨운 모임의 운치가 잘 살아나 있다. 인물들이 앉아있는 풀밭의 표현에서 수채화풍이 간취되는 것은 고희동의 영향으로 보인다. 경고실음고에는 이 모임이 열리기 전인 2월 22일의 기록에 박한영<strong>과</strong> 최남선은 장차 두류산을 여행한다는 내용이 보이며,3월 2일 모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참석자 명단에서 박한영<strong>과</strong> 최남선의 이름을 볼 수 없다. 41) 따라서 는 주유( 周 遊 )에 나선 최남선·박한영이 빠지고 난 뒤 안종원<strong>과</strong> 이응균 등<strong>과</strong> 가진조촐한 모임에서 남긴 것으로 보인다.2. 한동아집의 성격<strong>과</strong> 1920년대의 시회문화지금까지 살펴본 <strong>한동아집첩</strong><strong>과</strong> 경고실음고의 기록, 그리고 시회에서 제작된 서화작품들을 통해 오세창이 활동하였던 시회의 성격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즉, 19세기말 여항시사의계승, 방고적( 倣 古 的 )인 시회 문화, 은일지사( 隱 逸 之 士 )를 표방하는 동인들의 태도 등으로 나누어 볼수 있다.<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을 통해 알 수 있는 이 시기 시회의 특징은 19세기말 여항시사의 잔영을 엿볼수 있다는 점이다. 19세기말 여항시사는 개화사상을 빠르게 받아들인 기술직 중인집안 출신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strong>시회활동</strong>을 통해 유대와 결속을 다지는 한편 개화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개화기를 거치며 근대문물<strong>과</strong>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문명개화와 근대화운동을 주도하였다. 42) 한동아집의 동인 중 오세창·고희동·이기·최남선 등은 모두 기술직 중인집안 출신들로서 이들은 가계를 통해 19세기말 여항문인들의 문예전통<strong>과</strong> 서화취미 등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특히 오세창<strong>과</strong> 고희동은 육교시사 동인이었던 부친<strong>과</strong> 이기를 통해 전통시사의 문풍을 계승할 수 있었고 따라서 시회결성의 주축이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아울러 이들이 활동하였던 서화협회에는 육교시사의 동인인 이기·현은( 玄 檃 , 1860~?)·지운영( 池 運 永 , 1852~1935) 등이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육교시사에서활동하는 문인들<strong>과</strong> 서화가들 사이의 교류는 매우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43)41) 실제로 박한영의 석전시초에는 3월 5일 여정을 시작한 ‘속남유기행( 續 南 遊 紀 行 )’ 시 21수가 있다. 박한영, 앞의책, 1999, 67~73쪽.42) 정옥자, 「정조대 玉 溪 詩 社 의 결사와 眞 景 詩 畵 」, 韓 國 學 報 28, 한국학보, 2002, 4~9쪽.43) 최경현, 「 六 橋 詩 社 를 통해 본 開 化 期 畵 壇 의 一 面 」, 한국근대미술사학 12,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220~223쪽.- 122 -


<strong>한동아집첩</strong>( 漢 衕 雅 集 帖 )<strong>과</strong> <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 詩 會 活 動 ) <strong>연구</strong>19아울러, 최남선·오세창·고희동·박한영·이도영 등이 민족문화운동 인사들<strong>과</strong> 교류했었던 조선광문회에는 주로 중인<strong>과</strong> 몰락양반 출신의 신지식층이 많이 활동하고 있었고 소년·청춘<strong>과</strong> 같은잡지의 표지그림<strong>과</strong> 삽화를 위해 다수의 화가들이 출입하였다는 점, 그리고 이들이 광문회에서 고전간행의 고문역할을 하는 한학자들<strong>과</strong> 교류할 수 있었던 점도 이들이 구한말 여항시사 전통을 이어 시회를 결성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고 생각된다. 44) 또, <strong>한동아집첩</strong>의 서문을 쓴 박한영은국운이 기울면서 전통이 단절되는 데에 대한 위기의식<strong>과</strong> 전통계승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는데, 박한영은 스스로 육교시사의 맹주인 고환당( 古 懽 堂 ) 강위( 姜 瑋 , 1820∼1884)의 시풍( 詩 風 )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가 있으므로 그가 잇고자 한 한시의 전통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45)<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에서 보이는 두 번째 특징은 방고적인 시회문화이다. 방고적인 시회문화는 배파회( 拜 坡 會 )를 흉내내어 남원속집을 열었다는 <strong>오세창의</strong> 기록이나 중국 고사( 故 事 )를 모방한 시회도 등에서 잘 드러난다. 오세창은 1924년 12월 19일 “이도영이 동인을 초대하여 배파회를 흉내 내니 이를남원속집이라 하였다.”고 하였는데, 배파회는 동파( 東 坡 ) 소식( 蘇 軾 , 1036~1101)을 숭배하는 문인들이모여 소동파의 생일을 기념하는 시회를 일컫는다. 남원속집이 열린 날은 마침 소동파의 생일<strong>과</strong> 같은날이어서 동인들은 이날을 기념하여 배파회를 가졌다. 배파회는 추사( 秋 史 ) 김정희( 金 正 喜 , 1786~1856)와 자하( 紫 霞 ) 신위( 申 緯 , 1769∼1845) 등을 통해 청대( 淸 代 ) 문인들의 소동파 숭모( 崇 慕 )열기가조선에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19세기의 여항문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김정희는 옹방강( 翁 方 綱 ,1733~1818)으로부터 받은 소동파 초상화를 배향하였는데, 이에 영향을 받은 소동파 숭배열<strong>과</strong> 소동파상 제작은 청조문예의 잔영<strong>과</strong> 함께 근대까지도 이어졌다. 46)소동파는 유( 儒 )·불( 佛 )·선( 禪 )을 통달하고 시문서화( 詩 文 書 畵 )에도 능하였던 중국의 대표적인 문장가이자, 정치적 탄압으로 험난한 유배지에서 고난을 겪어야 했던 불우한 문인의 전형으로서 후대인들에게 존숭되고 예술의 모티프가 되었다. 국운이 이미 기울어버린 일제강점기를 만나 출처( 出 處 )가 자유롭지 못했던 한동아집의 동인들은 소동파의 삶에 공감하고 자신들의 처지와 동일시하였다.이들은 배파회를 모방해서 남원속집을 열었을 뿐 아니라, 같은 해에 서원아집도를 모방하여 최남선의 일람각( 一 覽 閣 )에서 시회를 갖고 이도영이 이를 ()로 남기기도 하였으며, 47) 박한영은 소동파가 황주( 黃 州 ) 유배시절 적벽 아래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적벽야유( 赤 壁夜 遊 )’ 고사를 떠올리며 “소선의 적벽부 읊노라니 밤은 정히 깊었네……명사는 잊더라도 느낌만은다름없어라.”라고 읊기도 하였다. 48)44) 오영섭, 앞의 논문, 131~133쪽.45)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 편, 앞의 책, , 246쪽. “벽하( 碧 下 ) 스님께 글을배우고/ 강고환( 姜 古 懽 )에게 시풍을 익혀/ 문장이란 이런 건줄 알기는 하나/ 좋은 글을 엮기란 쉽지 않구나”.46) 배파회( 拜 坡 會 )는 18세기 옹방강( 翁 方 綱 )에 의해 성행하여 그의 학문의 확산<strong>과</strong> 함께 전파되었다. 김울림, 「옹방강의금석고증학<strong>과</strong> 소동파상」, 美 術 史 論 壇 18, 한국미술<strong>연구</strong>소, 2004, 89~113쪽.47) 이도영은 이 그림에 16명의 동인들이 시회를 가지고 서원( 西 園 )의 고사를 모방하여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strong>과</strong> 북송대문인들의 풍아에 미치지 못함이 부끄럽다는 내용의 제발을 남겼다.48) 박한영, , “ 明 沙 丹 壁 月 昇 東 銀 海 光 涵 微 拂 風 亂 峰 雲 逗 氣 生 曙 遠 艇 燈 疎 色 不 紅 沉 酣 白 墮 衿 猶 冷 朗 吟 蘇 詞 夜- 123 -


20東 洋 學 지운영,,1922, 견본채색,127.0×50.0cm,고려대학교박물관 이도영, , 1925, 지본담채20.0×56.0cm, 개인소장마지막으로 살펴볼 특징은 자족적이고 은둔적인 동인들의 태도이다. 경고실음고에서 보듯이1925년을 전후하여 오세창은 한동아집처럼 동인들 간의 결속력이 있는 시회 외에도 시의적( 時 宜 的 )인시회나 술자리에 즐겨 참석하였다. 49) 당시 명망가의 사랑방에서는크고 작은 시회와 주연( 酒 宴 )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러한 자리에서는시서화 창작<strong>과</strong> 서화감평활동 등이이루어졌는데, 고희동이나 이도영이남긴 그림들은 이러한 모습을 잘보여준다. 일례로, 고희동의 는 모임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각자 한 가지씩 음식을 들고 온다 하여 ‘일기회( 一 器 會 )’라고 고희동, , 지본담채, 27.9×44.1cm, 개인소장불렸던 모임을 그린 것으로서 화면精 中 露 宿 滄 洲 淸 一 夢 可 忘 名 士 照 懷 同 ”49) 이는 안중식의 제자였던 김은호·김돈희의 며느리·고희동의 손자·박한영의 제자·안종원의 손자 등 여러 사람의회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920년대 초 유명한 문예계 인사의 집에는 매일 밤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술자리가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김은호, 앞의 책, 58~59쪽; 김윤경, 앞의 논문, 1998; 서울대박물관, 춘곡 고희동 40주기특별전, 2005, 112쪽;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 편, 「석정 정호 스님의 도반·문인」, 석전 정호스님행장<strong>과</strong> 자료집, 2009, 243~244쪽.- 124 -


<strong>한동아집첩</strong>( 漢 衕 雅 集 帖 )<strong>과</strong> <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 詩 會 活 動 ) <strong>연구</strong>21중앙에 정면을 향해 앉아 있는 오세창<strong>과</strong> 그 오른쪽에 앉은 최남선<strong>과</strong> 고희동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술자리의 주변에는 두루마리와 서책·벼루와 먹·시고·매화분 등이 널려 있어서 주연이 베풀어지기전 시서화를 즐기고 매화를 완상하였던 모습을 짐작케 해준다.<strong>한동아집첩</strong>에는 이러한 시회도가 그려져 있지 않지만 “다들 눈길에 빠지는 것쯤이야 대수롭지않게 여기고 혹 병든 몸을 이끌고 도롱이를 쓰고 혹 우산을 지고 나막신을 끌고서 마치 이문을 좇는 자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드는 듯” <strong>오세창의</strong> 서실을 찾아온 동인들의 동류애와 “차를 다 마시고술이 거나해지자 그림 그리는 사람은 붓을 적시고 글씨 쓰는 사람은 한 번 팔뚝을 휘둘러보고 시를짓는 사람은 어깨를 곧추세우며 각자 솜씨를 발휘하”는 풍류는 고희동의 에 그려진 정경<strong>과</strong>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이날의 모임을 주관한 <strong>오세창의</strong> 시에는 동인들의 충천한 여흥( 餘興 ), 그리고 세상에 결탁하지 않는 문인의 고고함이 흠뻑 담겨 있다.悲 歡 如 夢 幾 良 宵老 氣 騰 騰 尙 未 消啜 茗 尋 詩 梅 下 屋隔 溪 邀 月 竹 邊 橋슬프고 기쁜 것이 꿈같으니 얼마나 좋은 밤인가늙은 기운 충천하여 아직도 쇠하지 않았네매화나무아래 오두막에서 차 마시고 시 지으며시내 건너 대나무 숲가 다리에서 달을 맞이하네.冷 膓 豈 肯 因 人 熱 주린 배를 어찌 남의 손 빌려 채우겠는가故 態 還 誇 與 世 遙 옛 자태를 도리어 자랑하니 세상<strong>과</strong> 멀어지네臥 雪 蓬 門 誰 剥 啄 와설하는 사립문을 누가 두드리는가 50)若 非 韻 釋 是 漁 樵 시승이 아니라면 어부와 나무꾼이겠네. 51)오세창은 마침 큰 눈이 내린 날씨와 관련하여 후한( 後 漢 )시대 원안( 袁 安 )의 와설( 臥 雪 ) 고사를 인용하며, 곤궁한 시기에 밖에 나가 먹을 것을 구하기보다 시나 지으며 은둔하겠노라는 꼿꼿한 절조를읊었다. 최남선·오세창·고희동·이도영·박한영 등은 모두 신문물<strong>과</strong> 근대식 제도의 도입에 앞장섰던 근대적인 지식인들이었지만 종종 불운한 시대를 만난 자신들의 처지를 현실을 초월한 은일지사( 隱 逸 之 士 )에 비유하였다. 국권을 빼앗긴 일제강점기라는 난세를 만난 동인들은 “세상에 들어가거나 속세를 벗어나는 행업( 行 業 )”이 모두 달랐지만, 현실에서 자신의 안위를 좇기보다 고결하게지조를 지키는 옛 고사들의 출처관( 出 處 觀 )을 앙망( 仰 望 )하였다. 이들에게 시회는 한시와 서화를 통해전통<strong>과</strong> 민족문화를 재전유하는 공간이자, 현실의 난관을 피해 자족적인 삶<strong>과</strong> 고결한 지조를 노래할수 있는 위안처이기도 했다.50) 눈 내릴 때 방 안에 누워 있는 것을 말한다. 후한( 後 漢 ) 때 낙양( 洛 陽 )에 폭설이 내리자 집집마다 눈을 치우러 나오고 먹을 것을 구걸하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 낙양 수령이 성안을 시찰하다가 원안( 袁 安 )이 차가운 방 안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굶어 죽는 판인데 남에게 음식을 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後 漢 書 45, 「 袁 安 列 傳 」.51) 오세창, 「칠언율시」, <strong>한동아집첩</strong>.- 125 -


22東 洋 學이처럼, 19세기 대청교류를 통해 들어온 청대문화의 잔영이구한말 여항문인들을 거쳐 <strong>오세창의</strong> 금석학 <strong>연구</strong>와 서예작품에남아 있었던 것이라든가, 1920년대 이후 최남선을 필두로 조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동인들 사이에서도 전통에 대한관심이 커지고 복고적인 문예취향이 팽배해졌던 당시 상황은이들의 시회가 복고적이고 방고적인 성격을 띠었던 것을 이해하게 해준다. 아울러 금석도서와 시서화에 심취할 수 있었던시회는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시대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는시은( 市 隱 )의 공간이 되었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Ⅳ. 맺음말본고에서는 <strong>한동아집첩</strong><strong>과</strong> 경고실음고를 중심으로 <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strong>과</strong> 동인들의 문예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한동아집 이도영, ,은 오세창이 은둔하면서 서화와 전각<strong>연구</strong>에 몰두하였던 1920년 1927, 지본담채, 151.0×81.0cm,대 문예계 인사들<strong>과</strong>의 교류양상<strong>과</strong> 이들의 <strong>시회활동</strong>을 잘 보여주개인소장는 자료이다. 오세창·이도영·고희동·김돈희 등의 서화가들<strong>과</strong>역사학자 최남선<strong>과</strong> 승려인 박한영, 그리고 한학자 이기 등 각계의 문예인사로 이루어진 한동아집의동인들은 동인의 집을 돌며 7회의 시회를 열었고, 동인들의 시서화를 모아 <strong>한동아집첩</strong>·문진입실첩·차좌동림첩」 등의 시회첩<strong>과</strong> <strong>과</strong> 같은 시회도권을 제작하였다.이들은 대부분 기술직 중인집안 출신이며 이기·오세창·고희동은 직간접적으로 육교시사와 관련이 있는 인물들로서, 이들의 <strong>시회활동</strong>은 육교시사로 대표되는 구한말 여항시사의 전통에 닿아 있다.이기를 제외한 시사 동인들이 모두 신문물의 도입을 선도한 근대적 지식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복고적인 문예취향을 가지고 고전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였고, <strong>한동아집첩</strong>에서는 전통의 부흥을모색하는 한편 혼탁한 세상<strong>과</strong> 거리를 두고자 하였던 동인들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민족의 구성이 되는 개인의 인격을 중시하며 민족의식을 <strong>과</strong>거의 역사전통의 재현 속에서 구하고자한 1920년대 문화주의와 일맥상통한다. 52) 따라서 1924년부터 1925년까지 활동한 이들의 시회는 전통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가운데에서 민족문화의 정수를 모색하면서 각자의 영역을 넓혀 나아갔던탐구의 장이었다고 생각된다.52) 이지원, 일제하 민족문화 인식의 전개와 민족문화운동 ― 민족주의 계열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2004.- 126 -


<strong>한동아집첩</strong>( 漢 衕 雅 集 帖 )<strong>과</strong> <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 詩 會 活 動 ) <strong>연구</strong>23이처럼 <strong>한동아집첩</strong>은 일제의 정책이 공고화되던 1920년대에 결성된 이들의 시회가 동인들의 고결한 정신을 지킬 수 있는 은둔처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strong>과</strong> 더불어, 역사가 최남선 및 오세창·고희동 등의 서화가들이 전통<strong>과</strong> 민족문화에 대한 인식을 서로 공유하고 교감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는사실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자료라고 하겠다.원전자료동아일보조선중앙일보박한영, 石 顚 文 鈔 , 法 寶 院 , 1962.박한영, 石 顚 詩 鈔 , 한국문집편찬위원회, 1999.오세창 외, 漢 衕 雅 集 帖 , 1925.오세창, 竟 沽 室 吟 藁 , 1924~1925.오세창, 槿 域 書 畵 徵 , 啓 明 俱 樂 部 , 1927(한국미술<strong>연구</strong>소, 국역 근역서화징, 시공사, 2007).오세창, 槿 域 印 藪 , 國 會 圖 書 館 , 1968.도록 및 자료집고려대학교박물관, 근대 서화의 요람, 耕 墨 堂 , 2009.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 편, 석전 정호스님 행장<strong>과</strong> 자료집, 2009.서울대박물관, 춘곡 고희동 40주기 특별전, 2005.예술의 전당, 韓 國 書 藝 一 百 年 , 1988.예술의 전당, 葦 滄 吳 世 昌 ― 亦 梅 · 葦 滄 兩 世 의 學 問 <strong>과</strong> 藝 術 世 界 , 1996.예술의 전당, 葦 滄 吳 世 昌 ―전각·서화감식·콜렉션, 2001.학고재, 구한말의 그림, 1989.단행본김은호, 서화백년, 중앙일보사, 1981.류시현, 최남선 <strong>연구</strong>, 역사비평사, 2009.송희경, 조선후기 아회도, 다미디어, 2008.윤재민, 조선후기 중인층 한문학의 <strong>연구</strong>, 고려대 민족문화<strong>연구</strong>소, 1999.이승연, 위창 오세창, 이회문화사, 2000.- 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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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한동아집첩</strong>( 漢 衕 雅 集 帖 )<strong>과</strong> <strong>오세창의</strong> <strong>시회활동</strong>( 詩 會 活 動 ) <strong>연구</strong>25❙Abstract❙Study on Handong-ajipcheop( 漢 衕 雅 集 帖 ) and Oh Sechang’s Poetic Gatherings53)Kim, Yejin*Handong-ajipcheop ( 漢 衕 雅 集 帖 ) is the assembly album made for commemorating the poeticgathering which Oh Se-Chang, Kim Don-Hee, Ko Hee-Dong, Lee Do-Yeong, Lee Ki, Parkhan-Yeong and Choi Nam-Sun joined in. They got together several times and made assemblyalbums and paintings to commemorate their poetic gatherings. Oh Se-Chang had written the poemnote, Gyeong-gosileumgo( 竟 沽 室 吟 藁 ) about that gatherings and his poet, which tell us the processto organize their poetical circles and the members’ activities in each gatherings.The characters of the gathering to be found in Oh’s record and album and other member’s arts— poetry, calligraphy and painting are classified to 3 aspects as follows;first, they inherited the traditional poetic gathering of the middle-class in the late Joseon dynasty.Second, their arts were modeled after Chinese classics. The last, they loved and enjoyed hermiticattitude and style under Japanese colonization.Although most members were new intellectuals they study Chinese classics and national cultureand their poetic gathering means the opportunity in which they can study and share the culturalinsight as well as the place as the physical space.[Key Words] Oh Sechang, Choi Namseon, Park Hanyeong, Ko Heedong, Handong-ajipcheop,Gyeong-gosileumgo, Album of Poetic Gathering, Yukgyo Poetic Gathering* Curator, Korea University Museum.- 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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