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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문왕·헌강왕대 한화정책(漢化政策)의 추진과 그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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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東 洋 學경문왕 12년(872)연대 관명 관등 인명 비고 출전上 堂阿 干 金 李 臣 前 兵 部 大 監一 吉 干 金 丹 書 倉 部 卿前 兵 部 大 監 阿 干 金 李 臣황룡사9층목탑倉 部 卿 一 吉 干 金 丹 書 重 修 成 典 <strong>의</strong> 上 堂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執 事 侍 郞 阿 干 金 八 元 황룡사9층목탑內 省 卿 沙 干 金 咸 熙 重 修 俗 監 典헌강왕 5년(879) 執 事 侍 郞 金 八 元 봉암사지증대사탑비헌강왕 10년(884) 前 兵 部 侍 郞 金 彦 卿 6) 보림사보조선사탑비헌강왕 11년(885) 兵 部 侍 郞 崔 致 遠 삼국사기 최치원열전 7)헌강왕대 執 事 侍 郞 姚 克 一벼슬이 侍 中 兼 侍 書學 士 에 이르렀다고전함. 侍 中 은 侍 郞<strong>의</strong> 오기로 추정삼국사기 김생열전 8)執 事 侍 郞金 寬 柔진성여왕 4년(890)夏 官 二 卿 은 兵 部 성주사낭혜화상탑비夏 官 二 卿金 禹 珪次 官 <strong>의</strong> 異 稱진성여왕 7년(893) 兵 部 侍 郞 金 處 誨 入 唐 使 臣 삼국사기 <strong>신라</strong>본기진성여왕 7년(893) 무렵 前 守 兵 部 侍 郞 崔 致 遠 봉암사지증대사탑비진성여왕 11년(897)무렵守 倉 部 侍 郞 級 餐 金 穎 入 唐 賀 正 使新 羅 賀 正 表 / 遣 宿 衛 學 生 首 領 等入 朝 狀 / 奏 請 宿 衛 學 生 還 蕃 狀효공왕 10년(906) 前 守 禮 部 侍 郞 朴 仁 範 흥녕사징효대사보인탑비효공왕 13년(909) 執 事 ( 省 ) 侍 郞 崔 彦 撝경명왕 1년(917) 무렵 守 兵 部 侍 郞 崔 仁 渷경명왕 7년(923)최언위<strong>의</strong> 다른이름삼국사기 설총열전/고려사 최언위열전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倉 部 侍 郞 金 樂 入 後 唐 使 臣 삼국사기 <strong>신라</strong>본기前 守 執 事 侍 郞 崔 仁 渷 봉림사진경대사탑비倉 部 侍 郞 金 岳 入 後 唐 使 臣 삼국사기 <strong>신라</strong>본기경명왕 8년(924)前 守 執 事 侍 郞 崔 彦 撝 흥녕사징효대사보인탑비경애왕 4년(927) 兵 部 侍 郞 張 芬 入 後 唐 使 臣 삼국사기 <strong>신라</strong>본기경순왕 6년(932)執 事 侍 郞 金 昢 入 後 唐 使 臣司 賓 卿 李 儒 入 後 唐 副 使삼국사기 <strong>신라</strong>본기6) 보림사보조선사탑비에 ‘ 前 兵 部 侍 郞 入 朝 使 殿 中 大 監 賜 紫 金 魚 袋 金 彦 卿 ’이 비문을 썼다고 전한다. 종래에 전중대감을 <strong>신라</strong> 殿 中 省 ( 內 省 )<strong>의</strong> 차관급 관리로 추정하기도 하였으나(한국고대사회연구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권,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55쪽) 수긍하기 어렵다. <strong>신라</strong> 전중성<strong>의</strong> 차관은 卿 또는 侍 郞 으로 전할 뿐이고, <strong>그</strong>것을 大 監 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중대감은 <strong>그</strong>가 당에 사신으로 가서 받은 관직일가능성이 높으며, 구체적으로 唐 <strong>의</strong> 殿 中 省 監 을 가리키지 않을까 한다. 신당서 권83 열전제8 諸 公 主 條 에 태종<strong>의</strong> 딸인 臨 川 公 主 <strong>의</strong> 남편 周 道 務 부친인 範 之 가 殿 中 大 監 을 역임하였다고 전하는데, 이것은 殿 中 省 監 을 少 監 에 대비시켜- 68 -


<strong>신라</strong> <strong>경문왕·헌강왕대</strong> <strong>한화정책</strong>( 漢 化 政 策 )<strong>의</strong> <strong>추진과</strong> <strong>그</strong> <strong>한계</strong>5下 代연대 관명 관등 인명 비고 출전執 事 侍 郞金 珊 珎진공대사<strong>의</strong> 大 父관직비로암진공대사보법탑비前 守 執 事 侍 郞崔 彦 撝성주사낭혜화상탑비/지장선원낭원대사오진탑비前 守 兵 部 侍 郞 崔 彦 撝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執 事 侍 郞金 藹낭공대사<strong>의</strong> 문인 건성원화상<strong>의</strong> 祖 父 관직. 浿 江 都 護 역임.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에서 보듯이 경문왕 12년(872) 11월 25일에 작성된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에서 병부( 兵 部 )와창부( 倉 部 )<strong>의</strong> 차관을 병부대감( 兵 部 大 監 ), 창부경( 倉 部 卿 )이라고 표기하였다. <strong>그</strong>런데 헌강왕대 이후에병부시랑( 兵 部 侍 郞 ), 창부시랑( 倉 部 侍 郞 )이라고 표기하였음이 확인된다. 삼국사기 직관지에 따르면,경덕왕대에 병부대감과 창부경을 각각 병부시랑과 창부시랑 등 한식으로 개정하였다가 혜공왕대에복고( 復 故 )하였다고 한다. 경문왕 12년(872) 무렵까지 복고한 명칭을 <strong>그</strong>대로 사용하다가 헌강왕 10년이전 어느 시기엔가 다시 관명을 한식으로 개정하였음을 반영한다. 삼국사기 직관지에 예부<strong>의</strong> 차관을 경( 卿 )이라고 불렀지만, 경덕왕대에 시랑( 侍 郞 )이라고 개정하였다는 언급은 없다. 효공왕 10년(906) 이전 어느 시기에 박인범( 朴 仁 範 )이 예부시랑을 역임한 사례 역시 예부경을 경문왕 12년(872)이후에 한식으로 개정하였음을 알려주는 자료로 볼 수 있다. 9) 한편 경순왕 6년(932)에 후당( 後 唐 )에부사( 副 使 )로 파견된 이유( 李 儒 )<strong>의</strong> 관직이 사빈경( 司 賓 卿 )이었다. 경덕왕대에 영객부( 領 客 府 )를 사빈부( 司 賓 府 )로 개정하였다가 혜공왕대에 복고하였다. 932년에 영객부를 사빈부라고 표현한 것에서 <strong>그</strong> 이전 시기에 <strong>그</strong>것을 한식으로 개정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다만 삼국사기 직관지에서 영객부<strong>의</strong> 차관인 경을 경덕왕대에 시랑 등으로 개정하였다는 기록이 전하지 않으므로 차관<strong>의</strong> 명칭은 <strong>그</strong>대로 경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大 監 이라고 불렀음을 엿보게 해준다. 최치원이 효공왕을 대신하여 저술한 奏 請 宿 衛 學 生 還 蕃 狀 에 당에 慶 賀 副 使 로 파견된 金 僅 이 試 殿 中 監 이라고 전하고 있다. 여기서 試 殿 中 監 역시 당<strong>의</strong> 관직으로 보이며, 이것은 殿 中 大 監 과 동일한관직으로 추정된다.7)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 최치원이 당에서 885년 3월에 귀국하자, 헌강왕이 <strong>그</strong>를 ‘ 侍 讀 兼 翰 林 學 士 守 兵 部 侍 郞 知 瑞 書監 事 ’로 제수하였다고 전하나 <strong>그</strong>대로 수긍하기 힘들다. <strong>그</strong>가 병부시랑에 임명된 시기는 885년 3월보다 늦은 시기일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하게 살필 예정이다.8) 姚 克 一 이 집사시랑에 임명된 시기는 헌강왕대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하게 살필 것이다.9) 원성왕 14년(798)에 건립된 영천청제비 정원명에 典 大 等 이 보이고, 문성왕 17년(855)에 작성된 창림사무구정탑지에金 元 弼 이 前 執 事 侍 郞 으로 전하는 것으로 보건대, 집사부<strong>의</strong> 차관은 적어도 문성왕대부터 시랑으로 불렀지 않았을까한다. 한편 내성<strong>의</strong> 차관은 직관지에 卿 으로 전하나 경덕왕대에 <strong>그</strong>것을 侍 郞 으로 개정하였다는 언급은 전하지 않는다. 원성왕대에 內 省 <strong>의</strong> 차관을 侍 郞 , 경문왕 12년에 卿 이라고 불렀는데, 이에서 경덕왕대 이후에 내성<strong>의</strong> 차관을 경또는 시랑으로 혼용하여 불렀음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 문성왕 17년(855)에 창림사탑 조성 成 典 <strong>의</strong> 책임자와 부책임자를 檢 校 使 와 檢 校 副 使 라고 불렀다. 경덕왕대에 일부 成 典 <strong>의</strong> 衿 荷 臣 을 檢 校 使 , 上 堂 을 檢 校 副 使 로 개정하였다가 혜공왕대에 復 故 하였다고 직관지에 전한다. 위<strong>의</strong> 사례와 경문왕 12년(872)에 황룡사9층목탑 중수 성전<strong>의</strong> 관리를 上 堂 ,赤 位 등으로 부른 것을 감안하건대, 임시로 설치한 成 典 <strong>의</strong> 경우 사례에 따라 漢 式 또는 <strong>신라</strong> 고유<strong>의</strong> 職 名 을 사용하였다는 추정이 가능할 듯싶다.- 69 -


<strong>신라</strong> <strong>경문왕·헌강왕대</strong> <strong>한화정책</strong>( 漢 化 政 策 )<strong>의</strong> <strong>추진과</strong> <strong>그</strong> <strong>한계</strong>7위<strong>의</strong> 에서 보듯이 건립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흥덕대왕릉비를 10) 제외한 나머지 자료에 <strong>의</strong>거하건대, 헌강왕대 이후에 한식으로 개정된 관직명만을 사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병부낭중은 병부제감을, 사병원외는 노사지( 弩 舍 知 )를 한식으로 개정한 명칭이다. 창부원외랑( 倉 部 員 外 郞 )은삼국사기 직관지에 전하지 않는 관직명이다. 당나라 호부( 戶 部 )<strong>의</strong> 속사( 屬 司 )인 창부에 낭중, 원외랑, 주사( 主 事 ) 등<strong>의</strong> 관직이 있었다. 11) 경덕왕대에 창부<strong>의</strong> 대사를 낭중으로 개정하였으므로 원외랑은경덕왕대 사창( 司 倉 )으로 개정하였다고 전하는 조사지( 租 舍 知 )와 관련이 있을 듯싶다. 혜공왕대에 조사지를 사창으로 개정하였다가 혜공왕대에 복고하였고, 경문왕 12년 이후 어느 시기에 다시 원외랑으로 개정하였다고 보인다.헌강왕 11년(885) 이전에 박인범이 역임한 원외는 원외랑을 가리키는 듯한데, 직관지에 집사부<strong>의</strong>사지를 경덕왕 18년(759)에 원외랑으로 개정하였다가 혜공왕 12년(776)에 복고하였다고 전한다. 이에<strong>의</strong>거하건대, 일단 박인범이 헌강왕대에 집사부<strong>의</strong> 원외랑을 역임하였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strong>그</strong>러나헌강왕대 또는 <strong>그</strong> 이후에 병부 노사지를 사병원외(랑), 창부 조사지를 원외랑으로 개정한 점을 미루어 보건대, 박인범이 병부와 창부를 비롯한 중앙 행정관서<strong>의</strong> 사지급에 해당하는 관직을 역임하였을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최치원이 창부원외랑 김인규( 金 仁 圭 )를 사허귀근계( 賜 許 歸覲 啓 )에서 ‘원외랑군( 員 外 郞 君 )’으로, 상태위별지( 上 太 尉 別 紙 )에서 ‘향사( 鄕 使 ) 김인규원외( 金 仁 圭 員 外 )’라고 표현한 사실이 참조된다.지장선원낭원대사오진탑비에 낭원대사<strong>의</strong> 조부 김수정( 金 守 貞 )이 난성랑( 蘭 省 郞 )과 백대리( 栢 臺 吏 )를역임하였다고 전한다. 여기서 난성은 상서성( 尙 書 省 )<strong>의</strong> 이명( 異 名 )이고, 12) 고대 일본<strong>의</strong> 태정관( 太 政 官 )을 당명으로 난성이라고 불렀다. 13) 종래에 당에서 비서성( 秘 書 省 )을 난대( 蘭 臺 )로 개칭한 사실을 주목하여 난성을 숭문대( 崇 文 臺 )로 추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14) <strong>그</strong>러나 난성이 상서성<strong>의</strong> 이칭이고, 또고대 일본<strong>의</strong> 태정관을 당명으로 난성이라고 불렀음을 감안하건대, 집사부<strong>의</strong> 이칭일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추정에 잘못이 없다면, 난성랑은 집사부<strong>의</strong> 낭( 郎 )을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옳을 것이다. 15) 직관지에 집사부<strong>의</strong> 사( 史 )를 경덕왕대에 낭으로 개정하였다가 혜공왕대에 복고하였다고 전한다. 따라서 김수정<strong>의</strong> 사례는 하대 어느 시기에 집사부<strong>의</strong> 사를 낭으로 개정하였음을 알려주는자료로 이해할 수 있다. 백대는 어사대( 御 史 臺 )<strong>의</strong> 별칭이다. 16) ‘백대리’는 김수정이 숙정대(사정부)<strong>의</strong>10) 흥덕대왕릉비에 漢 式 으로 개정된 관명이 보인다. 중앙 행정관서<strong>의</strong> 관직명을 전면 개정한 것은 경문왕 12년(872) 이후였으므로 릉비를 건립한 시기 역시 이와 연관시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싶다(이기동, 앞<strong>의</strong> 논문, 1978; 앞<strong>의</strong> 책,1984, 240쪽).11) 倉 部 郎 中 一 人 員 外 郞 一 人 主 事 一 人 令 史 十 二 人 書 令 史 二 十 三 人 計 史 一 人 掌 固 四 人 ( 大 唐 六 典 권3 尙 書 戶部 ).12) 諸 橋 轍 次 , 大 漢 和 辭 典 9, 大 修 館 書 店 , 1985( 修 訂 版 ), 1034쪽.13) 日 本 國 語 大 辭 典 第 二 版 編 輯 委 員 會 · 小 學 館 國 語 辭 典 編 輯 部 , 日 本 國 語 大 辭 典 ( 第 二 版 ) 13 卷 , 2002, 804쪽.14) 이기동, 앞<strong>의</strong> 논문, 1978; 앞<strong>의</strong> 책, 1984, 256쪽.15) 삼국사기 열전제3 김유신(하)조에 玄 孫 長 淸 이 김유신<strong>의</strong> 行 錄 10권을 지었는데, 당시 <strong>그</strong><strong>의</strong> 관직이 執 事 郞 이라고전한다.16) 이기동, 앞<strong>의</strong> 논문, 1978; 앞<strong>의</strong> 책, 1984, 256쪽.- 71 -


<strong>신라</strong> <strong>경문왕·헌강왕대</strong> <strong>한화정책</strong>( 漢 化 政 策 )<strong>의</strong> <strong>추진과</strong> <strong>그</strong> <strong>한계</strong>9 <strong>신라</strong> 하대 금석문에 보이는 근시 관직명 일람표연대 관직명칭 관등 인명 비고 출전문성왕 17년(855) 洗 宅 大 奈 末 金 梁 博行 西 林 郡 太 守 兼 職 ,창림사탑 조성 成 典 <strong>의</strong> 창림사무구정탑지專 知 修 造 官헌안왕 4년(860) 宣 敎 省 보림사보조선사탑비中 舍 人 姚 克 一 대안사적인대사탑비경문왕 12년(872) 省 公 朴 居 勿 侍 讀 , 右 軍 大 監 兼 職春 宮 中 事 省 姚 克 一 崇 文 臺 郞 兼 職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헌강왕 7년(881) 宣 敎 省 副 使 馮 恕 行 봉암사지증대사탑비헌강왕 8년(882) 무렵 中 使 省 흥녕사징효대사보인탑비헌강왕대 內 供 奉 楊 晉 方 쌍계사진감선사탑비진성여왕 2년(888) 東 宮 內 養 安 處 玄 흥녕사징효대사보인탑비진성여왕 7년(893) 東 宮 官 奉 食 郞 王 輅 심원사수철화상탑비神 德 王 代 中 使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경명왕 2년(918) 무렵 中 事 省 內 養 金 文 式 봉림사진경대사탑비경애왕대 中 使 崔 暎 지장선원낭원대사오진탑비창림사무구정탑지에 김양박( 金 梁 博 )이 세택( 洗 宅 )이면서 행서림군태수( 行 西 林 郡 太 守 )를 겸직하였다고 전한다. 경덕왕대에 세택을 중사성( 中 事 省 )으로 개정하였다가 후에 복고하였다. 다른 관직<strong>의</strong> 사례에 비추어 보건대, <strong>그</strong> 시기는 혜공왕대였을 것이다. <strong>그</strong>런데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에 성공( 省 公 ), 춘궁( 春 宮 : 東 宮 ) 중사성이 보인다. 동궁에서 세택을 두었는데, 경문왕 12년(872) 11월 25일 이전에 <strong>그</strong>것을 중사성으로 개정하였음을 알려준다. 이후 시기<strong>의</strong> 자료에 세택은 보이지 않고, 중사성( 中 使 省 )또는 중사성( 中 事 省 )만이 확인될 뿐이다. 중사성을 ‘ 中 使 省 ’으로도 표기하였음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세택을 ‘ 中 事 省 ( 中 使 省 )’으로 개정하였음을 엿보게 해준다. 동궁<strong>의</strong> 세택을 중사성으로 개칭할 때에 내성 예하<strong>의</strong> 세택 역시 중사성으로 개칭하였다고 봄이 자연스러울 듯싶다. 성공은 뒤에서 살펴보듯이중사성<strong>의</strong> 관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인다. <strong>그</strong>러면 세택을 중사성으로 개정한 시기는 언제였을까?세택을 중사성으로 개정한 시기와 관련하여 헌안왕 4년(860)에 선교성( 宣 敎 省 )이란 근시기구가 존재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발해<strong>의</strong> 선조성( 宣 詔 省 )과 동일한 성격<strong>의</strong> 기구로서 교서를 선포하는 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21) 선교성은 삼국사기 직관지에 전하지 않으므로 <strong>신라</strong> 하대에처음 창설한 기구로 추정되는데, <strong>그</strong> 시기는 헌안왕 4년(860) 이전이었다. 구체적인 시기를 더 이상고구( 考 究 )하기 어렵지만, 문성왕 17년(855)에 세택이 보이므로 선교성을 설치한 시기를 <strong>그</strong> 이전으로소급하기 어려울 듯싶다. 이것과 더불어 세택을 중사성으로 개정하였을 가능성을 한번 추정해볼 수21) 이기동, 앞<strong>의</strong> 논문, 1978; 앞<strong>의</strong> 책, 1984, 241쪽.- 73 -


10東 洋 學도 있다. <strong>그</strong>러나 경문왕대에 <strong>한화정책</strong>을 추진하였다는 기록에 주목한다면, 핵심 근시기구인 세택<strong>의</strong>경우는 <strong>한화정책</strong><strong>의</strong> 일환으로 경문왕대에 개정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경문왕 12년에 성공박거물( 朴 居 勿 )과 춘궁 중사성 요극일( 姚 克 一 )이 왕명( 王 命 )을 받아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를 찬술하고, 서사( 書 寫 )하였다는 사실에서 경문왕대에 중사성<strong>의</strong> 역할이 크게 강조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세택을 중사성으로 개정한 시기는 경문왕 12년(872) 이전<strong>의</strong> 경문왕대로 보는 것이 더합리적일 듯싶다. 22)이상에서 헌안왕 4년 이전 시기에 선교성을 설치하고, 경문왕대에 근시기구<strong>의</strong> 핵심인 세택을 중사성으로 개정하였으며, 헌강왕대에 중앙 행정관서 및 <strong>그</strong> 관직 명칭을 전면 한식으로 개정하였음을 살폈다. 이와 더불어 헌강왕대에 당나라<strong>의</strong> 학사제를 도입하고, 문한기구를 확장하였다. 이에 대해서는절을 달리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2. 학사제( 學 士 制 )<strong>의</strong> 수용과 서서원( 瑞 書 院 )<strong>의</strong> 설치삼국사기 직관지에 전하는 문한기구가 바로 내성( 內 省 ) 예하<strong>의</strong> 상문사( 詳 文 師 )와 숭문대이다. 상문사는 성덕왕 13년(714)에 통문박사( 通 文 博 士 )로 개정하였고, 경덕왕대에 다시 한림( 翰 林 : 翰 林 臺 )으로 개칭하였으며, 이후에도 <strong>그</strong> 명칭을 <strong>그</strong>대로 사용하였다. 성덕대왕신종명에 ‘ 翰 林 ( 臺 ) 郞 ’, ‘ 翰 林 ( 臺 )待 詔 ’, ‘ 翰 林 臺 書 生 ’이 나온다. 23) 한림대는 낭-대조-서생으로 구성되었음을 알려준다. 한편 또 하나<strong>의</strong>문한기구인 숭문대<strong>의</strong> 관원은 직관지에 낭 2인, 사 4인, 종사지( 從 舍 知 ) 2인으로 구성되었다고 전한다. 당나라<strong>의</strong> 경우 숭문관( 崇 文 館 )은 동궁 예하<strong>의</strong> 관청이었는데, 정관( 貞 觀 ) 연간(627~649)에 학사( 學士 )·직학사( 直 學 士 )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24) <strong>신라</strong><strong>의</strong> 숭문대는 동궁 예하가 아니라 내성 예하<strong>의</strong> 관청이라는 점에서 차별된다.삼국사기 직관지에서 한림대에 후에 학사를 두었다고 언급하였다. 한편 886년(정강왕 1) 10월에건립된 사림사홍각선사비에 김원( 金 薳 )이 수병부낭중( 守 兵 部 郎 中 )이면서 숭문관직학사였다고 전한다.이에서 정강왕 원년 이전에 숭문대(관)에도 학사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한림원과 숭문관 이외에 당나라에서 학사를 두었던 기관이 집현전서원( 集 賢 殿 書 院 )과 홍문관( 弘 文 館 )이었다. 두 기관<strong>의</strong> 경우, 5품 이상은 학사, 6품 이하는 직학사라고 불렀다. 25) <strong>신라</strong>는 당나라<strong>의</strong> 제도를 수용하여 숭문관에 학사22) 경문왕 12년(872) 8월 14일에 건립한 대안사적인대사탑비에서 요극일<strong>의</strong> 관직이 中 舍 人 이었다고 하였고, <strong>그</strong>로부터 3개월 뒤에 작성된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에 요극일이 춘궁 중사성이었다고 전한다. 두 자료를 비교하건대, 중사인은 바로 춘궁 중사성<strong>의</strong> 大 舍 를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자연스러울 듯싶다. 한편 진성여왕 2년(888)에 安 處 玄 이 東 宮內 養 이었고, 경명왕 2년(918)에 金 文 式 이 中 事 省 內 養 이었다. 경문왕 12년(872) 이후에 大 舍 나 中 舍 人 등을 內 養 으로개정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23) 성덕대왕신종명에 ‘ 朝 散 大 夫 兼 太 子 司 議 郞 翰 林 郞 金 弼 奧 奉 敎 撰 ( 翰 林 郞 級 飡 金 弼 奧 奉 詔 撰 )’, ‘ 翰 林 臺 書 生 金 符 白 宛書 ’, ‘ 待 詔 大 奈 麻 姚 湍 書 ’ 등이 전한다.24) 崇 文 館 學 士 < 魏 文 帝 招 大 儒 之 士 始 置 崇 文 館 … 自 貞 觀 中 崇 文 館 有 學 士 直 學 士 員 不 常 置 掌 敎 授 學 生 等 >… 崇 文 館 學 士 掌刊 正 經 籍 圖 書 以 敎 授 諸 生 其 課 試 擧 選 如 弘 文 館 ( 大 唐 六 典 卷 26 崇 文 館 ).25) 學 士 < 五 品 以 上 學 士 每 以 宰 相 爲 學 士 者 知 院 事 …> 直 學 士 < 六 品 以 下 爲 直 學 士 並 · 開 元 十 三 年 置 ( 大 唐 六 典 권9 中 書 省- 74 -


<strong>신라</strong> <strong>경문왕·헌강왕대</strong> <strong>한화정책</strong>( 漢 化 政 策 )<strong>의</strong> <strong>추진과</strong> <strong>그</strong> <strong>한계</strong>11와 직학사를 두었다고 보인다. 아마도 한림대에 학사를 두었을 때에 숭문대에도 학사와 직학사를 설치하였다고 추정되는데, 구체적인 도입 시기와 관련하여 <strong>신라</strong> 하대 금석문과 여러 문헌에 보이는 문한 관직을 조사하여 정리한 다음<strong>의</strong> 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strong>신라</strong> 하대 금석문과 여러 문헌에 보이는 문한 관직 일람표연대 관직명칭 관등 인명 비고 출전애장왕대 翰 林 薛 仲 業혜공왕대 설중업<strong>의</strong>관직고산사서당화상비창림사무구정탑지/문성왕 17년(855) 翰 林 郞 金 立 之 秋 城 郡 太 守 兼 職성주사낭혜화상탑비경문왕 3년(863) 翰 林 沙 干 伊 觀 민애왕석탑사리함기경문왕 12년(872)헌강왕 7년(881)헌강왕 7년(881) 이후翰 林 郞 崔 賀 대안사적인대사탑비侍 讀 朴 居 勿 省 公 , 右 軍 大 監 兼 職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崇 文 臺 郞 姚 克 一 春 宮 中 事 省 , 中 舍 人侍 讀翰 林崇 文 臺 ( 直 學 士 )瑞 書 院 直 學 士朴 邕헌강왕 10년(884) 守 翰 林 郞 金 仁 圭侍 讀성주사낭혜화상탑비薩 飡 朴 邕 청장관전서 제68권入 淮 南 使 金 仁 圭 <strong>의</strong>관직, 倉 部 員 外 郞兼 職祭 讒 山 神 文(계원필경 권20)헌강왕 11년(885) 翰 林 學 士崔 致 遠 守 兵 部 侍 郞 兼 職 삼국사기 열전 26)知 瑞 書 監 事헌강왕대 侍 書 學 士 姚 克 一 侍 中 ( 侍 郞 ?) 兼 職 삼국사기 김생열전헌강왕대 崇 文 臺 鄭 旬 一 쌍계사진감선사탑비정강왕 1년(886) 崇 文 館 直 學 士 金 薳 守 兵 部 郞 中 兼 職 사림사홍각선사비진성여왕 7년(893) 무렵 瑞 書 院 學 士 崔 致 遠 前 兵 部 侍 郞 봉암사지증대사탑비효공왕 2년(898) 瑞 書 學 士 朴 仁 範白 鷄 山 玉 龍 寺 贈 諡 先 覺 大師 碑 銘 ( 東 文 選 권117)효공왕 10년(906) 무렵 翰 林 學 士 朴 仁 範 前 守 禮 部 侍 郞 흥녕사징효대사보인탑비효공왕 13년(909) 瑞 書 院 學 士 崔 彦 撝 執 事 ( 省 ) 侍 郞 兼 職경명왕 1년(917) 11월이후翰 林 學 士知 瑞 書 院 使崔 仁 渷최언위<strong>의</strong> 다른 이름.守 兵 部 侍 郞 兼 職삼국사기 설총열전/고려사 최언위열전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集 賢 殿 書 院 ).開 元 七 年 又 改 爲 弘 文 隸 門 下 省 自 武 德 貞 觀 以 來 皆 妙 簡 賢 良 爲 學 士 故 事 五 品 以 上 稱 爲 學 士 六 品 以 下 爲 直 學 士 ( 大 唐 六典 권8 門 下 省 弘 文 館 ).- 75 -


12東 洋 學하대연대 관직명칭 관등 인명 비고 출전瑞 書 郞太 子 侍 書 學 士삼국사기 직관지翰 林 郞흥덕왕릉비편경문왕 12년(872) 11월 25일에 작성된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에 요극일이 숭문대랑( 崇 文 臺 郞 )이었다고 전하므로 당시까지 학사제를 도입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헌강왕대에 박옹( 朴 邕 )과 정순일( 鄭詢 一 )이 숭문대<strong>의</strong> 관원으로 전하지만, 박옹<strong>의</strong> 경우는 후대<strong>의</strong> 자료이기 때문에 엄밀한 사료 비판이필요하고, 유감스럽게도 정순일<strong>의</strong> 경우는 구체적으로 숭문대<strong>의</strong> 어떤 관직에 재직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현재 숭문대<strong>의</strong> 낭을 학사로 개정한 시기는 경문왕 12년(872) 11월에서 정강왕 원년(886) 10월 사이<strong>의</strong> 어느 시기라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를 보면, 헌강왕 10년(884)까지 한림랑에 임명된 인물이 여럿 발견되다가 <strong>그</strong> 이후<strong>의</strong> 자료에는 단지 한림학사에 임명된 인물만이발견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추세와 숭문대랑을 숭문관(대)학사로 개정한 사례 등을 감안하건대, 884년 이후에 한림랑을 한림학사로 개정하였다고 유추할 수 있다. 27)최치원이 지은 제참산신문( 祭 巉 山 神 文 )에 884년에 헌강왕<strong>의</strong> 명령을 받고 최치원을 데려오기 위하여 당에 파견된 입회남사( 入 淮 南 使 ) 김인규<strong>의</strong> 관직이 검교창부원외랑( 檢 校 倉 部 員 外 郞 ) 수한림랑( 守 翰林 郞 )이었다고 전한다. 28) 최치원이 지은 글과 시 등을 종합하면, 김인규 일행이 최치원을 초치( 招 致 )하기 위하여 회남도<strong>의</strong> 수도인 양주( 揚 州 )에 도달한 것은 884년 7월 무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strong>그</strong>리고 8월경에 양주를 떠나 10월에 중국 산동성( 山 東 省 ) 청도시( 靑 島 市 ) 산하 교남시( 胶 南 市 ) 대주산진( 大 珠 山 鎭 ) 내에 위치한 대주산 밑에서 배를 띄워 귀국하려다가 풍랑을 만나 실패하였다. <strong>그</strong> 후 한동안 곡포( 曲 浦 )에서 머물다가 마침내 885년 3월에 <strong>신라</strong>에 귀국하였다고 한다. 29) 이에 따르면, 김인규가 수한림랑에 임명된 것은 적어도 884년(헌강왕 10) 7월 이전이 되는 셈이다.26)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 최치원이 당에서 885년 3월에 귀국하자, <strong>그</strong>에게 ‘ 侍 讀 兼 翰 林 學 士 守 兵 部 侍 郞 知 瑞 書 監 事 ’를제수하였다고 전하나, 한림학사 등을 제수받은 것은 <strong>그</strong>보다 늦은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하게 살필 것이다.27) 종래에 이기동, 앞<strong>의</strong> 논문, 1978; 앞<strong>의</strong> 책, 1984, 248쪽에서도 한림대<strong>의</strong> 郞 을 學 士 로 改 正 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한편 당나라<strong>의</strong> 경우 한림원<strong>의</strong> 待 詔 를 후에 供 奉 으로 개칭하고, 다시 <strong>그</strong>것을 학사로 개정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한림랑과 더불어 待 詔 역시 학사로 개정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때 郞 은 學 士 , 待 詔 는 直 學 士 로 개정하였는지<strong>의</strong>여부는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strong>그</strong>리고 書 生 은 侍 書 學 士 로 개정하였을 가능성이 높다(이문기, 앞<strong>의</strong> 논문, 1996,109쪽). 시서학사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보다 자세하게 언급할 예정이다.28) 계원필경 권20에 실린 謝 許 歸 覲 啓 에 ‘일찍이 온 員 外 郞 君 이 尊 旨 를 받들어 전하였다’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원외랑군은 同 書 에 실린 祭 巉 山 神 文 에 ‘ 新 羅 國 入 淮 南 使 檢 校 倉 部 員 外 郞 守 翰 林 郞 ’으로 전하는 金 仁 圭 를 가리킨다. <strong>그</strong>리고謝 賜 弟 棲 遠 錢 狀 에 따르면, 최원<strong>의</strong> 堂 弟 棲 遠 이 新 羅 國 入 淮 南 使 錄 事 로써 家 信 (최치원<strong>의</strong> 집에서 보낸 편지)을 가지고왔다라고 한다. 尊 旨 는 헌강왕이 최치원<strong>의</strong> 귀국을 바란다는 내용이 담긴 교지로 추정되고, 여기에다가 치원<strong>의</strong> 堂 弟서원이 家 信 을 가지고 입회남사녹사로서 김인규를 따라 왔다는 사실을 감안하건대, 입회남사 김인규<strong>의</strong> 임무는 당시회남도<strong>의</strong> 수도인 揚 州 에 머물고 있는 최치원<strong>의</strong> 귀국을 종용하고 안전하게 데려오는 것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듯싶다.29) 최치원과 김인규 일행이 양주를 떠나 대주산에 이르고 <strong>신라</strong>로 귀국하기까지<strong>의</strong> 여정에 대해서는 계원필경 권20에실린 여러 글을 통해서 살필 수 있다.- 76 -


<strong>신라</strong> <strong>경문왕·헌강왕대</strong> <strong>한화정책</strong>( 漢 化 政 策 )<strong>의</strong> <strong>추진과</strong> <strong>그</strong> <strong>한계</strong>13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서 헌강왕은 885년 3월에 최치원이 귀국하자, <strong>그</strong>에게 ‘ 侍 讀 兼 翰 林 學 士 ·守 兵 部 侍 郞 · 知 瑞 書 監 事 ’를 제수하였다고 하였다. <strong>그</strong>런데 금석문상에 최치원이 890년 무렵까지 <strong>신라</strong><strong>의</strong> 관직을 수여받은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아서 종래에 과연 귀국 직후 이와 같은 관직을 제수받았을까에 대한 <strong>의</strong>문이 제기되었다. 30) 886년 정월에 최치원이 헌강왕에게 자신<strong>의</strong> 시문집을 올렸기 때문에 <strong>그</strong>가 관직을 수여받은 시기는 이 무렵이나 <strong>그</strong> 이후로 봄이 옳을 듯싶다. 금석문상으로 893년(진서여왕 7)에 찬술되었다고 추정되는 봉암사지증대사탑비에서 비로소 최치원은 ‘ 前 兵 部 侍 郞 充 瑞 書院 學 士 ’였다고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 따르면, 최치원이 893년에 부성군(충남 서산시) 태수로 재직하고 있었고, <strong>그</strong> 이전에 태산군(전북 정읍시 칠보면) 태수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strong>그</strong>는 태산군 태수로 제수되기 이전에 병부시랑에 임명되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열전에 <strong>그</strong>가 한림학사에 임명되었다고 전하지만, 금석문에서 <strong>그</strong>에 관한 정보를 찾을 수 없다. 최치원이 한림학사였음은진성여왕대에 <strong>그</strong>가 여러 書 表 를 작성한 실례를 통하여 증명할 수 있다. <strong>그</strong>렇다면 언제 <strong>그</strong>가 한림학사에 임명되었을까? 성주사낭혜화상탑비에 헌강왕은 최치원을 국사( 國 士 )로 대우하였다고 전하고, 31)숭복사비에 886년(헌강왕 12) 봄에 <strong>그</strong>에게 숭복사비명을 찬술하도록 명령하였다고 전한다. 한림<strong>의</strong> 역할 가운데 왕명을 기초하고 교서를 작성하는 것이 포함되었음을 감안하건대, 적어도 최치원이 숭복사비명을 찬술하도록 명령받은 886년 봄에는 한림학사로 재직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도 좋지않을까 한다. <strong>그</strong>리고 이후 시기에 병부시랑과 서서원학사 또는 지서서감사를 제수받았을 것이고,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서는 <strong>그</strong> 모든 관직을 마치 885년 3월 귀국 직후에 제수받은 것처럼 기록하였다고 사료된다.최치원이 귀국 직후가 아니라 886년 봄 무렵에 한림학사에 임명되었다고 한다면, 한림랑을 한림학사로 개편한 시기는 884년 7월에서 886년 봄 사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2) 이후<strong>의</strong> 자료에서 한림랑과 숭문대랑에 관한 기록을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러한 추정을 보완할 수 있다.학사제<strong>의</strong> 도입 역시 당나라<strong>의</strong> 제도를 수용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strong>한화정책</strong>과 관련이 깊었음은 물론이다. <strong>그</strong>런데 를 보면, 헌강왕대부터 문한기구가 하나 더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strong>그</strong>것이 바로 서서원( 瑞 書 院 )이다. 종래에 서서원은 한림대를 개명( 改 名 )한 것, 즉 한림대<strong>의</strong> 후신으로 이해하였다. 33) <strong>그</strong>러나 이 견해는 <strong>그</strong>대로 수용하기 어렵다. 다음<strong>의</strong> 기록을 살펴보자.신(진성여왕)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동인( 東 人 )이 서국( 西 國 :중국)에 가서 배우는 것은, 오직30) 남동신, 「나말여초 전환기<strong>의</strong> 지식인 최치원」, 강좌 한국고대사 제8권(고대인<strong>의</strong> 정신세계),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2002, 311~314쪽.31) 성주사낭혜화상탑비에 ‘전에 나(진성여왕)<strong>의</strong> 父 王 (경문왕)께서는 (<strong>그</strong>대를) 國 子 로 뽑아 공부하게 하였고, 헌강왕께서는 (<strong>그</strong>대를) 國 士 로써 대우해주었다’라는 표현이 보인다.32) 종래에 이문기, 앞<strong>의</strong> 논문, 1996, 108쪽에서 9세기 전반에 한림학사를 설치하였다고 추정한 바 있다.33) 이기동, 앞<strong>의</strong> 논문, 1978; 앞<strong>의</strong> 책, 1984, 254쪽에서 한림대를 改 名 한 것이 瑞 書 院 이라는 견해를 제기한 이래, 이문기, 앞<strong>의</strong> 논문, 1996, 100쪽 및 하일식, 앞<strong>의</strong> 논문, 2006, 336쪽, <strong>그</strong>리고 장일규, 앞<strong>의</strong> 논문, 2009, 76쪽에서 이 견해를 수용하였다.- 77 -


14東 洋 學예( 禮 )와 악( 樂 )이었습니다. 여력으로 문장을 공부하게 하고, 정음( 正 音 )으로 언어를 변화시키기에 이르렀으니, 문장으로는 표장( 表 章 )을 수련하여 해외<strong>의</strong> 신절( 臣 節 )을 아뢰게 하고, 언어로는정례( 情 禮 )에 통달하여 천상( 天 上 :중국)<strong>의</strong> 사거( 使 車 )를 받들게 하니, <strong>그</strong> 직책을 한림이라고 이름하고, 종신( 終 身 )에 이르도록 종사( 從 事 )케 하였습니다.위<strong>의</strong> 글은 최치원이 진성여왕을 대신하여 지은 견숙위학생수령등입조장( 遣 宿 衛 學 生 首 領 等 入 朝 狀 )에나오는 것이다. 여기에 수창부시랑( 守 倉 部 侍 郞 ) 급찬( 級 餐 ) 김영( 金 潁 )이 하정사( 賀 正 使 )로 당에 파견되었다는 언급이 보인다. <strong>그</strong>런데 진성여왕이 왕위를 <strong>그</strong><strong>의</strong> 조카 요( 嶢 :효공왕)에게 양위( 讓 位 )한다는내용을 기술한 양위표( 讓 位 表 )에 하정사 모관( 某 官 )을 보내 표를 올린다는 내용이 보이고 있다. 34) 따라서 견숙위학생수령등입조장은 진성여왕이 요에게 왕위를 양위한 897년(진성여왕 11)에 작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진성여왕은 서표( 書 表 ) 작성을 관장하는 관직이 바로 한림이라고 분명하게언급하였다. 이것은 897년에 한림이라는 관직이 여전히 존재하였음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자료이다. 앞에서 886년 초반에 최치원이 한림학사에 임명되었음을 살핀 바 있고, 이밖에 흥녕사징효대사보인탑비에 906년(효공왕 10) 무렵에 효공대왕이 한림학사 전수예부시랑 박인범에게 비문을 찬술하도록 명령하였다고 전하며, 35)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에 경명왕 원년(917) 무렵에 비문을 찬술한최인연(최언위)<strong>의</strong> 관직이 ‘ 翰 林 學 士 守 兵 部 侍 郞 知 瑞 書 院 事 ’라고 전한다. 36) 헌강왕대 이래로 한림학사에 임명된 존재들이 계속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한편 최언위(최인연)는 한림학사이면서 동시에 지서서원사( 知 瑞 書 院 事 )에, 최치원은 한림학사이면서지서서감사( 知 瑞 書 監 事 )에 임명되었다고 전한다. 당나라에서 재상 1인을 집현전서원<strong>의</strong> 학사지원사( 學士 知 院 事 )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37) 이에 <strong>의</strong>거하건대, 지서서감사, 지서서원사는 서서원을 총괄하는관원<strong>의</strong> 직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에서 살필 수 있듯이 또 다른 기록에 최치원과 최언위는 서서원학사라고 전하고 있다. 즉 <strong>그</strong>들은 서서원학사이면서 동시에 서서원을 총괄하는 직책을 겸임하였던 것이다. 이밖에 고려 <strong>의</strong>종 4년(1150) 10월에 최유청( 崔 惟 淸 )이 지은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대사비명( 白 鷄 山 玉 龍 寺 贈 諡 先 覺 大 師 碑 銘 )에 898년(효공왕 2)에 효공대왕이 서서학사( 瑞 書 學 士 ) 박인범에게 비문을 찬술하도록 명령하였으나 마침내 돌에 새기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38) 한림학사는 종신직이었다.34) 謹 因 當 國 賀 正 使 某 官 入 朝 附 表 陳 讓 以 聞 ( 讓 位 表 ; 최영성, 역주 최치원전집 2, 아세아문화사, 1999, 98쪽).35) 흥녕사징효대사보인탑비에 따르면, 乾 寧 7년(효공왕 4) 3월 9일에 징효대사가 입적하였고, 제자들이 天 佑 3년(906,효공왕 10)에 石 墳 을 높이 세우고 金 骨 을 안치한 다음, 효공대왕에게 비를 세워줄 것을 건<strong>의</strong>하자, 시호를 澄 曉 大師 , 탑명을 寶 印 之 塔 이라고 하고, 한림학사 전수예부시랑 박인범에게 비문을 짓도록 지시하였다고 한다.36)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에 따르면, 낭공대사가 916년(신덕왕 5) 2월 12일에 입적하였고, 貞 明 3년(917, 경명왕1) 11월 중에 동쪽 산꼭대기에 장사지낸 다음, 대사<strong>의</strong> 제자들이 경명왕에게 비를 세워달라고 요청하자, 경명왕이시호를 낭공대사라고 하고, 탑명을 백월서운지탑이라고 하였으며, 최인연(최언위)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도록 하였다고 한다.37) 每 以 宰 相 爲 學 士 者 知 院 事 ( 大 唐 六 典 권9 中 書 省 集 賢 殿 書 院 ).38) 忽 一 日 召 弟 子 曰 吾 將 行 矣 . 夫 乘 緣 而 來 緣 盡 則 去 理 之 常 也 . 何 足 悲 傷 言 訖 跏 趺 而 寂 . 時 大 唐 光 化 元 年 三 月 十 日 也 . 享 年七 十 二 . … 孝 恭 大 王 聞 之 悼 歎 特 贈 諡 曰 了 空 禪 師 名 塔 曰 證 聖 慧 燈 . 門 人 洪 寂 等 懼 先 師 之 景 行 不 傳 啣 涕 奉 表 乞 爲 紀 述 .王 乃 命 瑞 書 學 士 朴 仁 範 爲 碑 文 而 竟 未 鐫 于 石 ( 東 文 選 제117권 碑 銘 , 白 鷄 山 玉 龍 寺 贈 諡 先 覺 國 師 碑 銘 ).- 78 -


<strong>신라</strong> <strong>경문왕·헌강왕대</strong> <strong>한화정책</strong>( 漢 化 政 策 )<strong>의</strong> <strong>추진과</strong> <strong>그</strong> <strong>한계</strong>15따라서 박인범도 최치원 등과 마찬가지로 서서원학사이면서 한림학사를 겸직하였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서서원이 한림대<strong>의</strong> 후신이라면, 굳이 서서원학사와 한림학사를 겸직한다고 밝힐 필요가 없을것이다. 한림학사 또는 서서원학사 가운데 어느 하나에 임명되었다고 서술하는 것이 온당하기 때문이다. <strong>그</strong>러나 사료에서 최치원, 최언위, 박인범이 모두 한림학사이면서 동시에 서서원학사였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림학사와 서서원학사가 소속한 기관이 별개로 존재하였을 때에만 비로소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헌강왕대나 또는 <strong>그</strong> 이전 어느 시기에 한림대, 숭문대(관)이외에 서서원이라는 문한기구를 하나 더 설치하였음이 분명해 보인다.<strong>그</strong>렇다면 언제 서서원을 새로 설치하였을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덕무( 李 德 懋 )<strong>의</strong> 문집 청장관전서( 靑 莊 館 全 書 ) 권68 「한죽당섭필( 寒 竹 堂 涉 筆 )」(상)에 박옹이 헌강왕 7년(881)에 여러 사람이 낭혜화상을 위하여 지은 시를 엮은 증행시( 贈 行 詩 )에 서( 序 )를 붙일 때, <strong>그</strong><strong>의</strong> 관직이 ‘ 侍 讀 翰 林 郞 兼 崇 文臺 瑞 書 院 直 學 士 ’였다고 전하는 사실이 주<strong>의</strong>를 끈다. 39) 「한죽당섭필」은 이덕무가 1781년 1월부터1783년 11월까지 사근도( 沙 斤 道 ) 찰방( 察 訪 )으로 재직할 때에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40) 한편 몽암( 蒙 庵 )이 정조 7년(1783)에 주해한 해운비명주( 海 雲 碑 銘 註 ) 등을 비롯한 여러 사산비명 주해본에는박옹이 ‘ 侍 讀 翰 林 郞 卽 瑞 書 院 直 學 士 薩 湌 ’이라고 전한다. 41) 만약에 헌강왕 7년(881)에 박옹이 숭문대서서원직학사를 제수받았다고 한다면, 학사제도는 적어도 헌강왕 7년 무렵에 도입되었다고 볼 수 있고, 나아가 서서원도 <strong>그</strong> 무렵에 새로 설치하였다고 추정해볼 수도 있다. <strong>그</strong>러나 성주사낭혜화상탑비에 중화( 中 和 ) 원년(881, 헌강왕 7)에 낭혜화상이 궁궐을 떠날 때, 헌강왕이 시독 한림랑 박옹에게 증행시( 贈 行 詩 )에 인( 引 = 序 ?)을 써서 붙이게 하였다고 전할 뿐이고, 박옹이 숭문대 서서원직학사였다는언급은 보이지 않는 점, 사산비명을 주해한 여러 주해본에 숭문대를 생략하고 인용한 점 등을 보건대, 헌강왕 7년에 박옹이 서서원학사였다고 단정하기에는 무엇인가 석연치 않는 측면이 없지 않다.884(헌강왕 10)년 7월까지 김인규<strong>의</strong> 관직이 수한림랑이었던 것으로 보아서 당시까지 한림랑을 한림학사로 개정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박옹이 설혹 숭문대와 서서원직학사에 임명되었다고 하더라도 <strong>그</strong>것은 884년 7월 이후에나 가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박옹<strong>의</strong> 사례를 근거로 서서원<strong>의</strong> 설립 시기를 881년 무렵이라고 주장하기는 곤란할 듯싶다. 서서원<strong>의</strong> 설립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주는 것이 삼국사기 직관지에서 자세한 성격을 알 수 없다고 나열한 관직 가운데 하나로 언급한 서서랑( 瑞 書 郞 )<strong>의</strong> 존재이다. 이것은 한림랑에 대비되는 명칭으로 서서원<strong>의</strong> 관원을 지칭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앞에서 한림랑과 숭문대랑을 884년 7월에서 886년 봄 사이에 학사로 개정하였음을살폈다. 이에 <strong>의</strong>거하여 서서원<strong>의</strong> 경우도 어느 시기까지 <strong>그</strong> 관원을 낭(서서랑)으로 부르다가 884년 7월부터 886년 봄 사이에 <strong>그</strong>것을 학사로 개정하였다는 추론이 가능할 듯싶다. 현재로서 서서원<strong>의</strong> 설39) 新 羅 憲 康 王 召 大 朗 慧 和 尙 將 還 山 . 命 羣 臣 賦 送 歸 之 詩 在 家 弟 子 王 孫 蘇 判 嶷 榮 首 唱 侍 讀 翰 林 郞 兼 崇 文 臺 瑞 書 院 直 學 士 薩飡 朴 邕 製 贈 行 詩 序 曰 …생략…( 靑 莊 館 全 書 권68 「 寒 竹 堂 涉 筆 」 上 ).40) 한국고전번역원에 게시된 한국고전종합DB<strong>의</strong> 한국문집총간, 청장관전서 해제 참조.41) 최영성, 註 解 四 山 碑 銘 , 아세아문화사, 1987, 8~10쪽 및 81쪽; 이우성, <strong>신라</strong>사산비명, 아세아문화사, 1995,186~187쪽.- 79 -


16東 洋 學치 시기를 정확하게 고구할 수 없지만, 헌강왕대에 관명을 한식으로 개정하고, 학사제도를 도입하는등 <strong>한화정책</strong>을 적극 추진하였음을 감안하건대, 헌강왕대 이전으로 소급하기는 곤란하지 않을까 한다.서서원<strong>의</strong> 성격과 관련하여 종래에 왕실도서를 관장하는 기구로 추정한 견해가 제기되어 참고된다. 42) 앞에서 당나라<strong>의</strong> 경우, 학사를 두었던 기구가 한림원, 숭문관, 집현전서원, 홍문관 등이었다고언급하였다. <strong>신라</strong><strong>의</strong> 한림대 및 숭문대는 당<strong>의</strong> 한림원, 숭문관과 관련이 깊다. 문하성( 門 下 省 ) 예하<strong>의</strong>문한기구인 홍문관<strong>의</strong> 학사는 도적( 圖 籍 )을 상정( 詳 正 )하고 학생을 교수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43) 당시 홍문관에는 30인<strong>의</strong> 학생이 수학하였다고 한다. 한편 집현전서원은 당나라에서 처음 설치한 기관으로서 중서성에 속하였다. 집현전서원은 궁궐 내<strong>의</strong> 도서를 수장관리( 收 藏 管 理 )하기 위하여 설치한기관으로서 <strong>그</strong>곳<strong>의</strong> 학사는 고금( 古 今 )<strong>의</strong> 경적( 經 籍 )을 간집( 刊 緝 )함으로써 방국( 邦 國 )<strong>의</strong> 대전( 大 典 )을변명( 辨 明 )할 뿐만 아니라 천자<strong>의</strong> 고문응대( 顧 問 應 對 )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44) 당나라<strong>의</strong> 홍문관과 집현전서원 가운데 명칭상에서 서서원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기관이 후자임을 쉽게 인지할 수 있다.헌강왕이 <strong>한화정책</strong>을 추진할 때에 당나라<strong>의</strong> 집현전서원을 모델로 하여 서서원을 새로 설치하고, 거기에 학사를 두어 궁실<strong>의</strong> 도서를 관장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적<strong>의</strong> 교리나 간집을 맡기고, 국왕<strong>의</strong>고문응대에 대비하도록 하지 않았을까 한다. 서서원<strong>의</strong> 설치는 헌강왕대 문한기구<strong>의</strong>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주목되는데, <strong>그</strong> 배경에 대해서는 <strong>한화정책</strong><strong>의</strong> 추진 및 학사제도<strong>의</strong> 도입 배경과 유기적으로연관시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장을 달리하여 자세하게 검토하도록 하겠다.Ⅲ. <strong>한화정책</strong><strong>의</strong> 추진 배경과 <strong>그</strong> <strong>한계</strong>주지하듯이 경문왕과 헌강왕대 이전 시기, 즉 경덕왕대에 관명과 지명을 한식으로 전면 개정하는조치를 취하였다. 종래에 경덕왕이 <strong>한화정책</strong>을 추진한 이유에 대해서 ‘과거 진골귀족<strong>의</strong> 연합을 부정하고 왕권<strong>의</strong> 전제화를 촉진시키려는 것’, 45) 또는 ‘중대 율령왕권<strong>의</strong> 절대화를 도모한 것’, 46) <strong>그</strong>리고‘관제기구<strong>의</strong> 중앙집권화와 전제왕권<strong>의</strong> 강화를 도모한 것’이라고 47) 설명하였다. 종래에 경덕왕이 중앙집권력<strong>의</strong> 강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관명과 지명을 한식으로 개정하였다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경문왕42) 정구복 등,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4쪽.43) 弘 文 館 學 士 掌 詳 正 圖 籍 敎 授 生 徒 凡 朝 廷 有 制 度 沿 革 禮 儀 輕 重 得 參 議 焉 ( 大 唐 六 典 권8 門 下 省 弘 文 館 學 士 ).44) 集 賢 殿 書 院 學 士 掌 刊 緝 古 今 之 經 籍 以 辨 明 邦 國 之 大 典 而 備 顧 問 應 待 . 凡 天 下 之 圖 書 遺 逸 賢 才 之 隱 滯 則 承 旨 而 徵 求 焉 .其 有 薵 策 之 可 施 於 時 著 述 之 可 行 於 代 者 較 其 才 藝 考 其 學 術 而 申 表 之 . 凡 承 旨 撰 集 文 章 校 理 經 籍 月 從 則 進 課 于 內 歲 終則 考 最 于 外 ( 大 唐 六 典 卷 9 集 賢 殿 書 院 ).45) 이기백, 「<strong>신라</strong> 혜공왕대<strong>의</strong> 정치적 변혁」, <strong>신라</strong>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238~247쪽.46) 井 上 秀 雄 , 「 三 國 史 記 にあらわれた 新 羅 の 中 央 行 政 官 制 について」, 朝 鮮 學 報 51, 1969; 新 羅 史 基 礎 硏 究 , 東 出 版 , 1974,281쪽.47) 木 村 誠 , 「 統 一 新 羅 の 官 僚 制 」, 東 アジア 世 界 における 日 本 古 代 史 講 座 6, 學 生 社 , 1982, 147쪽.- 80 -


<strong>신라</strong> <strong>경문왕·헌강왕대</strong> <strong>한화정책</strong>( 漢 化 政 策 )<strong>의</strong> <strong>추진과</strong> <strong>그</strong> <strong>한계</strong>17과 헌강왕대<strong>의</strong> <strong>한화정책</strong>, 특히 헌강왕대 관명<strong>의</strong> 한식으로<strong>의</strong> 전면 개정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접근할필요가 있을 것이다.경문왕과 헌강왕대 <strong>한화정책</strong>을 추진한 배경을 추적하고자 할 때, 8세기 중반 일본<strong>의</strong> 집권자인 藤原 仲 麻 呂 가 <strong>한화정책</strong>을 추진한 사실이 유<strong>의</strong>된다. <strong>그</strong>는 藤 原 光 明 子 皇 太 后 <strong>의</strong>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중앙정계<strong>의</strong> 막강한 실력자로 부상하고, 758년 8월에 孝 謙 天 皇 이 大 炊 王 ( 淳 仁 天 皇 )에게 양위하자, 이를계기로 전제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strong>그</strong>는 백성들<strong>의</strong> 고통을 덜어주는 여러 가지 위민정책( 爲 民 政 策 ), 즉 인정( 仁 政 )을 행하고, 48) 관명을 당풍으로 개정하였다. 이때 藤 原 仲 麻 呂 는 유교적인 이념을 반영하여 관명을 개정하였는데, 예를 들어 민정( 民 政 )<strong>의</strong> 경우, 인( 仁 )을 베푸는 것이 대사( 大 事 )라고 여겨 민부성( 民 部 省 )을 인부성( 仁 部 省 )으로, 재정을 다루는 관서<strong>의</strong> 경우, 만사절도( 萬 事 節 度 )가필요하므로 대장성( 大 藏 省 )을 절부성( 節 部 省 )으로 개정하는 식이었다. 이밖에 藤 原 仲 麻 呂 가 주도하여孝 謙 天 皇 에게 ‘ 寶 字 稱 德 孝 謙 皇 帝 ’, 光 明 皇 太 后 에게 ‘ 天 平 眞 人 正 皇 太 后 ’라는 중국식<strong>의</strong> 존호( 尊 號 )를 상정( 上 呈 )하고, 淳 仁 天 皇 <strong>의</strong> 아버지 舍 人 親 王 과 聖 武 天 皇 에게는 ‘ 崇 道 盡 敬 皇 帝 ’, ‘ 勝 寶 感 神 聖 武 皇 帝 ’라는중국식<strong>의</strong> 시호( 諡 號 )를 추증( 追 贈 )하였다. 일본학계에서는 대체로 藤 原 仲 麻 呂 가 자신<strong>의</strong>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정권<strong>의</strong> 권위를 높이기 위한 <strong>의</strong>도에서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강조하고 <strong>한화정책</strong>을 추진하였다고이해하고 있다. 49) 764년 9월에 藤 原 仲 麻 呂 가 실각하자, <strong>그</strong>에 <strong>의</strong>해 바뀐 官 名 을 원래대로 환원시켰다.藤 原 仲 麻 呂 <strong>의</strong> 사례에서 주목할 사항은 인정을 행하고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관명을 개정하였다는 사실이다. <strong>한화정책</strong>을 추진한 경문왕과 헌강왕 역시 유학<strong>의</strong> 진흥에 크게 관심을 기울였기때문이다. 숭복사비에 ‘열조( 烈 祖 :태종 무열왕)께서 시서예악( 詩 書 禮 樂 )으로 터를 닦고 선왕(경문왕)이 6경( 經 )으로 풍속을 교화하였다( 是 惟 烈 祖 以 四 術 開 基 先 王 以 六 經 化 俗 )’라는 구절이 보이고, 최치원이 효공왕을 대신하여 찬술한 사은표에 ‘(태사에 추증된 응이) 유도( 儒 道 )를 받들어 오직 노( 魯 )나라에 이르기를 기약하였습니다( 奉 儒 道 而 唯 期 至 魯 )’라는 표현이 보인다. 화엄경사회원문( 華 嚴 經 社會 願 文 )에 50) ‘선왕(헌강왕)께서 극기( 剋 己 )로써 임금 노릇을 하시고, 백성을 보기를 자식같이 여겼으며, … 유도[ 魯 道 ]를 향하여 사통오달( 四 通 五 達 )<strong>의</strong> 큰 길을 열어서 널리 유풍( 儒 風 )을 떨쳤다( 伏 惟 先 王剋 己 爲 君 視 民 如 子 … 闢 康 莊 於 魯 道 廣 振 儒 風 )’고 전한다. 경문왕과 헌강왕이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등에게 경전을 강론케 한 것 역시 유학을 진흥시키려는 <strong>의</strong>도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다가두 임금은 문장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알려졌다. 51)48) 758년에 전국에 民 間 苦 使 를 파견하여 <strong>그</strong>들<strong>의</strong> 上 奏 에 <strong>의</strong>하여 과역을 부담하는 老 丁 (60~65), 耆 老 (65세 이상)<strong>의</strong> 연령을 한 살씩 낮추고, 東 國 防 人 <strong>의</strong> 정지, 租 庸 運 脚 에 대해 식량과 <strong>의</strong>약을 지급하여 농민<strong>의</strong> 요역부담을 줄여주었다.49) 藤 原 仲 麻 呂 가 추진한 <strong>한화정책</strong><strong>의</strong> 내용과 <strong>그</strong> 목적에 대해서 笹 山 晴 生 , 「 奈 良 朝 政 治 の 性 格 」, 岩 波 講 座 日 本 歷 史 3( 古 代 3), 岩 波 書 店 , 1962, 174~180쪽 및 渡 辺 晃 宏 , 平 城 京 と 木 簡 の 世 紀 , 講 談 社 2001, 290~292쪽, <strong>그</strong>리고 이정희, 「 奈 良 朝 藤 原 仲 麻 呂 <strong>의</strong> 亂 에 대하여」, 대구사학 82, 2006, 215~218쪽이 참조된다.50) 華 嚴 寺 事 蹟 에서는 奉 爲 憲 康 大 王 結 華 嚴 經 社 願 文 , 불국사사적에서는 上 宰 國 戚 大 臣 等 奉 爲 憲 康 大 王 結 華 嚴 經 社 願 文 이라고전한다.51) 865년(경문왕 5)에 冊 封 使 로 <strong>신라</strong>에 온 胡 歸 厚 가 <strong>신라</strong>왕(경문왕)이 아름다운 <strong>신라</strong><strong>의</strong> 산수를 詩 로써 묘사한 것을 보고 감탄하였다는 내용이 숭복사비에 서술되어 있다. <strong>그</strong>리고 성주사낭혜화상탑비에서 경문왕이 문학개론서인 文 心- 81 -


18東 洋 學게다가 헌강왕은 중화주<strong>의</strong>적인 인식까지 가졌음이 확인된다. 성주사낭혜화상탑비와 사사조서양함표( 謝 賜 詔 書 兩 函 表 )에서 헌강왕이 중국어를 매우 잘 하였다고 언급하였다. 52) 한편 후자에서 ‘(헌강왕<strong>의</strong>) 말씀[ 身 文 ]은 풍속을 빛냈고, 글[ 心 畫 ]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습니다. 매양 번병( 藩 屛 )<strong>의</strong> 신하인것을 부끄러워하고, 오직 호중( 壺 中 )<strong>의</strong> 객( 客 )을 좇기를 원하였으며, 시가를 읊어 (자신<strong>의</strong>) 뜻을 드러내며 (마음) 깊이 한탄하는 바였습니다’라고 하였는데, 53) 당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이기 때문에문면 <strong>그</strong>대로 믿기 어렵지만, <strong>그</strong>러나 봉암지증대사탑비에 태부대왕(헌강왕)이 화풍으로써 폐풍을 일소하였다고 전하므로 표문<strong>의</strong> 언급이 결코 구두선에 <strong>그</strong>쳤다고 단정하기도 곤란할 듯싶다. 이러한 측면에서 헌강왕대에 단행된 일련<strong>의</strong> <strong>한화정책</strong>은 바로 중화지향적인 헌강왕<strong>의</strong> 개인적 취향에서 비롯된 면도 전혀 없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strong>그</strong>러나 <strong>한화정책</strong><strong>의</strong> <strong>추진과</strong> 헌강왕<strong>의</strong> 개인적 취향을 지나치게강조하여 연결시키는 것은 <strong>그</strong>리 정곡을 찔렀다고 보기 어렵다. <strong>한화정책</strong>을 추진한 경덕왕과 고대 일본<strong>의</strong> 藤 原 仲 麻 呂 등<strong>의</strong> 사례를 염두에 둔다면, 경문왕과 헌강왕이 <strong>한화정책</strong>을 추진한 이유 역시 궁극적으로 유교적 정치이념에 기초하여 국정운영에서 국왕<strong>의</strong>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중앙집권력을 강화하려는 데에 있었다고 봄이 옳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strong>그</strong>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헌강왕이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하려고 <strong>의</strong>도하였다는 점이다. 여기서물론 근본적인 정치개혁이란, 친속( 親 屬 )이나 골품에 <strong>의</strong>거해서가 아니라 54) 학문실력을 고려하여 관리를 등용하는, 즉 유학과 문장에 조예가 깊은 인물을 관리로 등용하는 방향으로 관료제를 운영하는것을 일컫는다. 다음<strong>의</strong> 자료를 살펴보자.등주( 登 州 )<strong>의</strong> 상인 마행여( 馬 行 餘 )가 바다로 돌아 곤산현( 昆 山 縣 )으로 가려고 하다가 동려현( 桐 廬 縣 )을 지날 때에 마침 서풍을 만나 바람을 타고 <strong>신라</strong>국에 도착하였다. <strong>신라</strong>국<strong>의</strong> 임금이 행여가 중국으로부터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빈례( 賓 禮 )로써 접대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비록 이적( 夷 狄 )<strong>의</strong> 나라에 살고 있지만, 해마다 유학을 익히는 자를 천궐( 天 闕 :당<strong>의</strong> 조정)에 천거하여,<strong>그</strong>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영예롭게 귀국하면, 나는 반드시 녹봉을 후하게 주었다. 이에 공자<strong>의</strong>도가 이적과 중화에 널리 퍼졌음을 알았다’고 하였다(운계우<strong>의</strong>( 雲 溪 友 議 ) 권상 <strong>신라</strong>초). 55)雕 龍 을 읽고 낭혜화상과 질<strong>의</strong>응답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치원이 지은 사은표에는 경문왕이 求 賢 才 賦 1 篇 과美 皇 化 詩 六 韻 을 지었다고 전한다. 한편 성주사낭혜화상탑비에 헌강왕이 낭혜화상을 위하여 深 妙 寺 碑 를 찬술하였고, 본래 中 國 말을 잘하여 金 玉 같은 음성으로 뭇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개<strong>의</strong>치 않고 능히 (헌강왕이) 입을 열면 四 六 騈 儷 <strong>의</strong> 어구를 이루어서 평소에 미리 구성해 놓은 것과 같았다는 기록도 전한다.52) 성주사낭혜화상탑비에 太 傅 王 (헌강왕)이 ‘ 雅 善 華 言 ’하였고, 謝 賜 詔 書 兩 函 表 에 ‘ 而 乃 臣 亡 兄 太 傅 臣 晸 生 知 老 敎 雅 善 秦言 ’하였다고 전한다.53) 故 得 身 言 耀 俗 心 畫 超 倫 每 慙 爲 屛 外 之 臣 唯 願 逐 壺 中 之 客 形 于 歌 詠 深 所 歎 嗟 ( 謝 賜 詔 書 兩 函 表 ).54) 통일<strong>신라</strong>기에 친속과 골품을 중시하여 관리를 등용하는 방식으로 관료제를 운영한 사실에 대해서는 전덕재, 「통일<strong>신라</strong> 관인<strong>의</strong> 성격과 관료제 운영」, 역사문화연구 34, 2009가 참조된다.55) 登 州 賈 者 馬 行 餘 轉 海 擬 取 昆 山 路 適 桐 廬 時 遇 西 風 而 吹 到 新 羅 國 . 新 羅 國 君 聞 行 餘 中 國 而 至 接 以 賓 禮 乃 曰 吾 雖 夷 狄 之 邦歲 有 習 儒 者 舉 於 天 闕 登 第 榮 歸 吾 必 祿 之 且 厚 . 乃 知 孔 子 之 道 被 於 華 夏 乎 ( 雲 溪 友 議 卷 上 新 羅 誚 ).한편 판본에 따라 新 羅 誚 를 夷 君 誚 라고 표기한 경우도 발견된다. 해동역사 제40권 교빙지8 표류조에 <strong>신라</strong>초가전하는데, 여기에서 昆 山 을 崙 山 으로, 華 夏 를 夷 華 로 바꾸어 표기하였다, 여기서는 본래 雲 溪 友 議 에서 ‘ 夷 華 ’를- 82 -


<strong>신라</strong> <strong>경문왕·헌강왕대</strong> <strong>한화정책</strong>( 漢 化 政 策 )<strong>의</strong> <strong>추진과</strong> <strong>그</strong> <strong>한계</strong>19운계우<strong>의</strong>는 당나라 희종( 僖 宗 ; 873~888) 때<strong>의</strong> 사람인 范 攄 <strong>의</strong> 문집이다. 따라서 마행여가 <strong>신라</strong>에표착( 漂 着 )한 시기는 870~880년대로 볼 수 있다. 헌강왕은 최치원을 국사( 國 士 )로서 대우하였고, <strong>그</strong>를초빙하기 위하여 김인규와 최서원을 입회남사로 파견하였다. 이와 같이 최치원을 우대한 헌강왕<strong>의</strong>태도를 염두에 둔다면, 빈공과에 급제한 사람이 귀국하면 녹봉을 후하게 주었다고 언급한 <strong>신라</strong> 임금은 875년에서 886년까지 재위한 헌강왕임이 분명해 보인다. 여기서 헌강왕이 빈공과에 급제하고 귀국한 인물에게 후하게 녹봉을 주어 대우하였다고 언급한 사실과 관련하여 한림학사, 서서원학사에게차관급<strong>의</strong> 관직을 제수한 사실이 유<strong>의</strong>된다. 이전에 문한관에게 차관급<strong>의</strong> 관직을 제수한 사실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앞<strong>의</strong> 에서 학사제를 도입하기 이전 시기 문한관이 겸직한 관직을 보면, 추성군태수, 우군대감겸성공( 右 軍 大 監 兼 省 公 ), 56) 춘궁 중사성 중사인, 창부원외랑 등이다. 혜공왕대 설중업(살중업)은 대판관( 大 判 官 )으로 대일본 사신단<strong>의</strong>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57) 우군대감은 하대에 <strong>신라</strong><strong>의</strong> 주력부대로 편성된 삼군( 三 軍 : 中 軍 · 左 軍 · 右 軍 ) 가운데 우군<strong>의</strong> 무관직으로 추정된다. 58) 성공은 선교성이나 중사성<strong>의</strong> 관리로 추정되는데,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에 중사성이 보이므로 같은 자료에 전하는 성공은중사성<strong>의</strong> 관리로 봄이 옳지 않을까 한다. 중사성(세택)에는 대사 8인과 종사지 2인이 근무하였다. 현재까지 전하는 자료에 <strong>의</strong>하면, 884년까지 문한관이면서 차관급에 임명된 인물은 찾을 수 없다. 더욱이 경문왕 3년(863)에 민애왕석탑사리함기를 찬술한 이관( 伊 觀 )은 한림으로 관등이 사간( 沙 干 )이었지만, 성씨가 없는 존재였다. 반면에 884년 7월 이후 한림학사에 임명된 인물들을 살펴보면, 모두 차관급<strong>의</strong> 관직을 제수받은 전력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최치원은 수병부시랑, 박인범은 수예부시랑, 최언위는 수집사시랑과 병부시랑을 제수받은 것이다. 반면에 김원<strong>의</strong> 사례를 참조하건대, 문한기구<strong>의</strong> 직학사는 차관보다 낮은 직급을 배수받은 것으로 추정된다.한편 삼국사기 열전에서 요극일( 姚 克 一 )이 관직에 나아가 ‘ 侍 中 兼 侍 書 學 士 ’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strong>신라</strong>본기에 요극일이 집사부 시중( 侍 中 )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이것은 시랑( 侍 郞 )<strong>의</strong> 오기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59) 아마도 집사부 시랑을 역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시서학사는 국왕<strong>의</strong> 교서나 왕명, 선사( 禪 師 )들<strong>의</strong> 비문 등을 대필( 代 筆 )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요극일은 삼랑사비 및 대안사적인대사탑비,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를 서사한 바 있다. 당시에 명필가로서 명성을 얻었음을 엿보게 해준다. 삼국사기 직관지에 태자시서학사( 太 子 侍 書 學 士 )가 존재하였다고 전하고, 또 최치원이 찬술한 화엄경사회원문에 ‘(성상< 聖 上 :정강왕>께서) 시서중( 侍 書 中 )에‘ 華 夏 ’로 오기하였다고 간주하고 해석하였다.56)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를 찬술한 朴 居 勿 이 ‘ 侍 讀 右 軍 大 監 兼 省 公 ’이라고 전할 뿐, <strong>그</strong>가 한림대 소속이었다는 자료는전하지 않는다. <strong>그</strong>러나 당나라에서 한림원과 집현전서원에 侍 講 學 士 와 侍 讀 學 士 가 존재하였음을 염두에 둔다면, 시독인 박거물은 한림대 소속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57) 續 日 本 紀 권36 光 仁 天 皇 寶 龜 11년 正 月 辛 未 條 .58) 전덕재, 「<strong>신라</strong> 하대 진<strong>의</strong> 설치와 성격」, 군사 35, 1997, 50~51쪽.59) 이기백, 「<strong>신라</strong> 하대<strong>의</strong> 집사성」, <strong>신라</strong>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190쪽.- 83 -


20東 洋 學서 필법이 매우 기묘한 이를 선택하여 화엄경세간정은품제일( 華 嚴 經 世 間 淨 銀 品 第 一 )을 쓰도록 명하시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60) <strong>신라</strong>에서 시서제도를 시행하였음을 알려주는 자료들이다. 한편 당나라에서 명필가로 알려진 유공권( 柳 公 權 )이 한림시서학사( 翰 林 侍 書 學 士 )를 역임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61)이로 보아 <strong>신라</strong><strong>의</strong> 시서학사제는 당<strong>의</strong> <strong>그</strong>것을 수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학사제를 수용한 시기에 한림대<strong>의</strong> 서생을 시서학사로 개정한 것으로 보인다.요극일이 시서학사를 역임하였다고 전하므로 <strong>그</strong>도 역시 한림대 소속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학사제를 수용한 것이 884년 7월 이후이므로 <strong>그</strong>가 시서학사에 임명된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볼 수밖에없다. 헌강왕에 오른 정( 晸 )은 경문왕 6년(866)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요극일은 경문왕 12년(872)에 춘궁 중사성에 재직하고 있었다. 숭문대랑을 겸직한 요극일이 태자를 보좌하며 체계적으로유학과 문학을 교육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헌강왕은 왕위에 오른 다음, <strong>그</strong>러한 인연을 가진 요극일을 집사부(성) 시랑에 제수하였다고 추정되는데, 시서학사를 겸직하였던 것으로 보아서 <strong>그</strong> 시기는884년 7월 이후<strong>의</strong> 헌강왕대가 아닐까 한다.당나라에서 한림학사는 중서성( 中 書 省 )<strong>의</strong> 중서사인( 中 書 舍 人 )과 더불어 왕명을 기초( 起 草 )하고 조칙( 詔 勅 )을 작성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전자를 내제( 內 制 ), 후자를 외제( 外 制 )라고 불렀다. <strong>그</strong>런데 한림학사는 조칙 가운데 가장 중요한 백마( 白 麻 )를 관장하였다. 赦 書 , 德 音 , 立 后 , 建 儲 , 大 誅 討 , 免 三 公宰 相 , 命 將 등<strong>의</strong> 경우는 백마를 사용하여 조칙을 내리되, 천자<strong>의</strong> 인( 印 )이 필요 없었고, <strong>그</strong> 밖<strong>의</strong> 경우는 황마( 黃 麻 )를 사용하여 조칙을 내리되, 천자<strong>의</strong> 인이 필요하였다고 한다. 62) 이처럼 한림학사가천하<strong>의</strong> 중대사( 重 大 事 )에 관한 조칙을 관장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자연히 <strong>그</strong>들이 군국( 軍 國 )<strong>의</strong>大 謀 에 참여하게 되었고, <strong>그</strong>러면서 정치적 역할이 증대되어 한림학사를 내상( 內 相 )이라고 부르는 경우까지 발생하였다. 한림원은 천자 직예( 直 隸 )<strong>의</strong> 문한기구였다. 따라서 한림학사는 천자<strong>의</strong> 사인( 私 人 )으로서 대우받았고, 특히 숙종과 덕종이 황실을 중흥시키고자 황제권<strong>의</strong> 강화를 도모하였을 때에 한림학사<strong>의</strong> 정치적 역할이 크게 증대된 것으로 알려졌다. 63)당나라<strong>의</strong> 한림학사가 천자<strong>의</strong> 사인으로서 국가<strong>의</strong> 중대사에 관여하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사실은 헌강왕이 학사제를 도입한 배경과 관련하여 매우 유<strong>의</strong>된다고 하겠다. <strong>신라</strong><strong>의</strong> 한림대 역시 국왕 직예<strong>의</strong> 문한기구였다. 여기다가 헌강왕은 국왕 직속<strong>의</strong> 또 다른 문한기구로서 서서원을 설치하였다. 즉 문한기구<strong>의</strong> 확대를 도모하였다는 이야기이다. 한림학사는 대체로 서서원학사를 겸임하였다고 추정되는데, <strong>그</strong>들은 당나라<strong>의</strong> 한림학사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왕명을 기초하고 교서를 작성하였60) 上 以 孔 懷 興 詠 銜 悲 於 鴻 雁 行 中 幽 贊 求 慈 注 意 於 狻 猊 座 上 旣 覽 所 奏 嘉 而 許 之 . 仍 擇 侍 書 中 窮 筆 妙 者 命 寫 華 嚴 經 世 間 淨銀 品 第 一 ( 華 嚴 經 社 會 願 文 ).61) 公 權 字 誠 懸 幼 嗜 學 十 二 能 為 辭 賦 . 元 和 初 進 士 擢 第 釋 褐 秘 書 省 校 書 郎 . 李 聽 鎮 夏 州 辟 為 掌 書 記 . 穆 宗 即 位 入 奏 事帝 召 見 謂 公 權 曰 我 於 佛 寺 見 卿 筆 蹟 思 之 久 矣 . 即 日 拜 右 拾 遺 充 翰 林 侍 書 學 士 遷 右 補 闕 司 封 員 外 郎 ( 舊 唐 書 卷 165列 傳 第 115 柳 公 權 ).62) 山 本 義 隆 , 中 國 政 治 制 度 の 硏 究 - 內 閣 制 度 の 起 源 と 發 展 -, 東 洋 史 硏 究 會 , 1968, 252쪽.63) 당나라<strong>의</strong> 학사제도에 대해서는 山 本 義 隆 , 위<strong>의</strong> 책, 227~279쪽이 참조된다.- 84 -


<strong>신라</strong> <strong>경문왕·헌강왕대</strong> <strong>한화정책</strong>( 漢 化 政 策 )<strong>의</strong> <strong>추진과</strong> <strong>그</strong> <strong>한계</strong>21을 뿐만 아니라 국왕<strong>의</strong> 고문응대에 대비하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림학사나 서서원학사는 국왕<strong>의</strong>사인으로 인식되었다고 보이므로 왕권<strong>의</strong> 강화는 바로 이들<strong>의</strong> 정치적 비중을 높이는 것과 함수관계를지녔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학사제<strong>의</strong> 도입 이후에 헌강왕은 한림학사인 요극일 등을 차관급<strong>의</strong> 관직에임용하였다. 헌강왕은 중요한 왕명이나 교서를 기초한 한림학사를 정책을 집행하는 행정관서<strong>의</strong> 차관으로 임명하여 국정운영에서 국왕<strong>의</strong> 영향력을 증대시키려고 <strong>의</strong>도하였을 것이다. 헌강왕이 학사제를도입하고, 서서원을 설치한 배경은 바로 이에서 찾을 수 있겠다.<strong>그</strong>런데 헌강왕이 학사제 도입 이후 중용한 인물이 최치원과 요극일이었다. <strong>그</strong>들은 모두 진골이 아니라 6두품이었다. 현재 두 사례 밖에 찾을 수 없지만, 헌강왕이 빈공과에 급제한 인물을 중용하였음을 감안하건대, 유학과 문장에 조예가 깊은 6두품신분<strong>의</strong> 관리를 더 등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이러한 사실은 앞<strong>의</strong> 및 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헌강왕대에 근시기구나 문한기구<strong>의</strong> 관리에 풍서행( 馮 恕 行 ), 양진방( 楊 晉 方 ), 정순일( 鄭 旬 一 ) 등 두품신분<strong>의</strong> 인물이 임명되고, 헌강왕 11년(885)에 판관( 判 官 ) 서선행( 徐 善 行 )과 녹사( 錄 事 ) 고흥선( 高 興 善 ) 등이 집사성첩( 執 事 省 牒 )을 휴대하고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사실 64) 등을 통하여 보완할 수 있다. <strong>그</strong>러나 최치원이나 요극일을 장관급에임용하지 못한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헌강왕 역시 골품에 따른 관리 임용 규정 자체를 완전 부정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헌강왕이 884년 7월과 886년 봄 사이에 <strong>의</strong>욕적으로 학사제를 도입하여 정치개혁을 추진하려고 하였지만, <strong>그</strong>는 <strong>그</strong>로부터 얼마 안 되는 886년 7월 5일에 사망하였다. 정치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는 시점에 헌강왕이 사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헌강왕을 이어 <strong>그</strong><strong>의</strong> 동생인 정강왕이 즉위하여 형<strong>의</strong>개혁정책을 계승하였다고 추정되나 <strong>그</strong> 역시 즉위 1년만인 887년 7월 5일에 사망하였다. 정강왕<strong>의</strong> 뒤를 이어 진성여왕이 즉위하였는데, 삼국사기 <strong>신라</strong>본기제11 진성여왕 2년조에 ‘왕은 평소 각간 위홍( 魏 弘 )과 정을 통해 왔는데, 이때 이르러서 (<strong>그</strong>가) 늘 궁궐에 들어와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고전하고, 또 <strong>그</strong>가 죽은 후에 ‘아첨하여 임금<strong>의</strong> 총애를 받게 된 사람들이 뜻을 마음대로 펴게 되어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상벌( 賞 罰 )이 공정하지 못하여 나라<strong>의</strong> 기강이 무너지고 해이해졌다’라고전한다. <strong>그</strong>리고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진성여왕( 眞 聖 女 王 ) 거타지조( 居 陁 知 條 )에 진성여왕대에유모 부호부인( 鳧 好 夫 人 )과 <strong>그</strong><strong>의</strong> 남편 위홍잡간( 魏 弘 迊 干 ) 등 서너 명<strong>의</strong> 총신( 寵 臣 )이 권력을 장악하고 정사를 마음대로 처리하였다고 전한다. 두 자료를 종합하건대, 888년(진성여왕 2) 위홍이 죽기 전까지 <strong>그</strong>가 권력을 장악하였고, <strong>그</strong> 후 부호부인과 몇 명<strong>의</strong> 총신이 권력을 장악하여 정사를 어지럽혔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구체적으로 부호부인과 2명<strong>의</strong> 소판( 蘇 判 ), <strong>그</strong>리고 세 명<strong>의</strong> 아간( 阿 干 ), 즉 서너 명<strong>의</strong> 총신이 나라<strong>의</strong> 정사를 어지럽혔다고 밝혔다. 65)64) 日 本 三 代 實 錄 권47 孝 光 天 皇 仁 和 元 年 6월 20일 癸 酉 條 .65) 乃 作 陁 羅 尼 隱 語 書 投 路 上 . … 陁 羅 尼 曰 南 無 亡 國 刹 尼 那 帝 判 尼 判 尼 蘇 判 尼 于 于 三 阿 干 鳧 伊 裟 婆 訶 . 說 者 云 刹 尼那 帝 者 言 女 主 也 判 尼 判 尼 蘇 判 尼 者 言 二 蘇 判 也 < 蘇 判 爵 名 > 于 于 三 阿 干 也 ( 言 三 四 寵 臣 也 ) 鳧 伊 者 言 鳧 好 也 ( 三 國 遺 事 卷 第 2 紀 異 第 2 眞 聖 女 大 王 居 陁 知 ).- 85 -


22東 洋 學위홍은 경문왕<strong>의</strong> 동모제( 同 母 弟 )로서 경문왕대에 상재상( 上 宰 相 )과 병부령( 兵 部 令 )을 역임하였고, 66)헌강왕 즉위 후에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헌강왕대에 왕족으로서 금석문에 전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소판 김일( 金 鎰 )인데, <strong>그</strong>는 무주도독( 武 州 都 督 )을 역임하였다. 67) 이밖에 헌강왕과 정강왕대에 소판 억영( 嶷 營 ), 한찬( 韓 粲 ) 계종( 繼 宗 ), 집사시랑 김팔원( 金 八 元 )과 김관유( 金 寬 柔 ), <strong>그</strong>리고 훈영( 勛 榮 )과 함희( 咸 熙 ), 함웅( 咸 雄 )과 영웅( 英 雄 )도 금석문에 활동상이 전한다. 68) 한편 삼국사기 <strong>신라</strong>본기에서는헌강왕과 정강왕대에 예겸( 乂 謙 )과 민공( 敏 恭 ), 준흥( 俊 興 )이 시중을 역임하였고, 화엄경사회원문에 정강왕대에 서발한( 舒 發 韓 ) 김임보( 金 林 甫 )가 상재상을 역임하였으며, 소판 김일( 金 一 )과 김순헌( 金 順 憲 )이 국척( 國 戚 )으로 중신( 重 臣 )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69) 이들은 모두 진골귀족이었음은 물론이다. 진성여왕대에 위홍과 더불어 이들 가운데 일부가 총신으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정사를 어지럽혔을 것이다.삼국사기 <strong>신라</strong>본기제11 진성여왕 2년조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당시<strong>의</strong> 정치를 거짓으로 비방하는 글을 지어 조정으로 들어가는 길에 붙여 놓았다’라는 기록이 전하는데, 당시에 글을지은 인물로 지목된 자가 바로 문인 왕거인( 王 巨 仁 )이었다. 왕거인은 문인으로 뜻을 얻지 못하여 대야주(경남 합천)에 은거하고 있었다고 한다. 진성여왕대<strong>의</strong> 집권세력이 조정을 비방하는 글을 지은 범인으로 문인 왕거인을 지목한 것에서 헌강왕대에 우대를 받았을 문인이 진성여왕<strong>의</strong> 즉위 이후에 홀대를 받았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서학( 西 學 )하여 얻은 바가 많아 앞으로 자신<strong>의</strong> 뜻을 행하려고 하였으나 (왕조) 말기여서 <strong>의</strong>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않고 태산군 태수로 나갔다’고 한다. 최치원이 893년(진성여왕 7)에 부성군 태수로 재직하였음이 확인되므로 태산군 태수에 임명된 것은 <strong>그</strong>이전인 셈이다. 진성여왕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최치원이 중앙정계에서 밀려 지방관으로 좌천된 것이 아닌가 한다. 왕거인과 최치원<strong>의</strong> 사례를 통하여 진성여왕 즉위 이후 위홍을 비롯한 왕족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헌강왕대에 등용된 관리들을 홀대하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헌강왕이 친속이나 골품을 주요하게 고려하지 않고 유학과 문학에 조예가 깊은, 즉 능력 있는관리를 중용하는 방향으로 관료제 운영을 변화시키려는 정치개혁이 왕족을 비롯한 진골귀족들<strong>의</strong> 강력한 반대로 빛을 보지 못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이상에서 젊은 군주 헌강왕이 추진하려고 하였던 정치개혁은 왕족을 비롯한 진골귀족들<strong>의</strong> 저항에부딪혀 후대에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음을 살펴보았다. <strong>그</strong>런데 헌강왕<strong>의</strong> 정치개혁은 사실 지배체제를 안정시키려는 노력과 병행하여 추진된 것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애초부터 <strong>한계</strong>를 지닐 수밖에66)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에 위홍이 상재상이면서 병부령이었다고 전한다.67) 金 鎰 은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에 관등이 大 奈 麻 로서 松 岳 郡 太 守 로 나오고, 성주사낭혜화상탑비에는 王 孫 으로 관등이 蘇 判 이며, 武 州 都 督 으로 전한다.68) 성주사낭혜화상탑비에 勛 榮 , 蘇 判 嶷 榮 , 執 事 侍 郞 寬 柔 . 浿 江 都 護 咸 雄 , 全 州 別 駕 英 雄 이 왕손으로 전하고, 숭복사비에 繼 宗 과 勛 榮 이 宗 臣 으로, 端 元 과 毓 榮 , 裕 榮 이 宗 室 로 나온다. 이밖에 봉암사지증대사탑비에 韓 粲 繼 宗 , 집사시랑 金 八 元 , 咸 熙 등이 王 孫 으로,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에 김계종, 金 嶷 寧 , 김함희 등이 전한다.69) 粤 有 上 宰 相 舒 發 韓 金 公 林 甫 國 戚 重 臣 蘇 判 金 一 順 憲 等 ( 華 嚴 經 社 會 願 文 ).- 86 -


<strong>신라</strong> <strong>경문왕·헌강왕대</strong> <strong>한화정책</strong>( 漢 化 政 策 )<strong>의</strong> <strong>추진과</strong> <strong>그</strong> <strong>한계</strong>23없었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처용랑 망해사조에 헌강왕대에 ‘동례전( 同 禮 殿 )에서 연회를 베풀 때, 지신( 地 神 )이 나와서 춤을 추며 지리다도파도파( 智 理 多 都 波 都 波 )라고노래를 불렀는데, 이것은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형세를 미리 알고) 많이 도망하여 도읍이장차 파괴된다는 것을 이른다. 곧 지신과 산신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았으므로 춤을 춰 <strong>그</strong>것을경고하였건만, 나라 사람이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 祥 瑞 )가 나타났다고 하여 향락에 너무 심하게 빠졌기 때문에 나라가 마침내 망하였다’고 전한다. 경문왕과 헌강왕대<strong>의</strong> 지배체제가 불안정하였음을 방증해주는 자료이다.경문왕과 헌강왕대에 비록 9세기 전반처럼 농민들이 도적이 되어 봉기하였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홍수와 가뭄 등<strong>의</strong> 자연재해로 흉년이 들거나 전염병이 창궐하는 경우가 여러 번 발생하였다. 70) 이 무렵 수도 금성에서는 귀족들이 매일 향락을 즐겨 밤낮으로 길마다 피리소리와 노래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71) 이러한 상황에서 지배체제를 안정시키려면, 진골귀족<strong>의</strong> 무절제한 생활과 지나친 사적인 기반<strong>의</strong> 확대를 억제시키는 정책과 더불어 농민들<strong>의</strong>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대농민보호정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삼국통일 직후<strong>의</strong> 문무왕대와 8세기 전반 성덕왕대에 이와 같은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지배체제를 안정시키려고 노력한 경험이 있었지만, 72) 유감스럽게도 경문왕대와 헌강왕대에 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강구한 자취를 발견하기 어렵다.이에 따라 헌강왕 사후에 곧바로 <strong>신라</strong><strong>의</strong> 지배체제가 크게 동요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다음<strong>의</strong> 자료를 살펴보자.정강대왕이 선교( 禪 敎 )를 공경하고 숭앙함이 전조( 前 朝 )에 뒤지지 않았다. 누차 왕인( 王 人 )을보내 멀리서 찬양<strong>의</strong> 뜻을 표하였다. 이때 운수가 상란기( 喪 亂 期 )에 당하여 시절이 간난( 艱 難 )하였으며, 왕실<strong>의</strong> 위태롭기가 달걀을 쌓아놓은 것과 같았다. 곳곳에서 연기와 먼지가 일어나니요사스러운 기운이 연비( 蓮 扉 ; 사찰)에까지 미칠까 두려워하였다. (지증대사는) (광계< 光 啓 >) 2년(886)에 상주( 尙 州 )<strong>의</strong> 남쪽으로 피난하여 조령( 鳥 嶺 )에 잠시 머물렀다. 이때를 당하여 본산(사자산 흥령사)이 과연 병화를 만나 귀한 절이 불에 타 버렸다. 대사께서 미리 길흉을 점쳐 함께불타는 재난은 면한 것이다(흥녕사징효대사보인탑비).위<strong>의</strong> 기록을 보면, 886년(정강왕 1) 무렵에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에 위치한 사자산 흥녕사가 도적들<strong>의</strong> 침입으로 불에 타 버렸다고 한다. 정강왕 재위 기간에 지방에서 도적들이 횡행하여 국가<strong>의</strong> 통치체제가 와해되고, 나라가 혼란해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헌강왕이 최치원과 요극일을 등용하여 정치개혁을 추진하려고 <strong>의</strong>도한 바로 <strong>그</strong> 시점과 거<strong>의</strong> 비슷한 때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배체제를70) 경문왕 7년 가을 8월에 홍수가 나서 곡식이 익지 않았고, 10년 가을 7월에 홍수가 났으며, 겨울에 눈이 오지 않아전염병이 돌았다. 12년 가을 8월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고, 13년 봄에 백성들이 굶주리고 전염병이 돌았다.71) 第 四 十 九 憲 康 大 王 之 代 自 京 師 至 於 海 內 比 屋 連 墻 無 一 草 屋 笙 歌 不 絶 道 路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처용랑망해사).72) 전덕재, 한국고대사회경제사, 태학사, 2007, 330~333쪽 및 347~350쪽.- 87 -


24東 洋 學안정시키는 제정책과 병행되지 않은 헌강왕<strong>의</strong> 정치개혁은 애초 지배체제가 급속하게 와해되는 것을일시적으로 늦추는 정도<strong>의</strong> 효과만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고 냉정하게 평가함이 옳을 것이다. <strong>그</strong>런데 진성여왕대<strong>의</strong> 집권세력은 이러한 노력마저 부정하고, 헌강왕대에 중용된 문인들을 홀대하기까지하였다. 결국 진성여왕대 집권세력<strong>의</strong> 실정( 失 政 )은 전국적인 농민항쟁을 불러일으켜 <strong>신라</strong>왕조<strong>의</strong> 멸망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헌강왕 사후에 관명을 다시 본래대로 환원하는 조치를 취하였다는 자취를 찾을 수 없다. 한화는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았고, 이것은 고려왕조에 <strong>그</strong>대로 계승되었다. 889년(진성여왕 3) 전국에서 농민들이 봉기한 이후에 <strong>신라</strong><strong>의</strong> 통치체제가 와해되면서 <strong>신라</strong>왕조에서 정치개혁을 추진하기를기대하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894년(진성여왕 8)에 최치원이 <strong>신라</strong><strong>의</strong> 정치를 개혁하기 위하여 시무 10여조를 바치자 진성여왕이 <strong>그</strong>것을 받아들여 실행하려고 하였지만, 73) 이미 정치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비록 왕족을 비롯한 진골귀족<strong>의</strong> 강력한 반대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strong>그</strong>것을 제대로 실행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고, 이미 실기( 失 期 )한 사실을 깨달은 최치원은 결과적으로 정계를 은퇴하여 해인사에 은거하기에 이르렀지 않았을까 한다. 주지하듯이 헌강왕대에 성장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인들은 고려와 후백제에서 중용되었고, 후삼국 통일 후에 폐쇄적인골품제를 부정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하는 관료제 운영<strong>의</strong> 확립에 있어 커다란 디딤돌이 되었으며, 마침내 <strong>그</strong>들<strong>의</strong> 활발한 활동은 광종대 과거제 실시<strong>의</strong> 중요한 배경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헌강왕이씨를 뿌린 <strong>한화정책</strong>과 정치개혁은 결국 고려왕조에 이르러 결실을 맺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Ⅳ. 맺음말지금까지 본문에서 경문왕과 헌강왕이 추진한 <strong>한화정책</strong><strong>의</strong> 내용과 추진 배경 및 <strong>그</strong> <strong>한계</strong>에 대하여살펴보았다. 본문에서 살핀 내용을 요약 정리하는 것으로서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경문왕대에 근시기구<strong>의</strong> 핵심인 세택을 중사성으로 개정하였고, 헌강왕은 중앙 행정관서<strong>의</strong> 명칭과관직명을 전면 한식으로 개정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나아가 884년(헌강왕 10) 7월에서 886년 봄 사이에 한림대와 숭문대에 학사제를 도입하였으며, <strong>그</strong> 이전에 당나라<strong>의</strong> 집현전서원을 모델로 하여 또다른 문한기구인 서서원을 설치하였다. 경문왕과 헌강왕은 유교적 정치이념에 기초하여 국정운영에서 국왕<strong>의</strong>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중앙집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strong>의</strong>도에서 <strong>한화정책</strong>을 추진하였다고 보이며, 특히 헌강왕은 중요한 왕명이나 교서를 기초한 한림학사 또는 서서원학사를 정책을 집행하는행정관서<strong>의</strong> 차관으로 임명함으로써 국정운영에서 국왕<strong>의</strong> 영향력을 증대시키려고 <strong>의</strong>도하기도 하였다.헌강왕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친속이나 골품에 <strong>의</strong>거해서가 아니라 학문실력을 고려하여 관73) 崔 致 遠 進 時 務 一 十 餘 條 王 嘉 納 之 拜 致 遠 爲 阿 飡 ( 三 國 史 記 新 羅 本 紀 第 11 眞 聖 女 王 8년 봄 2월).- 88 -


<strong>신라</strong> <strong>경문왕·헌강왕대</strong> <strong>한화정책</strong>( 漢 化 政 策 )<strong>의</strong> <strong>추진과</strong> <strong>그</strong> <strong>한계</strong>25리를 등용하는, 즉 유학과 문학에 조예가 깊은 인물을 관리로 중용하는 방향으로 관료제 운영<strong>의</strong> 변화를 꾀하려고 하였다.<strong>그</strong>러나 헌강왕<strong>의</strong> 정치개혁은 <strong>그</strong>것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하던 시점에 <strong>그</strong>가 죽고, 게다가 진성여왕대에 각간 위홍을 비롯한 왕족들이 헌강왕대 중용된 문인들을 홀대하였으며, <strong>그</strong><strong>의</strong> 정치개혁마저부정함으로써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헌강왕<strong>의</strong> 정치개혁은 무너져가던 <strong>신라</strong> 왕조를 기사회생시키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으로 비추어지지만, 지배체제<strong>의</strong> 동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진골귀족들이 <strong>그</strong>들<strong>의</strong>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는 상황에서 <strong>그</strong><strong>의</strong> 정치개혁은 역사<strong>의</strong> 수레바퀴를 되돌리기에 여러 가지 <strong>한계</strong>를 지니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헌강왕<strong>의</strong> 노력은결코 헛된 수고로 끝나지 않았다. 헌강왕 사후 <strong>한화정책</strong>은 대세로 굳어져 고려 정부로 <strong>그</strong>대로 계승되었고, 헌강왕대에 등용되거나 성장한 문인들은 나말여초 전환기를 거쳐 고려왕조에서 중용되었으며, <strong>그</strong>들<strong>의</strong> 활발한 활동은 고려 광종대 과거제 실시<strong>의</strong>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이상이 본문에서 살핀 요지인데, 본고에서 경문왕과 헌강왕대 정치사<strong>의</strong> 흐름 및 정치세력<strong>의</strong> 동향과 유기적으로 연계시켜 <strong>한화정책</strong><strong>의</strong> 추이를 천착하지 못하였고, 지방세력<strong>의</strong> 전반적인 동향에 대한중앙정부<strong>의</strong> 대응과 <strong>한화정책</strong><strong>의</strong> <strong>추진과</strong><strong>의</strong> 상관관계를 살피지 못하였다. <strong>그</strong>리고 관명(관명)을 한식으로개정하면서 기구를 어떻게 개편하였고, 인원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에 대해서도 자료 부족<strong>의</strong> 이유등으로 제대로 검토하지 못하였다. 이밖에 경문왕과 헌강왕대에 추진한 <strong>한화정책</strong>이 <strong>그</strong> 뒤에 어떻게계승되었는가에 대해서 자세하게 천착하지 못하였고, 또한 헌강왕대에 등용되거나 성장한 문인, <strong>그</strong>후계자들<strong>의</strong> 활동상에 대해서도 고찰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본고<strong>의</strong> <strong>한계</strong>는 후에 보완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본고가 9세기 후반 경문왕과 헌강왕대 정치적 상황이나 나말여초 전환기에 대한 이해<strong>의</strong>진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바람이다.남동신, 「나말여초 전환기<strong>의</strong> 지식인 최치원」, 강좌 한국고대사 제8권(고대인<strong>의</strong> 정신세계),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002.이기동 「나말여초 근시기구와 문한기구<strong>의</strong> 확장-중세적 측근정치<strong>의</strong> 지향-」, 역사학보 77, 1978; <strong>신라</strong>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4.이기동, 「<strong>신라</strong> 하대 빈공급제자<strong>의</strong> 출현과 羅 唐 문인<strong>의</strong> 交 驩 -고려 중기 소중화 성립<strong>의</strong> 전사로서-」,전해종박사화갑기념논문집, 일조각, 1979; <strong>신라</strong>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4.이기백, 「<strong>신라</strong> 혜공왕대<strong>의</strong> 정치적 변혁」, <strong>신라</strong>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이문기, 「<strong>신라</strong><strong>의</strong> 문한기구와 문한관」, 역사교육론집 21, 1996.이우성, <strong>신라</strong>사산비명, 아세아문화사, 1995.- 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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