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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인 산문에 있어서 의 의미와 실현양상 得 - 단국대학교 | USER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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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 洋 學 第蚞 40 輯讙 (2006年趄 8 月 ) 檀 國昗 大 學 校旑 東 洋 學 硏煗 究昃 所유몽몽인인 산문문에 있<strong>있어서</strong>自鄻 <strong>得</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미와 <strong>실현양상</strong>金賱 愚 政虪 * 1)< 국문문초록>복고적 문문풍이이 등장장한 16 세기 말~17세기 초는 한국 한문문산문문사에 있<strong>있어서</strong> 전환기적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를 지니고 있있다. 이이른바 古 文著 辭 로도 일컬어지는 복고적 문문풍을을 주도한 이이로 흔히 거론되는 작가가 尹邉 根賚 壽 ‧ 崔 岦 ‧ 柳 夢萬 寅郻 등인인데,이이들은은 치밀하게 정제된 구식과과 艱 險 하고 深 晦한 문문체체,논쟁적이이고 전복적인인 내용을을 담은은 새로운운 산문문을을 창출출함으으로써 글쓰기<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미와 방법에 관관한 진지한 성찰<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기회를 제공공하였다.이이런 이이유로 이이들을을 하나<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유파로묶묶어서 계계열화하는 경향도 있있지만,실제 이이들<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작품을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매우 상이이한방식으으로 구현되었음음을을 확인인하게 된다.유몽몽인인은은 당시 문문단<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경향과과 주요한 산문문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진단을을 통해左諤 傳蘡 ‧國昗 語 ‧戰蘭 國昗 策 ‧史 記贲 ‧漢 書 와 韓 愈 ‧ 柳 宗諒 元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글을을 문문장장 학습<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전범으으로 규정하였다.한편 歐旸 陽 修 와 蘇 軾 으으로 대표되는 宋 代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에 대해서는 弛郎 縵 支譃 離 하고도 하고 郒 夢萬 陽 과과王 世 貞蚇 으으로 대표되는 明菾 代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에 대해서는 模萕 擬邸 와 剽 竊虍 을을 일삼았다고 하여 매우 부정적으으로 평가하였다.유몽몽인인이이 이이와 같은은 산문문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근거이이자 대안으으로 삼았던 것이이 바로自鄻 <strong>得</strong> 인인 바,秦譵 漢 으으로부터 唐 宋 에 이이르기까지 諸蚢 家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을을 폭넓게 학습하여 자기화함으으로써 어떠한 텍스트에도 견견인인되지 않고 천변만화<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변환미를 지닌 글을을 써야 한다는 것이이다. 조선중기 복고적 산문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등장장 원원인인을을 서술할 때 곧잘잘 거론되는 것이이 前蘤 後 七跉 子鄭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수용 문문제인인데, 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경우 전혀 다른 방향에서 복고를 주장장하였던 셈이이다.유몽몽인인은은 또한 自鄻 <strong>得</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창작 원원리를 실제 작품을을 통해서도 철저하게 구현하였다.눈에 띄는 수사적 조탁 없는 평이이하고 담백한 어조 속에 애잔잔한 상실감을을 토로한 「 盆 菊昙 記贲 」,散行 과과 齊蚩 行 이이 적절히 안배되어 신축적이이면서도 자연스러운운 行 文著 속에 현실과과 이이상<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경계계위위에 놓인인 내면<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갈등을을 묘묘사한 「 喚 仙 亭虞 記贲 」,公敶 羊 傳蘡 과과 「 醉趤 翁燳 亭虞 記贲 」 를 절묘묘하게 차용한「 寒 碧 堂 記贲 」, 「 赤蘘 壁 賦 」 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논리적 대비가 돋보이이는 「 無葆 盡譲 亭虞 記贲 」,「 滕 王 閣 序 」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함<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를 운운문문화된 句旪 式 속에 재현한 「 二郅 難赣 軒 記贲 」 등<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글은은 유몽몽인인이이 강조한 自鄻 <strong>得</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창작원원리가 어떠한 방식으으로 실현되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strong>단국대학교</strong>교 한문문교교육과과 강사 / rtoran@dankook.ac.kr-1 -


東 洋 學< 목 차>1. 머리말3. 自鄻 <strong>得</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실현양상</strong>2. 自鄻 <strong>得</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산문문론4. 맺음음말1.머리말문문학<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미와 가치를 성리학<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체체용론적 구조 속에서 파악하려는 태도가 보편화된 宣 祖蛂연간 이이후 富 贍 하고 豪 放 한 사장장파<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풍은은 明菾 白 하고 平蹴 郑 한 사림파<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풍에 그 주류적 지위위를 양보하였다. 그러나 이이 시기를 가리켜 穆萨 陵 盛 世 라는 낭만적인인 수식으으로 언명하듯이이 도본문문말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자장장 속에서는 이이해되기 어려운운 다양한 문문학적 조류들이이 명멸한 때이이기도 했다. 尹邉 根賚 壽 (1537~1616)‧ 崔 岦 (1539~1612)‧柳 夢萬 寅郻 (1559~1623) 등에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해 촉발된 복고적 산문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등장장 역시 이이러한 다양성을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이이른바 古 文著 辭 로도일컬어지는 복고적 산문문은은 치밀하게 정제된 句旪 式 과과 艱 險 하고 深 晦 한 문문체체,논쟁적이이고전복적인인 내용을을 실현함으으로써 글쓰기<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미와 방법에 관관한 진지한 성찰<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기회를 제공공하였다. 이이런 이이유로 이이들을을 하나<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유파 또는 계계열로써 범주화하는 경향도 있있지만,실제 이이들<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작품을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매우 개성적인인 방식으으로 구현되었음음을을 확인인하게 된다. 1) 요컨대, 윤윤근수<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경우 새로운운 문문학 사조-前蘤 後 七跉 子鄭 -를 소개하는 과과정에서<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역할은은 인인정할만하지만 창작상<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실천으으로까지 이이어지지는 않았으으며,최최립은은 이이론보다는 창작<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영역에서 인인상적인인 성취취를 이이루었지만 그 연원원은은 전후칠칠자가 아니라 당송고문문에 있있었다.반면에 유몽몽인인은은 이이론적 측측면에서 볼 때 매우 구체체적이이고 체체계계적인인 견견해를 제시하였을을 뿐만 아니라 창작에 있<strong>있어서</strong>도 적극적으으로 적용하여 실천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유몽몽인인은은 당시 문문단<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경향과과 주요한 산문문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진단을을 통해 左諤 傳蘡‧國昗 語 ‧戰蘭 國昗 策 ‧史 記贲 ‧漢 書 와 韓 愈 ‧ 柳 宗諒 元 등 일곱곱 가지 텍스트를 문문장장 학습<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전범으으로 규정하는 한편 歐旸 陽 修 와 蘇 軾 으으로 대표되는 송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이이나 郒 夢萬 陽 과과 王 世 貞蚇 으으로대표되는 명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에 대해서는 부정적으으로 평가한 독특한 산문문론을을 개진하였다.조선중기 복고적 산문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등장장 원원인인을을 서술할 때 곧잘잘 거론되는 것이이데, 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경우 전혀 다른 방향에서 복고를 주장장하였던 셈이이다.前蘤 後 七跉 子鄭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수용 문문제인인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산문문론은은 그간 적지 않은은 관관심<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대상이이 되어왔는데,대부분 복고를 주장장했다는 표면적 사실을을 반복적으으로 거론하였을을 뿐 그 문문예적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와 창작상<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반영양상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이 사실이이다.이이런 점에서 수사 및 표현상<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특징을을 언급한 몇 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논고 2) 는 주목할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있다고 하겠는데,산문문론과과<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비판적대비를 통한 문문예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검토로 이이어지지 못못한 아쉬움움이이 남는다.본고는 이이와 같은은 문문제<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식을을 바탕으으로 한 것으으로, 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복고적 산문문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근거가 되는 自鄻 <strong>得</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미를 살펴본1) 이이에 관관해서는 金賱 愚 政虪 , 「 月 汀虳 尹邉 根賚 壽 散 文著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性 格 」( 漢 文著 學 論趥 集讛 19 집, 槿賛 域焱 漢 文著 學 會 , 2001) 과과 「 簡 郑 崔 岦 散文著 硏煗 究昃 」( 단국대 박사학위위논문문 , 2004) 참고.2) 역설적 어법과과 우언과과 풍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활용을을 표현수법상<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특징으으로 거론한 申 翼郱 澈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글(「 柳 夢萬 寅郻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文著 學 觀斣 과과 表 現 手法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特踺 徵讜 」, 성균관관대 박사학위위논문문 , 1995) 과과 고문문가로서<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위위상에 주목하여 풍부한 구상력과과 통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틀을을 벗어난 논리성 , 수사<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활용을을 통한 형식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구현 등을을 제시한 宋 知譌 泳熑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글( 「 於 于 柳 夢萬 寅郻 散 文著 硏煗 究昃 」,고려대석사학위위논문문 , 2004) 등이이 있있다.-2 -


유몽몽인인 산문문에 있<strong>있어서</strong> 自鄻 <strong>得</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미와 <strong>실현양상</strong>후, 이이 자득<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원원리가 작품에는 어떤 양상으으로 반영되었는지를 되짚어보고자 한다.2. 自鄻 <strong>得</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산문문론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산문문론은은 전통적인인 산문문 텍스트에 관관한 논<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와 문문장장 학습<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방법,그리고 수사및 문문체체상<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논<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등 세 방면으으로 대별할 수 있있다.이이 세 가지 논<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는 대부분 복합적으으로 제시되고 있있지만,그 중심축에는 전통적인인 산문문 텍스트에 관관한 논<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가 자리잡고 있있다.서계계가 결결승을을 대신한 이이후三 墳 ‧ 五燄 典蘣 ‧ 九旣 丘旡 ‧ 八蹕 索 은은 워워낙 오래 전<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것이이라서 이이미 살펴 볼 수없게 되었습니다 . 부자께서 산삭한 경서야말로 가장장 오래된 글이이라 하겠는데 , 후학들이이 흉내낼 수없겠거니와 자고로 문문장장<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근원원은은 오로지 여기에서 나왔다고 하겠습니다 . 좌구명이이 저술한 좌전과과 국어는 그 글이이 簡 雅 하여 또한 후학이이 쉽게 미칠칠 수 없지만 한 가지 체체격을을 전문문적으으로 닦은은것이이니 문문장장을을 배우는 이이들이이 대부분祖蛂 宗諒 으으로 삼습니다. 3)유몽몽인인은은 육경이이야말로 근원원적 전범이이지만 동시에 어떤 방법으으로도 모방 불가능한 것이이기 때문문에 ‘ 한 가지 체체격을을 전문문적으으로 닦은은’ 좌전이이나 국어<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을을 차선적 전범으으로 선택하게 된다고 보았다.이이처럼 사상적 문문제를 접어두고 오직 창작<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실제적 적용가능성만을을 고려한 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태도야말로 문문장장 학습<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대상으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취취급되던전국책 4) 이이나 장장자까지도 적극적으으로 수용할 수 있있는 근거가 되었다. 車讬 雲 輅(1559~?) 에게 준 글에서, 훈고에 급급하지 않고 육경으으로부터 文著 氣贚 와 邃 見 을을 얻었다고칭칭찬하면서도 좌전‧국어‧사기‧한서 와 한유‧유종원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에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거해 文著 律邓 을을 刻 峻謗 하게 하고 時 宜邵 를 반영한 글을을 짓는다면 불후한 업적을을 이이룰 수 있있을을 것5)이이라고 권권계계한것도 이이런 맥락에서 이이해할 수 있있다.맹자와 상서는 이이치를 따른 것이이므로 비록 사마천<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사기보다 높기는 하지만 그 공공은은 이이루기 쉽습니다 . 한서는 질박하고 신실하므로 비록 사마천<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사기보다 낮지만 배우는 이이들이이잘잘못못되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 국어는 넉넉하고 기이이하므로 말이이 번다하지만 그 지리함을을 느끼지 못못합니다 . 좌전은은 간결결하면서도 상세하므로 말이이 간략하지만 섬세하고 미묘묘한 것을을 놓치지않았습니다 . 장장자는 그 말을을 새롭게 하는데 뛰어나면서도 그 단서를 잘잘 바꾸었으으므로 말이이 중첩하여 드러나 나오면 나올수록 새롭습니다 . 한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글은은 古 意邶 를 훔쳤쳤으으되 지리한 말을을 깎아내고 정수를 뽑아내어 그 절주를 촉급하게 하였으으므로 제대로 배우지 못못하면 宋 文著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無葆 味葢 함에 흐르게 됩3) 柳 夢萬 寅郻 , 「 與焥 尹邉 進譿 士 彬 書 」, 於 于 集讛 前蘤 集讛 권권5; 韓 國昗 文著 集讛 叢 刊 63, p.414.( 이이하 於 于 集讛 을을 인인용할 경우 한국문문집총총간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면수만 표기함) “ 自鄻 夫 書 契 代 結 繩 之謺 後 , 三 墳 五燄 典蘣 九旣 丘旡 八蹕 索 尙 矣邼 , 已郍 不 可 尋 , 降 至譓 夫 子鄭 刪 書 , 其贀 文著 最 古 ,似 非 後 學 可 倣 象 , 而郝 自鄻 古 文著 章酱 之謺 源 , 專蘩 出 於 此讧 . 至譓 左諤 邱昏 明菾 著藽 春 秋 傳蘡 曁 國昗 語 , 其贀 文著 簡 雅 , 亦焯 非 後 學 可 易焳 及賴 , 而郝 爲 其贀 專蘩 於 一鄋體 , 學 之謺 者鄺 多 祖蛂 焉 .”4) 최최립은은 漢 史 列照 傳蘡 抄 를 편찬한 뒤,그 범례에서 周諯 秦譵 이이상<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傳蘡 으으로서 權昴 謀萠 辨 說 이이 많은은 전국책 에서 연유한글은은 배제한다고 밝힌 바 있있다. 崔 岦 , 漢 史 列照 傳蘡 抄 , 「 漢 史 列照 傳蘡 抄 甲 乙邤 丙 集讛 目萦 錄 」 “ 甲 主諨 漢 書 傳蘡 內赾 節虎 約 太踑 史 文著 , 而郝 尤選 利 於 初 學 熟 讀 <strong>得</strong> 力 者鄺 .……其贀 周諯 秦譵 以郆 上 傳蘡 者鄺 , 多 出 戰蘭 國昗 策 , 大 抵藰 權昴 謀萠 辯 說 之謺 文著 , 學 者鄺 宜邵 恥趲 讀 焉 , 是 以郆 裁藡 取 於 漢 爾郕 .”5) 「 報 滄 洲諺 道 士 車讬 萬莺 里 ( 雲 輅 ) 書 」, 前蘤 集讛 권권5, p.418. “ 今賥 尊諍 文著 氣贚 如焜 許 , 邃 見 如焜 許 , 皆 從諓 六 經 中謦 出 來 , 豈贴 比 應邯 擧 者鄺 汲賷 汲賷 訓 誥教中謦 哉藖 , 若 依邲 易焳 ‧ 書 ‧ 左諤 ‧ 國昗 ‧ 馬 ‧ 班蒣 ‧ 韓 ‧ 柳 , 刻 峻謗 其贀 文著 律 , 觸 事 著藽 文著 , 日鄏 添 其贀 編蹭 牘 , 則跅 流 傳蘡 不 朽 , 天 下 無葆 敵蘋 , 不 出 於 半蒙 歲 之謺 功數 , 而郝其贀 爲 後 學 楷 範 何 如焜 耶 , 深 有 望菋 於 左諤 右 也 .”-3 -


東 洋 學니다. 유종원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은은 命菽 意邶 가 분명하고 立鄡 語 가 정밀하므로 말은은 비록 간삽하지만 지취취는 잘잘 펼쳐쳐졌으으니, ( 이이 8 가지는) 문문장장<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첩경으으로 , 배우는 자들은은 살피지 않으으면 안될 것입니다 . 비록 그러하나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리에 돌아가지 않으으면 말이이 촌촌스럽고 본받은은 바가 없어지니 , 반드시 육경에서 그 살점을을 맛보고 선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子鄭 書 에서 힘줄을을 튼 뒤에야 所 見 이이 투명하고 立鄡 言焊 이이 바르게 될 것입니다. 6)유몽몽인인은은 앞서 차운운로에게 준 글에서 제시한 6종<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텍스트에 맹자‧상서를 추가하여모두 8 종<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을을 문문장장 학습<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첩경으으로 언명하면서,육경과과 선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글을을 통해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리를갖추어야 소견견이이 투명하고 입언이이 바르게 될 것이이라고 하였다.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관관점에서 보자면 육경을을 제외한 어떤 텍스트도 그 자체체로 완전하지 않으으므로 필연적으으로 각각<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장장처를 흡수하여 자기화하는 과과정이이 요구되는 것이이다. 사기<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천변만화를 닮았다는 한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문문장장도 이이러한 경지에 오른 대목은은 고작 一鄋 語 一鄋 段 에 그칠칠 뿐, 맹자‧장장자를 ‘ 模萕 樣 ’ 하고 百 家 를 ‘ 雜酚 飾 ’ 했고, 구양수 역시 구우일모에 지나지 않으으며,왕세정은은 麤 厲 險 僻 하며구두만을을 좇았을을 뿐이이다. 7) 심지어 유몽몽인인은은 사기<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연원원은은 노자‧장장자‧좌전에 있있는데도 명산대천에서 얻었다고 속이이고, 한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은은 장장자에서 비롯하였는데도 유가에 거짓 기탁하여 맹자를 배웠웠다고 한다고 하며 결결국 一鄋 家 를 專蘩 門葝 하거나 群星 書 를 抄 略하게 마련이이라고 하였다. 8)한편 「 大 家 文著 會 跋 」 에서는 상서와 장장자 대신 전국책를 추가하여 七跉 大 家 로 규정하고그 문문장장을을 선록한 이이유를 밝힌 바 있있다. 이이에 따르면 전국책 은은 抑 揚 ‧ 闔 捭 가 기굴하고황하가 쏟아져 내리는 듯한 웅웅변을을 갖춰춰 文著 氣贚 를 돕기에 충충분하며,유종원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글은은 精蚂 勁 하면서고 예스럽다고 하면서, ‘ 지나칠칠지언정 부족해서는 안 된다’ 는 문문장장관관을을 피력하였다. 9)이이처럼 유몽몽인인은은 육경 이이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어떤 문문장장도 완벽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문에 비록 부분적인인 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가 있있다 하지라도 그것이이 절대적인인 배척<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이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이다.유몽몽인인은은 송‧ 명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을 가하였다.한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과과 한서를배울울 무무렵을을 회상하며 평생 고문문만을을 읽을을 뿐 송 이이하<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글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10)고 하거나, 심지어 “ 송문문 피하기를 불화살을을 피하듯이이 하였다” 11) 고까지 극렬하게 배척하였다.이이는 물물론 다소 과과장장된 표현임이이 분명하지만 구양수나 소식에 대한 비판을을 보더라도 그 전체체적인인 논조는 바뀌지 않는다.6) 「 與焥 尹邉 進譿 士 ( 彬 ) 書 」, 前蘤 集讛 권권5, p.417. “ 孟菦 子鄭 尙 書 , 順 理 也 , 故 雖 高敟 於 馬 史 , 而郝 其贀 功數 易焳 成 . 漢 書 , 朴蒊 實 也 , 故 下 於 馬 史 ,而郝 學 者鄺 不 病 . 國昗 語 贍 而郝 奇贈 也 , 故 語 繁 而郝 不 覺 其贀 支譃 離 . 左諤 氏 簡 而郝 詳 也 , 故 語 約 而郝 不 遺 纖 微葧 . 莊酶 子鄭 善 新 其贀 語 而郝 善 更 其贀 端 也 ,故 談 鋒 層趬 現 , 愈 出 而郝 愈 新 . 韓 文著 竊虍 古 意邶 , 削 支譃 辭 , 拔 其贀 粹 , 促 其贀 節虎 也 , 故 不 善 於 學 之謺 則跅 流 於 宋 文著 之謺 無葆 味葢 . 柳 文著 命菽 意邶 明菾 ,立 語 精蚂 也 , 故 語 雖 澁 , 而郝 趣 則跅 暢 , 文著 章酱 之謺 捷 徑 也 . 此讧 學 者鄺 不 可 以郆 不 察 也 . 雖 然煑 , 不 歸晄 諸蚢 義邽 理 , 則跅 語 野 而郝 不 法 , 必 於 六 經焉 嚌 其贀 胾 , 先 儒 子鄭 書 焉 決 其贀 肯賽 綮 , 然煑 後 所 見 透踷 而郝 立 言焊 正虲 .”7) 「 與焥 尹邉 進譿 士 彬 書 」, 前蘤 集讛 권권5, p.414. “ 獨 退踱 之謺 頗蹋 有 脫踂 胎踘 處 , 亦焯 一鄋 語 一鄋 段 而郝 止譈 , 善 倫 孟菦 莊酶 爲 模萕 樣 , 而郝 雜酚 以郆 百 氏 錄 飾 之謺 . 歐旸陽 爲 文著 , 亦焯 多 出 於 此讧 , 非 專蘩 於 韓 而郝 能 之謺 者鄺 也 , 然煑 特踺 牛 體 一鄋 毛萗 , 曷 足諊 多 稱跗 也 哉藖 . 至譓 大 明菾 王 世 貞蚇 , 喜 用 其贀 文著 字鄮 , 而郝 麤 厲 險 僻 ,只謻 逐 逐 句旪 讀 間 耳郞 , 屈昤 指譁 歷 代 文著 章酱 碩 儒 , 其贀 <strong>得</strong> 馬 史 體 格 者鄺 有 幾贎 人郳 哉藖 .”8) 「 文著 章酱 指譁 南赧 跋 」, 前蘤 集讛 권권6, p.446. “ 子鄭 長藓 <strong>得</strong> 之謺 老趗 莊酶 左諤 史 , 而郝 誣葍 稱跗 <strong>得</strong> 之謺 名菼 山 大 川 , 退踱 之謺 <strong>得</strong> 之謺 莊酶 子鄭 , 而郝 僞 托跬 儒 家 曰 學 孟菦 子鄭 而郝爲 之謺 . 盖 因郹 天 下 書 無葆 窮昪 , 非 聰 明菾 所 遍蹯 及賴 , 必 須 或 專蘩 門葝 一鄋 家 , 或 略 抄 諸蚢 書 而郝 <strong>得</strong> 功數 居 多 焉 .”9) 「 大 家 文著 會 跋 」, 前蘤 集讛 권권6, p.445. “ 或 曰 : 子鄭 之謺 所 編蹭 則跅 善 矣邼 . 戰蘭 國昗 策 , 語 多 權昴 謀萠 ; 柳 子鄭 文著 好 刻 削 , 類 申 韓 者鄺 流 , 何 取 於斯 ? 曰 : 何 傷 . 昔 孔敹 子鄭 刪 詩 , 不 刪 鄭蚈 衛 風 , 況 戰蘭 國昗 策 抑 揚 闔 捭 崛 奇贈 , 其贀 懸 河 雄 辯 , 足諊 以郆 助蚭 文著 氣贚 . 柳 文著 最 精蚂 勁 且讟 古 , 後 世無葆 沿煊 襲 , 余焘 用 是 竝 錄 焉 . 凡 文著 章酱 寧趋 亢 不 欲 卑 , 寧趋 過斏 不 欲 不 及賴 .”10) 「 答 崔 評蹷 事 ( 有 海 ) 書 」, 後 集讛 권권4, p.554. “ 僕 幼 時 學 韓 文著 漢 書 于 申 濩 氏 , 每菚 勸是 誦 東 人郳 賦 策 百 許 首 . 當 時 僕 志謿 氣贚 衝 斗 牛 ,竊虍 伏 而郝 笑 之謺 , 平蹴 生 只謻 讀 古 文著 , 不 肯賽 掛方 眼 乎 宋 以郆 下 之謺 文著 , 矧 東 賦 乎 , 東 策 乎 .”11) 「 報 滄 洲諺 道 士 車讬 萬莺 里 ( 雲 輅 ) 書 」, 前蘤 集讛 권권5, p.418. “ 若 生 者鄺 , 避 宋 文著 , 如焜 避 火 避 箭蘺 .”-45-


유몽몽인인 산문문에 있<strong>있어서</strong> 自鄻 <strong>得</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미와 <strong>실현양상</strong>세상에서는 구양수<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이이 동파<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보다 뛰어나다고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동파<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은은 古 文著 이이 아니니, 애초부터 文著 字鄮 에 마음음을을 두었던 사람이이 아닙니다 . 스스로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론을을 세워워서 고인인이이 미처 보지 못못한 바를 보고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시원원스럽게 풀어냈는데 , 등한하게 한 말조차도 모두 사람들이이 미칠칠 수 없는 것입니다 . 마치 구름과과 이이내가 산에서 나와 바람부는 대로 휘말렸다 펼쳐쳐지는 것과과 같아 손으으로 잡을을 수도 없고 잡는다한들 허공공이이 되고 말지요.그만한 재주가 없는데도 그 문문장장을을 배우고자 한다면 문문체체가 卑 弱 해지고 말 따름입니다 . 王 弇 州諳 는만년에 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을을 좋아하여 가신이이 배웠웠던 것을을 모두 버리고 그를 배웠웠습니다 . 이이로부터 문문체체가날로 낮아져서 자못못 예전<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작품만도 못못하게 되었으으니 , 이이는 陳讂 相 이이 墨葑 子鄭 를 배운운 것이이 불과과한 것으으로 슬퍼할 만 합니다.나는 어렸을을 때 소동파<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글을을 낮잡아보아 일찍이이 한 번도 쳐쳐다보지 않았는데, 그것을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朱諶 子鄭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논변과과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리가 평탄하고 명백함이이 동파<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글과과 비슷하며 지리함 또한 비슷함을을 알았습니다 . 처음음에는 주자가 소동파<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학문문을을 힘껏 배척하였는데어째서 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글을을 본받았을을까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심하기도 했었습니다 . 아마도 비슷한 시대에 태어나 氣贚 味葢 가 서로유사해서 그런 것이이겠지요 . 大 明菾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사들은은 宋 文著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弛郎 縵 함에 대해서 징계계함이이 있있었으으니 , 空斁 同 이이 좌전과과 국어에서 선창하고 弇 州諳 가 兩 漢 에서 뒤를 이이었습니다 . 宋 元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퇴미한 물물결결을을 일거에 씻어내려고 한 것이이었지만 오직 문문장장에만 뛰어날 뿐 이이치에는 짧았으으니 , 과과연 足諊 下 가 말한 바와 같습니다. 나는 宋 文著 을을 낮잡아보되 구양수<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을을 업신여김이이 더욱 심하여 마침내 사람들이이 모여있있는 가운운데에서 소리 높여 “ 구양수<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은은 나<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만 못못하다” 고 하였는데 , 이이 말을을 들은은 사람들이이 크게 놀랐습니다 . 그러나 雙 泉 成 汝焠 學 만은은 “ 옛날에 나<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벗인인 崔 仁郴 範 이이 늘 말하기를 ‘ 구양수<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이이 나<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만 못못하다’ 고 하였는데 , 그대도 이이와 같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 崔 子鄭 는 문문장장과과 시가 모두 예스러웠웠는데 ,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을 떠났습니다 . 저 최최자도 오히려 가볍게 여겼거늘 하물물며 최최자가 아닌 사람임에게 있<strong>있어서</strong>이이겠습니까. 12)유몽몽인인은은 구양수<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이이 한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보다 뛰어나다고 한 최최립<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말을을 듣고 본집을을 구해 읽어봤으으나 弛郎 縵 하여 깊은은 맛이이 없었으으며 읽을을 때마다 졸음음이이 났다13)고 술회한 바있있다. 위위 글은은 다음음에 이이어지는 부분인인데,소식<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이이 구양수보다 낫다고 평가하면서도 고문문이이 아니라고 본 견견해가 흥미롭다. 소식은은 ‘ 문문자에 뜻을을 두지 않은은 사람’ 으으로 ‘ 입에서 나오는 대로 시원원스럽게 풀어낸’것일 뿐이이라는 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주장장은은 소식이이 일상언어와 구별되는 문문학언어<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학성을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말과과 상통한다.때문문에 소식<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은은 한유나 유종원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에서 보이이는 텍스트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존성으으로부터는 비교교적 자유로웠웠지만결결과과적으으로 平蹴 郑 ‧ 明菾 白 ‧ 支譃 離 한 문문체체로 귀결결되었다고 평가한 것이이다.한편 이이몽몽양과과 왕세정은은 이이와 같은은 송문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弛郎 縵 함을을 극복하고자 진한<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고문문을을 전범으으로 삼을을 것을을 주창했지만 ‘ 문문장장만 뛰어날 뿐 이이치는 짧은은’ 한계계를 노출출했다고 판단했다.한유가 맹자와 장장자를배웠웠지만 그에 미치지 못못하였고, 구양수가 한유를 배웠웠지만 그에 미치지 못못하였다며,맹12) 「 答 崔 評蹷 事 ( 有 海 ) 書 」, 後 集讛 권권4, p.554. “ 世 稱跗 歐旸 陽 文著 高敟 於 東 坡踼 文著 , 余焘 以郆 爲 大 不 然煑 . 坡踼 文著 非 古 文著 也 , 初 非 有 心 於 文著 字鄮者鄺 . 自鄻 立 論 議郃 , 見 古 人郳 所 未葨 見 , 隨 口早 快跘 辨 之謺 , 等 閒 之謺 說 , 皆 人郳 所 不 及賴 . 如焜 雲 烟煐 出 山 , 隨 風 卷昰 舒 , 不 可 以郆 手 攬 之謺 , 攬 之謺 則跅爲 空斁 虛 . 未葨 有 其贀 才藙 而郝 欲 學 其贀 文著 , 文著 體 卑 弱 而郝 止譈 . 王 弇 州諳 晩莴 好 其贀 文著 , 盡譲 棄贗 其贀 學 而郝 學 焉 . 自鄻 是 文著 體 趨 下 , 殊 不 及賴 舊昈 作酂 , 是 不過斏 陳讂 相 之謺 學 墨葑 , 可 哀 也 . 僕 少 時 卑 蘇 文著 , 不 曾謱 一鄋 覰 , 及賴 <strong>得</strong> 觀斣 之謺 , 始 知譌 朱諶 子鄭 之謺 文著 , 論 辨 義邽 理 , 平蹴 坦跹 明菾 白 , 與焥 坡踼 文著 相 似 , 支譃離 亦焯 似 之謺 . 始 疑邻 朱諶 子鄭 力 排 蘇 學 , 何 嘗 效 其贀 文著 哉藖 , 蓋 生 近賢 代 氣贚 味葢 相 類 故 也 . 大 明菾 文著 士 有 徵讜 於 宋 文著 之謺 弛郎 縵 , 空斁 同 先 倡 於 左諤國昗 , 弇 州諳 繼 武葄 於 兩 漢 . 意邶 欲 一鄋 振譤 宋 元 之謺 頹踲 瀾 , 惟 其贀 長藓 於 文著 短 於 理 , 果斈 如焜 足諊 下 之謺 所 云 也 . 僕 卑 宋 文著 而郝 傲燇 歐旸 文著 甚 , 遂 揚 言焊 于廣斯 衆謨 之謺 中謦 曰 : 歐旸 文著 不 如焜 吾燉 文著 , 聞葛 者鄺 大 駭 . 獨 雙 泉 成 汝焠 學 曰 : 昔 吾燉 友 崔 仁郴 範 常 曰 , 歐旸 文著 不 如焜 吾燉 文著 , 子鄭 又 如焜 之謺 . 崔 子鄭 文著 與焥 詩俱日 古 , 不 幸 早蚳 世 . 彼 崔 子鄭 猶 輕 之謺 , 况 非 崔 子鄭 者鄺 乎 .”13) 상게문문. “ 當 世 言焊 文著 章酱 者鄺 , 多 稱跗 崔 東 皐敌 立 之謺 . 東 皐敌 偏蹩 好 歐旸 陽 文著 , 謂 勝 於 韓 文著 , 余焘 樂 之謺 , 力 求旻 諸蚢 中謦 朝蚷 , <strong>得</strong> 本 集讛 熟 觀斣 之謺 , 其贀文著 弛郎 縵 無葆 深 味葢 . 一鄋 讀 之謺 , 便蹨 令 人郳 厭煱 , 每菚 見 其贀 書 , 輒 伸 欠 而郝 思 睡 矣邼 .”-6 -


東 洋 學자‧ 장장자가 배운운 바를 배운운다면 맹자‧ 장장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수준에 도달할 수 있있다14)고 한 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주장장은은 얼핏 전후칠칠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복고론과과 닮아있있다.그러나 유몽몽인인은은 복고파<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실착 역시 인인식하고있있었다. 유몽몽인인은은 이이몽몽양과과 왕세정이이 복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기치를 내세우게 된 원원인인이이 송문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弛郎 縵 支譃離 함에 있있었다는 점은은 긍정하면서도 결결국 제자서를 모방하는 수준에 머무무르고 말았다고평가하였다.내가 보건대 明菾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가들은은 宋 儒 가 한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을을 전적으으로 숭상하였으으면서도 그 奇贈 簡 한 점을을얻지 못못하고 단지 弛郎 縵 支譃 離 한 말단만을을 배우고,이이를 바탕으으로 箋蘹 註謆 文著 字鄮 를 도와 사람들이이 알기 쉽게 한 것을을 경계계하였다 . 그러므로 좌전과과 사기를 위위주로 하기도 하고 여력이이 있있으으면 先 秦譵 諸蚢 子鄭書 를 배우기도 했지만 구구절절 구두를 剽 掠 하였으으니 , 왕세정이이 으으뜸이이고 이이몽몽양이이 다음음이이다 . 이이몽몽양<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은은 왕세정보다 더욱 예스러우니 또한 진한고문문을을 선창할만하였지만 , 단지 語 辭 가 追 蠡 하여 小 家 에 가깝다. 그러므로 마땅히 왕세정<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浩 大 함만 못못하다.汪 道 昆敫 에 이이르러서는 단지 句旪 語 를뒤쫓거나 선진양한에서 약간<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자를 훔쳐쳐와 중첩하여 써냈다. 15)여기에서 확인인할 수 있있듯이이 유몽몽인인은은 弛郎 縵 支譃 離 와 대척적인인 지점에 놓인인 奇贈 簡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체체를특징으으로 하는 고문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체체식을을 획득하기 위위한 전범적 산문문 텍스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존재를 인인정하고 있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인인정한 산문문 텍스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범위위는 과과연 어디까지인인가? 앞서 살펴본 「 報滄 洲諺 道 士 車讬 萬莺 里 ( 雲 輅 ) 書 」 나 「 與焥 尹邉 進譿 士 ( 彬 ) 書 」‧「 大 家 文著 會 跋 」 등에 따른다면 상서‧좌전‧국어‧전국책‧사기‧한서 와 한유‧유종원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 등 모두 9종<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텍스트 정도가 여기에해당된다고 할 수 있있겠는데, 반드시 여기에 국한되는 것만은은 아니다. 이이 점은은 「 與焥 尹邉 進譿 士( 彬 ) 書 」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말미에서 “ 擧 子鄭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학업을을 그만두고 십 년을을 기약하고 앞서 진술한 책들을을 각각 수백 번씩 먼저 읽은은 뒤에 아래로 구양수와 소식, 明菾 朝蚷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대가들에까지 미친친다면 작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영역에 올라 고인인들과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있을을 것” 16) 이이라고 충충고한 대목에서 확인인할 수 있있다.요컨대 유몽몽인인은은 진한과과 당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을을 우선적인인 문문장장 학습 텍스트로 규정하였지만 송‧명<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 역시 그 목록에서 완전히 제외시키지는 않았다는 점이이다.이이런점에서 송 이이하<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글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고 하거나,송문문 피하기를 불화살을을 피하듯이이하였다고 한 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술회는 문문장장 학습<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대상과과 내용을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위위한 수사이이기도 했던 셈이이다.이이처럼 전범적 산문문 텍스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존재를 긍정하는 태도는 필연적으으로 모방이이나 표절로 흐를위위험성을을 안고 있있게 마련이이다.하지만 유몽몽인인은은 이이런 텍스트에 대한 광광범위위한 독서와 지속적인인 연찬 17) 을을 강조하면서도 그 최최종적 목표를에 도달하고자 했다.自鄻 <strong>得</strong> 에 둠으으로써 진정한 고문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경계계14) 「 答 成 察 訪 ( 以郆 敏葹 ) 書 」, 前蘤 集讛 권권5, p.410. “ 韓 學 孟菦 ‧ 莊酶 , 不 逮 孟菦 ‧ 莊酶 , 歐旸 學 韓 不 逮 韓 . 今賥 之謺 學 歐旸 取 壯酠 元 者鄺 如焜 吾燉 友 金賱 壽 賢 ,雖 不 及賴 歐旸 , 溯 其贀 源 , 實 出 孟菦 ‧ 莊酶 , 金賱 之謺 去 孟菦 ‧ 莊酶 , 不 亦焯 遠 乎 , 中謦 國昗 之謺 小 我 東 , 職譠 此讧 然煑 也 , 生 之謺 志謿 , 直譜 欲 學 孟菦 ‧ 莊酶 所 學 者鄺 而郝 已郍 ,學 孟菦 ‧ 莊酶 所 學 而郝 不 逮 , 則跅 猶 爲 孟菦 ‧ 莊酶 , 其贀 不 愈 於 學 韓 ‧ 歐旸 不 逮 而郝 爲 東 文著 如焜 壽 賢 者鄺 乎 .”15) 「 題蚨 汪 ( 道 昆敫 ) 遊 城 陽 山 記贲 後 」, 後 集讛 권권4, p.556. “ 余焘 觀斣 大 明菾 文著 章酱 之謺 士 , 有 懲讝 宋 儒 , 專蘩 尙 韓 文著 , 而郝 不 能 <strong>得</strong> 其贀 奇贈 簡 處 , 徒學 弛郎 縵 支譃 離 之謺 末菂 , 資酀 之謺 以郆 助蚭 箋蘹 註謆 文著 字鄮 , 使 人郳 易焳 曉 也 . 故 或 主諨 左諤 氏 史 記贲 , 餘焫 力 先 秦譵 諸蚢 氏 , 寸 寸 尺 尺 , 剽 掠 句旪 讀 , 王 弇 州諳 爲上 , 李 空斁 同 次讦 之謺 . 空斁 同 之謺 文著 , 益郮 古 於 弇 州諳 , 又 能 先 倡 秦譵 漢 古 文著 , 而郝 但 語 辭 追 蠡 , 近賢 於 小 家 , 故 當 讓 弇 州諳 之謺 浩 大 . 至譓 於 汪氏 , 徒 逐 逐 句旪 語 , 竊虍 若 干 文著 字鄮 於 先 秦譵 兩 漢 , 重謩 用 疊 出 .”16) 「 與焥 尹邉 進譿 士 ( 彬 ) 書 」, 前蘤 集讛 권권5, p.417. “ 苟昉 能 廢蹻 擧 子鄭 業焕 , 期贔 十 年趄 先 讀 前蘤 所 陳讂 之謺 書 各 數 百 遍蹯 , 而郝 後 下 逮 歐旸 蘇 明菾 朝蚷 大 家 ,可 以郆 登 作酂 者鄺 之謺 壇 , 與焥 古 人郳 齊蚩 肩 矣邼 .”17) 상게문문. “ 大 抵藰 文著 章酱 之謺 就 , 徒 博蒆 則跅 無葆 效 , 徒 約 則跅 不 周諯 . 必 須 遍蹯 讀 群星 書 , 專蘩 功數 一鄋 帙讈 , 功數 積蘐 而郝 後 有 就 .”-7 -


유몽몽인인 산문문에 있<strong>있어서</strong> 自鄻 <strong>得</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미와 <strong>실현양상</strong>宋 儒 가 여러 경전을을 주해한 것은은 단지 은은미한 뜻을을 발휘하여 후학을을 인인도하고자 해서였지 후학이이 그것 읽기를 本 經 읽듯 하게 하고자 했던 것은은 아닙니다 . 옛날董 仲謧 舒 ‧ 楊 雄 ‧ 王 文著 仲謧 ‧ 周諯 濂 溪 ‧ 程蚀子鄭 ‧ 朱諶 子鄭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여러 傳蘡 들이이 어찌 훈고에 종사한 적이이 있있었습니까 . 다만 사서와 육경에 근거하여 自鄻 悟燑自鄻 <strong>得</strong> 하였을을 뿐입니다 . 오늘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학자들은은 이이것을을 사양하고 저것을을 우선하니 , 斯 文著 이이 날로 낮아지게된 것입니다 . 동방<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은은 牧营 隱那 이이 최최고입니다만 목은은은은 중국에서 급제한 선비입니다 . 그 크고 작은은 여러 작품들은은 모두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리에 귀결결되니 , 그 辭 語 가 비록 실제로 근거한 바가 많기는 하지만 모두科斊 程蚀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법식에서 나온 것인인지라 , 저는 저으으기 그것을을 비웃웃습니다 . 대개 문문장장은은 前蘤 作酂 을을 沿煊 襲 하지 않는 것을을 귀하게 여기니, 자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흉중에 쌓인인 바가 도<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근원원에서 自鄻 <strong>得</strong> 한 것이이라면 구구한 沿煊 襲 은은쓸모 없을을 것이이니, 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많고 적음음을을 또한 어찌 논하겠습니까 . 18)이이른바 주소어록체체<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폐단을을 지적한 글이이다.경전을을 주해한 제현<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저서는 훈고를 일삼아 완성된 것이이 아니라 사서와 육경을을 근거로‘ 自鄻 悟燑 自鄻 <strong>得</strong> ’ 한 것일 뿐이이라고 하며 본말이이전도된 학풍을을 꼬집고 있있다. 여기에서 말한 ‘ 自鄻 悟燑 自鄻 <strong>得</strong> ’ 은은 엄밀히 말해 문문학과과 직접적으으로관관련된 표현이이라고 할 수 없다.하지만 문문학<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뿌리를 육경에 둔 이이상 필연적으으로 사상또는 철학과과 분리될 수 없음음을을 감안한다면 문문학적인인 전용이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때문문에 유몽몽인인은은 이이 두 가지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고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리에 귀결결한 郒 穡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도 科斊 程蚀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법식을을 탈피하지 못못하였다고 지적하며 문문장장에 있<strong>있어서</strong> 자득<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필요성을을 강조하였던 것이이다.나는 구석진 나라에서 태어나 高敟 士 와 碩 友 를 만나지 못못하고 좀 먹고 먼지 앉은은 簡 編蹭 속에서 自鄻<strong>得</strong> 하였다. 어려서부터 늙을을 때까지 구양수나 소식 등<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으으로 눈을을 흐리지 않았었는데 , 근세에明菾 朝蚷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대가들이이 절<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지키기를 매우 높이이 하는 것을을 볼 때마다 자못못 스스로를 견견주어 봄에 부족하여 어렸을을 때 한유‧유종원원 두 책을을 잘잘못못 읽었음음이이 못못내 한스러웠웠다 . 지금부터라도 후학과과 아이이들에게 先 秦譵 으으로부터 唐 虞 로 거슬러 올라가고 漢 으으로 내려와서는 司 馬 遷 과과 司 馬 相 如焜 에게서 그치는것으으로 그 성취취가 어떠한지를 시험하고자 한다. 杜 子鄭 가 말하기를 , ‘ 五燄 岳 밖에도 존귀한 다른 산이이있있음음을을 알았다’ 고 하였으으니 , 중국<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밖에도 좌전이이나 사기못못지 않게 고고한 문문장장이이 있있을을 줄어찌 알랴. 19)선진<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전적을을 직접적인인 목표로 삼았던 명<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가들을을 접하며 송문문을을 읽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만 알았을을 뿐,한유나 유종원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 또한 절대적인인 준거가 아니었음음을을 모르고학습했던 자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경로를 반성적으으로 돌아본 글이이다.궁궁벽한 곳곳에서 태어나 훌륭한 스승이이나 뛰어난 벗 없이이 문문장장<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묘묘리를 자득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운지를 토로 20) 했던 유몽몽인인은은 이이처럼 때로는 그 자신이이 문문장장 학습<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텍스트로 인인정한 한유나 유종원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마저도18) 「 報 滄 洲諺 道 士 車讬 萬莺 里 ( 雲 輅 ) 書 」, 前蘤 集讛 권권5, p.418. “ 宋 儒 之謺 註謆 解 諸蚢 經 , 只謻 欲 發 揮 微葧 旨譄 , 以郆 牖 後 學 耳郞 , 非 欲 後 學 讀 之謺 如焜本 經 也 . 昔 董 仲謧 舒 ‧ 楊 雄 ‧ 王 文著 仲謧 ‧ 周諯 濂 溪 ‧ 程蚀 ‧ 朱諶 諸蚢 傳蘡 , 何 嘗 從諓 事 於 訓 詁 ? 只謻 據 四 書 六 經 , 自鄻 悟燑 自鄻 <strong>得</strong> 而郝 已郍 . 今賥 之謺 學 者鄺 謝 此讧 先彼 , 斯 文著 所 以郆 日鄏 卑 也 . 東 方 之謺 文著 , 牧营 隱那 爲 最 . 牧营 隱那 , 中謦 朝蚷 科斊 擧 之謺 士 也 . 其贀 大 小 諸蚢 作酂 , 皆 歸晄 之謺 義邽 理 , 其贀 辭 雖 甚 實 多 所 根賚 據 ,而郝 皆 出 於 科斊 程蚀 之謺 式 , 生 竊虍 笑 之謺 . 凡 文著 章酱 晅貴 不 沿煊 襲 前蘤 作酂 , 吾燉 胸 中謦 所 儲藬 , 自鄻 <strong>得</strong> 於 道 原 , 則跅 區旨 區旨 沿煊 襲 , 不 足諊 多 也 , 話 言焊 之謺 多 少 ,又 何 論 哉藖 !”19) 「 題蚨 汪 道 昆敫 副 墨葑 」, 前蘤 集讛 권권6, p.443. “ 余焘 則跅 生 此讧 偏蹩 邦 , 不 遇 高敟 士 碩 友 , 自鄻 <strong>得</strong> 於 蠹 簡 塵譣 編蹭 中謦 . 自鄻 幼 抵藰 老 , 義邽 不 以郆 歐旸 蘇 等文著 溷 眼 . 自鄻 幼 抵藰 老 , 義邽 不 以郆 歐旸 蘇 等 文著 溷 眼 , 每菚 見 近賢 世 明菾 朝蚷 大 家 守 節虎 甚 抗 , 頗蹋 自鄻 視 缺 然煑 , 深 恨 少 年趄 時 誤營 讀 韓 柳 兩 書 也 . 繼自鄻 今賥 欲 勸是 後 學 兒 曺蚵 先 秦譵 而郝 溯 唐 虞 , 下 漢 而郝 止譈 於 兩 馬 , 以郆 試 其贀 成 就 如焜 何 . 杜 子鄭 曰 : ‘ 乃赼 知譌 五燄 岳 外 , 別 有 他跙 山 尊諍 ’, 安 知譌 中謦 國昗之謺 外 , 有 高敟 古 之謺 文著 章酱 , 不 下 於 左諤 馬 者鄺 乎 ?”20) 「 與焥 尹邉 進譿 士 ( 彬 ) 書 」, 前蘤 集讛 권권5, p.417. “ 窮昪 鄕 僻 村 , 無葆 碩 師 良 友 , 而郝 自鄻 <strong>得</strong> 其贀 竗萸 者鄺 , 未葨 之謺 嘗 聞葛 . 雖 自鄻 曰 <strong>得</strong> 其贀 妙萱 , 而郝 識 者鄺 竊虍嗤趯 之謺 .”-8 -


東 洋 學부정할 만큼 자득을을 중시하였다. “ 문문장장만큼은은 고인인에 뒤지지 않는다” 21) 고 자부할만큼 적극적인인 산문문 인인식을을 지녔던 유몽몽인인에게 있<strong>있어서</strong> 이이 자득<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경계계는 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복고적 산문문론이이모방이이나 표절로 흐르지 않고 장장르적 관관습을을 넘나들며 신축적이이며 유연한 작품세계계를 실현할 수 있있도록 해준 창작<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핵심 원원리이이자 원원칙이이었던 것이이다.3. 自鄻 <strong>得</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실현양상</strong>유몽몽인인은은 광광해군군<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복위위 음음모에 가담했다는 무무함으으로 사형당한 뒤 200여년이이 지난1794 년에야 신원원되었으으며, 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집도 1832 년에야 간행될 수 있있었다.조선후기 제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비평목록에서 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이이름을을 발견견하기가 쉽지 않은은 데에는 이이런 점도 원원인인이이 되었다고 할수 있있겠는데, 아래에 인인용한 「 盆 菊昙 記贲 」 는 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으으로서는 드물물게 시문문선집에 선록된 몇 안 되는 작품 가운운데 하나이이다. 22)余焘 性 不 喜 俗 . 俗 多 好 花 草 , 又 以郆 菊昙 爲 淵煍 明菾 所 好 , 戶 種諙 之謺 益郮 繁 , 輿焨 儓 之謺 家 , 無葆 不 燦讷 耀 成 林 . 余焘 甚 笑 之謺 , 蓋 惡人郳 之謺 好 之謺 , 順 人郳 而郝 應邯 俗 也 . 去 年趄 , 余焘 出 外 家 , 僮 種諙 菊昙 於 墻酟 罅 , 余焘 不 拔 之謺 , 何 以郆 不 于 地謽 而郝 于 墻酟 , 不 循 俗 也 . 洎余焘 如焜 中謦 原 , 士 有 遺 余焘 蘭 者鄺 . 余焘 謂 蘭 我 國昗 無葆 之謺 , 自鄻 北 京 輿焨 來 王 京 , 道 上 傷 凍 春 不 芽 . 其贀 畵 盆 欲 盛 水 乎 , 底藯 有 穴欲 蒸謷 飯 乎 , 曾謱 經 糞 土踤 等 棄贗 之謺 , 屬 家 童 求旻 之謺 , 隣 之謺 醫郄 人郳 , 蒔 白 菊昙 . 古 書 菊昙 稱跗 黃 華 , 則跅 白 菊昙 非 菊昙 , 余焘 尤 惡 其贀 僞 ,而郝 猶 任鄔 家 童 爲 也 . 吁 , 居 俗 而郝 不 俗 老 尤 難赣 , 余焘 從諓 此讧 稍 學 俗 矣邼 . 將酢 種諙 竹謐 矣邼 , 又 將酢 種諙 梅菙 矣邼 , 悲 乎 吾燉 衰 也 . 23)나는 본디 시속을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속에서는 대부분 화초를 좋아하는데 , 또 국화는 도연명이이좋아했던 것이이라 하여 집집마다 심어서 더욱 번성하며 , 천한 사람<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집에도 찬란하게 숲을을 이이루지않음음이이 없었다. 나는 이이를 매우 비웃웃었으으니 , 사람들이이 그것을을 좋아하는 것이이 다른 사람들을을 따라시속에 호응응하는 것임을을 싫어해서였다 . 지난해 내가 외가에 나갔었다 . 어린 종이이 담벼락 틈에 국화를 심었지만 내가 뽑아버리지 않았으으니 , 땅에 심은은 것이이 아니라 담벼락에 심어서 시속을을 따르지않았기 때문문이이었다 . 그 뒤 내가 중원원에 갔을을 적에 어떤 선비가 내게 난을을 주었는데 , 우리나라에는없는 난이이라고 여겼다.북경으으로부터 서울울로 싣고 왔지만 길에서 추위위에 얼어버려 봄에도 싹을을 틔우지 않았다. 그 화분에 물물을을 담겠는가 , 밑에 구멍이이 있있으으니 밥을을 찔 것인인가.일찍이이 분토와 마찬가지로 팽개쳐쳐 두었다가 가동에게 맡겨 쓸모를 찾아보게 하였는데 , 이이웃웃<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원원이이 그 화분에 백국을을 모종하였다 . 고서에 국화는 황국을을 일컫는다고 하였으으니 , 백국은은 국화가 아닌 셈이이므로 내가 그거짓됨을을 몹몹시 싫어했지만 가동이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 아,시속에 살면서 속되게 늙지 않기는더더욱 어려우니 , 내가 이이로부터 시속을을 조금은은 배웠웠노라 . 장장차 대나무무를 심고 매화도 심으으리니 ,슬프구나 나<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노쇠함이이여.堂 宇 樓 亭虞 이이나 山 水 遊 觀斣 을을 제재로 한 다른 記贲 文著 과과 달리 盆 菊昙 이이라는 소품을을 제재로 작성된이이 글은은 분량도 분량이이지만 문문체체상으으로도 매우 간결결하고 압축적이이다.맹목적으으로 유행을을좇는 풍조에 대한 비판과과 담벼락에 심어진 국화를 뽑아 버리지 않았던 이이유,난이이 심어21) 「 贈謹 金賱 剛 山 僧 宗諒 遠 序 」, 前蘤 集讛 권권4, p.382. “ 若 我 者鄺 , 德 不 若 人郳 , 智譅 不 若 人郳 , 聰 明菾 不 若 人郳 , 獨 於 文著 章酱 , 不 下 於 古 人郳 .”22) 조선후기에 편찬된 시문문선집 가운운데 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을을 선록한 자료로는 別 本 東 文著 選 이이 유일하다 . 여기에는 「盆 菊昙 記贲 」 외에도 「 送 崔 簡 郑 翁燳 之謺 杆 城 郡昢 序 」‧「 送 成 川 假 仙 洪 兄 之謺 任鄔 序 」‧「 送 崔 汝焠 以郆 赴 留 守 于 開 城 序 」‧「 順 天 府 喚 仙 亭虞 記贲 」등 모두 5 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작품이이 실려있있는데 , 별본동문문선 이이 숙종 연간에 간행된 관관찬서임을을 감안하면 다소 이이례적이이다.23) 「 盆 菊昙 記贲 」, 後 集讛 권권4 p.535.-9 -


유몽몽인인 산문문에 있<strong>있어서</strong> 自鄻 <strong>得</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미와 <strong>실현양상</strong>져 있있던 화분에 흰 국화가 심어지기까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사연이이 특별한 수사적 조탁이이 없는 평이이하고담백한 어조로 서술되다가 돌연 작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애잔잔한 상실감을을 토로함으으로써 깊은은 여운운을을 전하고 있있다. 유몽몽인인은은 일찍이이 “ 나는 혼자다.오늘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선비를 보건대 나처럼 혼자인인 이이가있있는가. 혼자로써 세상길을을 가니 사귀는 도리가 어찌 하나에 얽매이이랴.하나에 얽매이이지않기에 넷이이고 다섯이이고 모두 나<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벗이이니, 나<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무무리가 또한 넓지 아니한가.그 차가움움은은 얼음음을을 얼릴 정도이이지만 나는 떨지 않고,그 뜨거움움은은 땅을을 태울울 정도이이지만 나는 애태우지 않는다.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어서 오직 내 마음음을을 따른다.내 마음음이이 돌아갈바는 오직 나 한 사람일뿐이이니 그 거취취가 어찌 느긋하고 여유롭지 않으으랴.” 24) 라고 할만큼 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식이이 강했던 문문인인이이다.시류에 편승하여 당여를 짓고 갑론을을박하는 혼탁한 정국을을 비판하여본들, 25) 결결국 도저히 세상과과 절연할 수 없었던 자아<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내면<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식이이 바로 이이곳곳“ 시속을을 배웠웠으으니 남들처럼 대나무무도 심고 매화도 심어보리라”는 자조적이이고 역설적인인표현 속에 담겨있있는 것이이다.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작품 속에 자주 등장장하는 신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세계계도 결결국 현실과과<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갈등 속에 경계계인인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운 주체체<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식이이 반영된 것이이다.「 喚 仙 亭虞 記贲 」 는 바로 이이와 같은은 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식이이 선명하게 표출출된 수작이이다. 모두 4단락으으로 이이루어진 이이 글은은 講 武葄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용도로 세워워진 정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이이름으으로는 어울울릴 것 같지 않은은 喚 仙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미에 대한 진술로 시작된다. 安 期贔 生 ‧ 丁虜 令 威 ‧ 黃 鶴 仙 人郳 ‧ 純 陽 眞譳 人郳 등 여러 선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행적을을 거론하며 속계계와 선계계는 본디 소통 불가능한 관관계계임을을 진술하고 있있다. 26)후반부이이다.다음음은은 이이 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今賥 者鄺 , 吾燉 同 年趄 柳 勵 仲謧 氏 下 車讬 昇 平蹴 , 不 踰 歲 , 淨虵 遺 址謾 而郝 新 之謺 , 仍鄤 舊昈 扁蹪 而郝 名菼 之謺 . 蓋 以郆 是 府 介 於 山 海 之謺 間 , 素 著藽佳 麗 之謺 稱跗 . 彼 東 溟萁 方 丈酛 之謺 羣 仙 , 經 過斏 遊 息 於 斯 , 混 流 俗 而郝 人郳 不 識 者鄺 何 限 . 吾燉 知譌 勵 仲謧 氏 必 聞葛 神 仙 之謺 好 樓 居 ,營熘 是 宇 以郆 館斦 候 之謺 乎 , 第蚞 未葨 知譌 勵 仲謧 氏 之謺 喚 之謺 以郆 何 道 乎 . …… 昔 余焘 賦 遠 遊 于 瀛熕 洲諺 , 避 官斘 府 入鄟 曺蚵 溪 , 棲 于 臨 鏡堂 , 當 時 無葆 是 亭虞 矣邼 . 他跙 日鄏 角 巾 南赧 歸晄 , 重謩 過斏 于 玆鄵 , 勵 仲謧 氏 乎 其贀 喚 我 無葆 ? 吾燉 亦焯 混 流 俗 而郝 人郳 不 識 者鄺 . 27)지금 나와 동년인인 柳 勵 仲謧 이이 昇 平蹴 에 수레를 내리고 한 해가 지나기도 전에 遺 址謾 를 정돈하여 새롭게 하고는 예전<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편액을을 따라 명명하였으으니 , 대개 이이 지역이이 산과과 바다<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사이이에 끼어 있<strong>있어서</strong> 평소 아름답다는 일컬음음이이 자자해서이이다 . 저 동해 방장장<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여러 신선이이 이이곳곳을을 거쳐쳐가거나 잠시 쉬어감에 유속과과 뒤섞여 사람들이이 깨닫지 못못하는 경우를 어찌限 量 하랴.나는 여중씨가 반드시 신선이이누정에 머묾묾을을 좋아한다는 말을을 듣고 이이 건물물을을 지어 맞이이하고자 한 것임을을 알겠으으나 다만 여중씨가 어떤 방법으으로 그들을을 부르고자 하는지는 모르겠다 . …… 옛날에 내가 瀛熕 洲諺 에서 遠 遊 를 읊읊고官斘 府 를 사직하여 曺蚵 溪 에 들어가 臨 鏡 堂 에 우거하였는데 , 당시에는 이이 정자가 없었다.훗날 각건을을쓰고 남쪽으으로 돌아가다가 이이곳곳을을 다시 지나게 된다면 여중씨가 나를 불러줄까 ? 나 또한 유속과과섞여 사람들이이 알아보지 못못하는 자이이니 ….24) 「 贈謹 李 聖 徵讜 ( 廷虦 龜昖 ) 令 公敶 赴 京 序 」, 前蘤 集讛 권권3, p.357. “ 余焘 獨 也 , 視 今賥 之謺 士 , 其贀 有 若 余焘 獨 乎 , 以郆 獨 而郝 行 于 世 , 交旈 之謺 道 豈贴 泥于 一鄋 乎 , 一鄋 之謺 不 泥 , 於 四 於 五燄 , 皆 吾燉 友 也 , 則跅 吾燉 之謺 倫 , 不 亦焯 博蒆 乎 , 其贀 寒 凝邮 氷 而郝 吾燉 不 慄 , 其贀 熱煭 焦 土踤 而郝 吾燉 不 灼酇 . 無葆 可 無葆 不 可 ,惟 吾燉 心 之謺 從諓 , 而郝 吾燉 心 之謺 所 歸晄 , 惟 一鄋 人郳 而郝 已郍 , 則跅 其贀 去 就 豈贴 不 綽酊 有 裕 乎 .”25) 상게문문. “ 黃 者鄺 自鄻 黃 , 靑 者鄺 自鄻 靑 , 其贀 靑 黃 果斈 其贀 性 乎 ? 問葖 于 甲 則跅 是 甲 而郝 非 乙邤 , 問葖 于 乙邤 則跅 是 乙邤 而郝 非 甲 , 其贀 俱日 是 乎 ? 其贀 俱日 非乎 , 其贀 甲 乙邤 不 能 相 是 乎 ?”26) 「 喚 仙 亭虞 記贲 」, 前蘤 集讛 권권4, p.395. “ 吾燉 聞葛 神 仙 , 無葆 而郝 有 , 有 而郝 無葆 , 其贀 居 也 縹 緲 , 其贀 趨 也 冥菻 昧菗 , 於 山 則跅 非 雲 梯蚛 鐵 鎖 可 攀蒞 , 於水 則跅 非 風 檣酪 雨 楫謬 可 接虙 , 矧 乎 弓昨 㫌 以郆 招 , 玉燥 帛 以郆 聘 哉藖 . 異郘 哉藖 , 昇 平蹴 之謺 講 武葄 亭虞 , 若 之謺 何 名菼 喚 仙 哉藖 . 昔 者鄺 安 期贔 生 遊 東 海 而郝 只謻 留阜 鄕 之謺 舃 , 可 [ 丁虜 ] 令 威 歸晄 遼 城 而郝 只謻 題蚨 華 表 之謺 詩 , 黃 鶴 仙 人郳 留 連 吳燊 江 之謺 酒謍 家 , 純 陽 眞譳 人郳 三 入鄟 洞 庭虥 之謺 岳 陽 , 而郝 未葨 聞葛 有 號 召而郝 將酢 迎熥 之謺 者鄺 . 倘 有 人郳 知譌 其贀 眞譳 仙 而郝 挽莳 之謺 , 必 泠 然煑 飄 然煑 而郝 逝 , 唯 恐敻 蹤 跡蘙 之謺 或 露 .”27) 상게문문.-10 11-


東 洋 學전체체적으으로 산행으으로 이이루어진 구식 속에 배비구가 적절히 삽입하여 신축적이이면서도 자연스러운운 행문문 속에 喚 仙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미를 담아내고 있있다. 잘잘 알려져 있있다시피 선조 41년(1608)도승지였던 유몽몽인인은은 영창대군군을을 잘잘 보호해달라는 내용<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교교서를 전달한 일로이이이이첨 일파에게 탄핵되어 서호에 우거하게 된다. 그 뒤 광광해군군 3 년(1611)에 남원원부사에 임명되지만 대북파<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전횡에 불만을을 품고 있있던 터라 곧 사직하고 순천 조계계산<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임경당에 한동안 칩거하였는데, 위위에서 말한 옛일이이란 바로 이이때<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일을을 가리킨다. “ 각건을을쓰고 남쪽으으로 돌아가다가 이이곳곳을을 다시 지나게 된다면 여중씨가 나를 불러줄까?나 또한유속과과 섞여 사람들이이 알아보지 못못하는 자이이니.”라는 마지막 문문장장은은 혼탁한 정국 속에서 탈속을을 꿈꾸었으으되 현실과과 결결별하지 못못하고 비극적인인 최최후를 맞이이할 수밖에 없었던내적 갈등으으로부터 배태된 것이이다. 이이 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모두에서 “ 없으으면서도 있있고 있있으으면서도 없으으며, 縹 緲 하게 머물물고 冥菻 昧菗 하게 내달린다”28)고 표현된 신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모습은은 곧 현실과과 이이상<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경계계 위위에 서있있는 유몽몽인인 자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모습이이기도 한 셈이이다.대개 고문문은은 개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사적인인 생각이이나 감정에 관관한 내용보다는 인인륜‧ 도덕‧ 치세‧경국과과 같이이공공적이이고 보편적인인 문문제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서신이이나 비지‧애제처럼 비교교적사적인인 영역과과 관관계계되는 글마저도 진중하고 엄숙한 태도로 일관관하여 인인간 내면<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진정성을을 찾아보기 힘든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있다. 하지만 「 분국기」‧「 증이이성징영공공부경서」‧「환선정기」를 통해 확인인할 수 있있듯이이 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고문문에는 자기반영적인인 성격을을 지닌 글들이이 적지 않다.이이런 글들은은 자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생각이이나 감정을을 표현하는데 중점을을 두고 있있기 때문문에 비교교적 장장르나 형식상<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격식에 크게 구애되지 않는 특징을을 지니고 있있다.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에대한 몇 안 되는 제가 비평 가운운데, “ 최최립은은 고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작품을을 모방했으으므로 비록 뛰어나다할지라도 自鄻 家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造諂 化 가 아니지만 유몽몽인인은은 모범적인인 작품을을 모<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하지 않고 흉중<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조화에서 나온 것” 29) 이이라고 한權昴 擘등 몇몇 문문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평가도 이이런 점에서 서로 맥이이 닿는다.요컨대 유몽몽인인이이 강조한 자득<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창작론이이란-지극히 당연한 말이이지만-그 자신이이 전범으으로 규정한 몇몇 텍스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수사나 문문체체 등 형식적인인 면으으로부터<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자득을을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진정성을을 기반으으로 한 개성적이이고 흡인인력 있있는 내용<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창출출을을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미하는것이이기도 하다.그렇다면 과과연 수사나 문문체체 등 형식적인인 면에 있<strong>있어서</strong><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자득<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실현양상</strong>은은 어떠한가? 이이는 전범적 텍스트와 어떤 방식으으로 소통하고 있있는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제이이기도 하다.다음음 작품을을 보자.a 寒 者鄺 何 ? 竹謐 也 . 碧 者鄺 何 ? 沙 也 . 堂 之謺 名菼 寒 碧 何 ? 以郆 其贀 地謽 有 竹謐 沙 也 . 竹謐 沙 之謺 稱跗 寒 碧 何 ? 取 杜 子鄭 ‘ 竹謐 寒 沙 碧浣爄 花 溪 ’ 者鄺 詩 也 . 孰 居 之謺 ? 鄭蚈 措蚱 大 時 也 . 措蚱 大 , 京 師 人郳 . 其贀 先 君昝 詩 名菼 高敟 一鄋 世 , 嘗 隱那 於 會 稽 山 不 售 , 自鄻 號 會 稽山 人郳 . 措蚱 大 自鄻 幼 稚趺 富 氣贚 槩 , 値趮 時 之謺 難赣 , 亦焯 隱那 於 錦賲 城 山 . 山 有 萬莺 竿 寒 竹謐 一鄋 帶 碧 沙 , 可 挹 於 一鄋 堂 , 堂 之謺 名菼 於 是 乎<strong>得</strong> 之謺 矣邼 . b夫 寒 者鄺 非 一鄋 , 有 風 也 月 也 水 也 石 也 , 千 百 其贀 名菼 , 而郝 必 曰 竹謐 ; 碧 者鄺 非 一鄋 , 有 天 也 雲 也 山 也 海 也 , 千百 其贀 名菼 , 而郝 必 曰 沙 者鄺 何 ?……於 是 , 君昝 子鄭 歌 之謺 曰 : “ 亭虞 亭虞 萬莺 竹謐 , 氣贚 侵跌 書 帙讈 . 綿菵 綿菵 平蹴 沙 , 色 連 溪 月 . 孰 營熘 是 堂 ,堂 以郆 詩 名菼 . 世 隱那 於 詩 , 允邇 繼 家 聲 . 錦賲 城 嵯认 嵯认 , 錦賲 水 深 深 . 寒 耶 碧 耶 , 主諨 人郳 之謺 襟賰 .” 有 聽 其贀 歌 而郝 愛 其贀 名菼 者鄺 , 不 入鄟其贀 堂 , 不 見 其贀 物葡 , 而郝 文著 以郆 記贲 之謺 , c記贲 之謺 者鄺 何 人郳 ? 高敟 興 柳 夢萬 寅郻 也 . 30)28) 주 26 번.29) 柳 夢萬 寅郻 , 於 于 野 譚 ( 萬莺 宗諒 齋藤 本 ) 권권3 張酥 14; 景 文著 社 , 1979. “ 尹邉 月 汀虳 根賚 壽 見 擘 問葖 近賢 世 文著 章酱 高敟 下 , 人郳 言焊 新 進譿 中謦 柳 某萔 能文著 章酱 甚 高敟 云 云 , 其贀 文著 與焥 崔 東 皐敌 岦 孰 優 . 擘 曰 : ‘ 崔 之謺 文著 模萕 倣 古 人郳 之謺 作酂 , 雖 工敺 非 自鄻 家 造諂 化 , 若 夢萬 寅郻 之謺 文著 不 擬邸 前蘤 模萕 範 , 皆 出胸 中謦 造諂 化 , 此讧 最 難赣 , 崔 殆踔 不 及賴 也 .’ 且讟 余焘 曾謱 聞葛 車讬 五燄 山 天 輅 論趥 我 文著 及賴 崔 文著 每菚 如焜 此讧 , 其贀 見 略 同 . 亡菇 友 成 晉警 善 每菚 曰 : ‘ 以郆 我 觀斣 之謺 ,子鄭 之謺 文著 博蒆 採 孟菦 ‧ 莊酶 ‧ 馬 ‧ 班蒣 ‧ 韓 ‧ 柳 , 自鄻 成 造諂 化 , 不 模萕 古 人郳 之謺 作酂 , 崔 岦 之謺 採 漢 ‧ 史 ‧ 韓 碑 ‧ 柳 文著 , 模萕 擬邸 體 格 以郆 隘 窄讱 , 頗蹋 不 如焜 子鄭 之謺 文著 .’晉警 善 嘗 問葖 許 筠賉 曰 : ‘ 柳 之謺 文著 與焥 崔 孰 優 ?’ 筠賉 黙 思 之謺 良 久既 曰 : ‘ 崔 文著 老趗 神 柳 似 不 逮 .’”


유몽몽인인 산문문에 있<strong>있어서</strong> 自鄻 <strong>得</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미와 <strong>실현양상</strong>차가운운 것은은 어떤 것인인가? 대나무무이이다 . 푸른 것은은 어떤 것인인가? 모래사장장이이다 . 堂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이이름을을 寒 碧이이라 이이름한 것은은 어째서인인가 ? 그 곳곳에 대나무무와 모래사장장이이 있있기 때문문이이다 . 대나무무와 모래사장장을을寒 碧 이이라 일컬은은 것은은 어째서인인가 ? 杜 子鄭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 竹謐 寒 沙 碧 浣爄 花 溪 ’ 란 시구에서 취취한 것이이다.누가 그곳곳에사는가? 措蚱 大 鄭蚈 時 이이다. 조대는 서울울 사람이이다 . 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先 君昝 은은 詩 로 한 시대에 높이이 이이름났는데 , 일찍이이 회계계산에 은은거하여 자신을을 드러내지 않고 會 稽 山 人郳 이이라 自鄻 號 하였다.조대는 어려서부터 기개가 넉넉하였는데 , 시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어려움움을을 만나 또한 錦賲 城 山 에 은은거하였다 . 산에는 만 그루나 되는 寒 竹謐 과과한 줄기 띠를 이이룬 碧 沙 가 있<strong>있어서</strong> 당우 한 채에서 모두어 살필 수 있있었으으니 , 당<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이이름은은 여기에서 얻어진 것이이다. 차가운운 것은은 한둘이이 아니니,바람과과 달과과 물물과과 바위위도 있<strong>있어서</strong> 그 이이름을을 천 가지 백 가지로 할 수 있있거늘 굳이이 대나무무라고 하였으으며 , 푸른 것은은 한둘이이 아니니,하늘과과 구름과과산과과 바다도 있<strong>있어서</strong> 그 이이름을을 천 가지 백 가지로 할 수 있있거늘 굳이이 모래사장장이이라고 한 것은은 어째서인인가 ?……이이에 군군자가 노래하기를 , “ 곧고 곧은은 수많은은 대나무무, 그 기운운 서질을을 침범했네 . 면면히 이이어진 평평한 모래사장장 , 그 빛깔 시냇물물에 비친친 달빛에 연이이었네 . 누가 이이 당을을 지었는가 , 시로써 이이름했네 . 세상을을 피해 시에 숨었으으니 , 진실로 집안<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명성을을 이이었다네 . 錦賲 城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높고 높음음이이여, 錦賲 水 는 깊고 깊네. 차가움움이이여 푸르름이이여 , 주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흉금이이네 .” 라고 하였다.그 노랫소리를 듣고 그 이이름을을 사랑하는 자가 있있었으으나 그 당우에 들어가 보지 못못하고 그 물물색을을 보지 못못해 글로써기문문을을 쓰나니, 기문문을을 쓴 자는 누구인인가 ? 고흥 사람 유몽몽인인이이다 .인인용한 글은은 「 寒 碧 堂 記贲 」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서두이이다. 유몽몽인인은은 “ 시험삼아 오늘날<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을을 보니 之謺 ‧ 而郝 ‧ 其贀 ‧於 ‧ 乎 ‧ 也 ‧ 以郆 로 글을을 엮어 한 구 안에 세 번이이나 조사를 써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글을을 읽음음에 물물 흐르듯 구두가 유창하니,이이런 글로 과과거에 급제하고 한 나라에 빛내는 데는 부족함이이 없겠지만 후세에 전해질 수는 없을을 것” 31) 이이라고 하여 조사<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빈번한 사용에 반대한 바 있있다.일반적으으로 고문문사가 간험한 문문체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이와 같은은언급은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이라 하겠는데,기실 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이이 꼭 이이런 방식으으로 이이루어진 것만은은 아님을을 이이 「 寒 碧 堂 記贲 」 를 통해 확인인할 수 있있다. a와 b를 보자. a에서는‘ 何 ’와‘ 也 ’ 자를 연용한 자문문자답<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구식을을 통해 간결결하면서도 경쾌한 리듬감을을 부여하고 있있으으며, b에서는 ‘ 也 ’ 자를 연속적으으로 병렬함으으로써 하고많은은 사물물 가운운데 굳이이 대나무무와모래사장장에서‘ 寒 碧 ’ 이이라는 이이름을을 취취한 이이유를 효과과적으으로 강조하고 있있다.그런데 이이와 같은은 수사법이이 생경하지 않다면, 이이는 公敶 羊 傳蘡 을을 통해 이이미 이이러한 화법을을경험했기 때문문이이다. 32) 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산문문 가운운데는 「 送 江 原 方 伯 申 ( 湜 ) 序 ( 效 國昗 語 押 韻 )」‧「贈謹 義邽林 道 人郳 效 楞 嚴焐 經 」‧「 戱 效 戰蘭 國昗 策 奉 贈謹 全蘢 州諳 府 尹邉 鄭蚈 公敶 行 序 」‧「 贈謹 楓 嶽 三 酺藏 菴 泂 敏葹 法 師 靑 鶴 非 鶴 論 」 과과같이이 원원용한 텍스트를 아예 명시한 작품도 있있지만「 한벽당기」와 같이이 비록 제목에서는나타나지 않더라도 차용<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흔적을을 쉽게 찾을을 수 있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또 한 가지 더더욱 흥미로운운 점은은 이이 작품은은고 있있다는 사실이이다.公敶 羊 傳蘡 만 차용한 것이이 아니라 구양수<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작품도 차용하30) 「 寒 碧 堂 記贲 」, 前蘤 集讛 권권4, p.391.31) 「 答 年趄 兄 林 公敶 直譜 書 」, 前蘤 集讛 권권5, p.410. “ 試 觀斣 今賥 之謺 文著 , 以郆 之謺 而郝 其贀 於 乎 也 以郆 屬 辭 , 一鄋 句旪 三 用 語 助蚭 , 使 人郳 讀 之謺 也 , 其贀 句旪 讀流 於 唇譡 吻葕 , 用 是 捷 巍 科斊 華 一鄋 國昗 者鄺 何 限 ? 雖 然煑 , 其贀 施 於 一鄋 時 則跅 <strong>得</strong> 矣邼 , 其贀 如焜 傳蘡 世 壽 後 何 ?”32) 公敶 羊 傳蘡 ‧ 隱那 公敶 元 年趄 “ 元 年趄 者鄺 何 ? 君昝 之謺 始 年趄 也 . 春 者鄺 何 ? 歲 之謺 始 也 . 王 者鄺 孰 謂 ? 謂 文著 王 也 . 曷 爲 先 言焊 王 而郝 後 言焊 正虲 月 ?王 正虲 月 也 . 何 言焊 乎 王 正虲 月 ? 大 一鄋 統踫 也 . 公敶 何 以郆 不 言焊 卽謪 位 ? 成 公敶 意邶 也 . 何 成 乎 公敶 之謺 意邶 ? 公敶 將酢 平蹴 國昗 而郝 反蒚 之謺 桓 . 曷 爲 反蒚 之謺 桓 ?桓 幼 而郝 晅貴 , 隱那 長藓 而郝 卑 . 其贀 爲 尊諍 卑 也 微葧 , 國昗 人郳 莫 知譌 . 隱那 長藓 又 賢 , 諸蚢 大 夫 扳 隱那 而郝 立鄡 之謺 . 隱那 于 是 焉 而郝 辭 立 , 則跅 未葨 知譌 桓 之謺 將酢 必 <strong>得</strong>立鄡 也 ; 且讟 如焜 桓 立 , 則跅 恐敻 諸蚢 大 夫 之謺 不 能 相 幼 君昝 也 . 故 凡 隱那 之謺 立鄡 , 爲 桓 立鄡 也 . 隱那 長藓 又 賢 , 何 以郆 不 宜邵 立 ? 立 適蘝 以郆 長藓 不 以郆 賢 , 立鄡子鄭 以郆 晅貴 不 以郆 長藓 . 桓 何 以郆 晅貴 ? 母萖 晅貴 也 . 母萖 晅貴 則跅 子鄭 何 以郆 晅貴 ? 子鄭 以郆 母萖 晅貴 , 母萖 以郆 子鄭 晅貴 .”-12 13-


東 洋 學環 滁 皆 山 也 . 其贀 西 南赧 諸蚢 峯 , 林 壑 尤 美葯 , 望菋 之謺 蔚 然煑 而郝 深 秀 者鄺 , 琅 邪 也 ; 山 行 六 七跉 里 , 漸虓 聞葛 水 聲 , 潺酒 潺酒 而郝 瀉 出于 兩 峯 之謺 間 者鄺 , 釀 泉 也 ; 峯 回 路 轉蘿 , 有 亭虞 翼郱 然煑 , 臨 于 泉 上 者鄺 , 醉趤 翁燳 亭虞 也 . 作酂 亭虞 者鄺 誰 ? 山 之謺 僧 智譅 僊 也 . 名菼 之謺 者鄺誰 ? 太踑 守 自鄻 謂 也 . 太踑 守 與焥 客 , 來 飮邪 于 此讧 , 飮邪 少 輒 醉趤 , 而郝 年趄 又 最 高敟 , 故 自鄻 號 曰 醉趤 翁燳 也 . 醉趤 翁燳 之謺 意邶 , 不 在藗 酒謍 而郝 在藗乎 山 水 之謺 間 也 , 山 水 之謺 樂 , <strong>得</strong> 之謺 心 而郝 寓 之謺 酒謍 也 .……然煑 而郝 禽賬 鳥談 知譌 山 林 之謺 樂 , 而郝 不 知譌 人郳 之謺 樂 ; 人郳 知譌 從諓 太踑 守 遊 而郝樂 , 不 知譌 太踑 守 之謺 樂 其贀 樂 也 . 醉趤 能 同 其贀 樂 , 醒 能 述 以郆 文著 者鄺 , 太踑 守 也 . 太踑 守 謂 誰 ? 廬 陵 歐旸 陽 修 也 . 33)처음음 글을을 지을을 때에는 수십 자에 이이르렀던 것을을 결결국‘ 環 滁 皆 山 也 ’ 5자로 압축하였다든지 ‘ 也 ’ 자를 21번이이나 연용하였다34) 하여 화제가 된 「 醉趤 翁燳 亭虞 記贲 」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일부이이다. ‘ 寒 者鄺 何 竹謐也 ’ 로 시작되어 ‘ 記贲 之謺 者鄺 何 人郳 高敟 興 柳 夢萬 寅郻 也 ’ 로 끝나는 「 한벽당기」는 ‘ 作酂 亭虞 者鄺 誰 山 之謺 僧 智譅 僊也 名菼 之謺 者鄺 誰 太踑 守 自鄻 謂 也 ’ 라고 한 뒤 ‘ 太踑 守 謂 誰 廬 陵 歐旸 陽 修 也 ’ 로 끝나는 「 취취옹정기」<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구식을을 차용하고 있있음음을을 확인인할 수 있있다. 그렇다면 이이 「 한벽당기」는 단지 모방 이이상<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학적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는 없는가? 이이 문문제는 모<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를 바라보는 관관점에 따라 달라질 테지만,<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도성<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개입 여부에 따라 판단한다면 이이 작품은은 모방과과는 거리가 멀다.이이는 이이 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전체체적인인맥락만 살펴보더라도 쉽게 감지할 수 있있다. 「 취취옹정기」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경우, 滁 州諳 로부터 낭야와 양천을을 거쳐쳐 취취옹정에 이이르는,마치 전통적인인 산수화<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구도와 유사하게 대구도에서 소구도로 시선을을 응응축해간 뒤에 인인물물과과 정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명칭칭에 대한 진술이이 시작되는 응응집적인인 서술구조를 택하고 있있으으며 사변적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론을을 배제하고 서정적이이고 유연한 필치로 閱煰 勝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樂 趣 를묘묘사하고 있있다. 이이에 반해 「 한벽당기」 는 대뜸 공공양전<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즉문문즉답<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화법을을 활용하여당우<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명칭칭이이 유래한 바를 밝힌 뒤 堂 主諨 에 대한 서술과과 堂 名菼 에 대한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론이이 이이어지며결결말에 다시 한 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시를 삽입하는 구조를 취취하고 있있다. 결결국 「 한벽당기」 가 공공양전을을차용한 것은은 어떤 심각한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론을을 조성하고자 해서가 아니라 단지 당우<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명칭칭을을 소개하기 위위해서였고, 「 취취옹정기」를 차용한 것도 그 서술구조나 서술태도 또는 주제나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경 따위위를 본받고자 해서가 아니라 그저 수사장장치<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일종으으로 활용한 것이이다.이이처럼 전혀 어울울릴 것 같지 않은은 텍스트들-선진문문과과 송문문-을을 한 작품 속에 노골적으으로 드러내놓되작품<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전체체적인인 내용이이나 형식에 있<strong>있어서</strong>는 독자성을을 유지하고 있있는「 한벽당기」는 어떠한 텍스트도 작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도에 따라 창조적으으로 재해석되고 변용될 수 있있음음을을 보여주는 실험성이이 돋보이이는 작품이이라 하겠다.「 無葆 盡譲 亭虞 記贲 」 는 어우집과과 별도로 전하는 필사본 문문집인인 黙 好 稿敎 에 그 초고가 실려 있<strong>있어서</strong> 편장장법이이나 자구법과과 같은은 고문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수사법에 관관한 이이해<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폭을을 넓히는데 있<strong>있어서</strong> 요긴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송문문과과 직접적으으로 관관계계된 글이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만한 작품이이다. 35) 이이 글은은 ‘ 無葆 盡譲 ’ 이이라는 정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이이름에서 연상되듯이이 蘇 軾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 赤蘘 壁 賦 」 에 견견주어 서술한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론형 누정기이이다. 여기에서 유몽몽인인은은 “ 천하만물물 그 무무엇도 다함이이 없지 않은은데다함이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은 천리를 어기는 것” 이이라고 하여 “ 변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천지도 일찍이이 한 순간[ 一鄋 瞬 ] 도 변치 않을을 수 없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자면 사물물33) 歐旸 陽 修 , 「 醉趤 翁燳 亭虞 記贲 」; 余焘 冠斗 英熣 외 3 인인 주편, 唐 宋 八蹕 大 家 全蘢 集讛 上 , 國昗 際蚦 文著 化 出 版蹏 公敶 司 , 1997, p.998. 번역은은 생략함.34) 朱諶 熹 와 洪 邁菟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평에 보인인다 . 朱諶 熹 저, 黎焮 靖蚏 德 편, 「 論趥 文著 上 」, 朱諶 子鄭 語 類 권권139; 中謦 華 書 局昘 , 1994, p.3308. “ 歐旸公敶 文著 亦焯 多 是 修 改 到 妙萱 處 . 頃 有 人郳 買菝 <strong>得</strong> 他跙 醉趤 翁燳 亭虞 記贲 藁敖 , 初 說 滁 州諳 四 面菷 有 山 , 凡 數 十 字鄮 , 末菂 後 改 定虣 , 只謻 曰 ‘ 環 滁 皆 山 也 ’ 五燄 字鄮而郝 已郍 .” / 洪 邁菟 , 容 齋藤 隨 筆 ‧ 五燄 筆 권권8. “ 歐旸 陽 公敶 醉趤 翁燳 亭虞 記贲 ‧ 東 坡踼 公敶 酒謍 經 , 皆 以郆 也 字鄮 爲 絶虏 句旪 . 歐旸 陽 二郅 十 一鄋 也 字鄮 , 坡踼 用 十 六也 字鄮 . 歐旸 記贲 人郳 人郳 能 讀 , 至譓 於 酒謍 經 , 知譌 之謺 者鄺 蓋 無葆 幾贎 .”35) 이이 작품<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예적 성격에 관관해서는 졸고, 「 崔 岦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山 水 屛 序 와 柳 夢萬 寅郻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無葆 盡譲 亭虞 記贲 를 통해 본 古 文著 辭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文著 藝熸 美葯」( 漢 文著 學 論趥 集讛 23 집, 槿賛 域焱 漢 文著 學 會 , 2005) 에서 상론한 바 있있다.-14 -


유몽몽인인 산문문에 있<strong>있어서</strong> 自鄻 <strong>得</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미와 <strong>실현양상</strong>과과 우리 인인간 모두가 다하지 않는[ 無葆 盡譲 ] 존재”36)라고 한 소식<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관관점을을 정면으으로 반박하고 있있다. 37) 이이는 곧 ‘ 無葆 盡譲 ’ 에 대비되는 ‘ 一鄋 瞬 ’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관관점을을 취취한 것으으로,정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명칭칭 자체체를 부정한 것이이나 다름없다. 청청풍과과 명월월도 다하지 않음음이이 없고 바다와 산도 다하지 않을을 수 없으으니,유한한 인인간으으로서 무무한한 경지를 추구한다는 것은은 조물물주<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뜻을을 위위배하는 것 38) 이이라 한 것도 모두에 제기한 진술과과 부합한다.그런데 정작 마지막 단락에서는‘ 自鄻 强 不 息 ’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성리학적 세계계관관과과 ‘ 知譌 足諊 之謺 足諊 常 足諊 ’ 이이라 한 노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말을을 인인용하여 천리유행<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이이치를 깨닫고 순응응하는 것이이 올바른 군군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태도라고 하며, 無葆 盡譲 이이라고 명명한 것을을용인인하는 태도를 취취하였다. 39) 그렇다면「 무무진정기」는 과과연 소식<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관관점을을 정면으으로 반박하고 있있는가?천지자연<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무무한함과과 인인간<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유한함을을 대비시켜 세속적 욕망을을 초탈한 삶<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자세를 낭만적으으로 묘묘사한 「 적벽부」와 ‘ 乾 坤敩 剝蒅 復 之謺 理 ’ 와 ‘ 自鄻 强 不 息 ’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세계계관관을을 통해천리에 순응응하는 성리학적 수양론으으로 귀결결된 「 무무진정기」사이이에는 분명한 차이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 적벽부」에서도 “ 흘러가는 것이이 이이와 같으으나 일찍이이 다하지 않으으며,차고기우는 것이이 저와 같으으나 끝내 사라져버리거나 커져버리지 않는다” 40) 고 하였듯이이,이이 양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세계계관관이이나 삶<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방식 자체체가 본질적으으로 상반된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 오늘이이 정자에 이이르러 江 山 과과 風 月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흥취취가 다함이이 없음음을을 얻었으으니,주인인이이 명명한 것이이마땅하다”고 언급하였듯이이 소식<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론을을 반박함으으로써 정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이이름마저 부정하였던 전반부도 실은은 논제를 구성하고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론을을 창출출하기 위위해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도적으으로 비튼 것이이지 근본적인인전복을을 목표로 한 것이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이런 점에서 「 무무진정기」 는 「 적벽부」라는 강력한 흡인인력을을 지닌 텍스트를 대상으으로 하였으으면서도 원원작에 견견인인되지 않고 변용하여 자기화하는데 성공공한 작품이이라고 할 수 있있다.다음음은은 「 滕 王 閣 序 」 에 나오는 경구 “ 四 美葯 具旦 二郅 難赣 幷 ” 에서 취취<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한 二郅 難赣 軒 에 쓴 기문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일부이이다.三 十 八蹕 年趄 春 , 朴蒊 子鄭 爲 韓 子鄭 構旷 草 堂 三 間 四 楹熎 . 旣贒 成 , 朴蒊 子鄭 使 韓 子鄭 求旻 名菼 於 柳 子鄭 , 柳 子鄭 請 名菼 之謺 以郆 二郅 難赣 . 韓 子鄭 曰 :“ 我 知譌 之謺 矣邼 , 州諳 號 爲 公敶 , 而郝 幽 居 私 其贀 雲 物葡 , 是 一鄋 難赣 也 ; 城 名菼 爲 儒 , 而郝 武葄 人郳 擅 其贀 風 月 , 是 二郅 難赣 也 .” 柳 子鄭 曰 : “ 武葄昌 名菼 邑邭 , 不 是 都 無葆 文著 術 ; 不 夜 稱跗 城 , 未葨 必 長藓 爲 白 日鄏 . 況 今賥 名菼 實 兩 全蘢 , 有 何 難赣 旃 ?” 韓 子鄭 曰 : “ 嘉 遯 之謺 村 , 非 巢由 則跅 莫 可 , 今賥 宦 子鄭 者鄺 舍 之謺 ; 鰲燠 頭 之謺 山 , 非 偓 佺蘠 則跅 莫 干 , 今賥 火 食 者鄺 安 焉 . 二郅 者鄺 之謺 難赣 , 不 其贀 然煑 乎 ?” 柳 子鄭 曰 : “ 成都 非 物葡 外 而郝 君昝 平蹴 下 簾 , 岳 陽 亦焯 人郳 世 而郝 洞 賓 飛 吟邥 . 況 地謽 有 <strong>得</strong> 人郳 而郝 彰 , 人郳 無葆 因郹 地謽 而郝 揚 . 吾燉 於 二郅 者鄺 , 未葨 見 其贀 難赣 也 .”韓 子鄭 曰 : “ 吾燉 之謺 所 難赣 , 子鄭 之謺 所 易焳 , 子鄭 之謺 所 難赣 , 可 <strong>得</strong> 聞葛 命菽 乎 ?” 柳 子鄭 曰 : “ 今賥 夫 是 軒 , 朴蒊 子鄭 創 之謺 , 韓 子鄭 存諌 之謺 ; 朴蒊 子鄭讓 之謺 , 韓 子鄭 分 之謺 . 湖 山 雲 月 之謺 勝 , 孰 全蘢 而郝 保 之謺 ? 軒 雖 勝 , 不 有 主諨 而郝 主諨 之謺 , 病 其贀 虛 而郝 莫 守 , 不 有 賓 而郝 賓 之謺 , 病其贀 寂蘉 而郝 莫 討踥 . 聲 以郆 曲散 投踶 , 影熊 以郆 形 從諓 , 物葡 以郆 類 合 , 人郳 以郆 情虨 同 . 雷 風 相 搏蒈 , 動 足諊 則跅 揮 臂 , 陰邨 陽 胥 應邯 , 燥蚾 火 而郝 濕 水 .不 有 朴蒊 子鄭 之謺 敬 客 , 焉 有 韓 子鄭 之謺 擇踞 主諨 ? 41)36) 蘇 軾 , 「 赤蘘 壁 賦 」; 余焘 冠斗 英熣 주편, 전게서 , p.3129. “ 蓋 將酢 自鄻 其贀 變 者鄺 而郝 觀斣 之謺 , 則跅 天 地謽 曾謱 不 能 以郆 一鄋 瞬 , 自鄻 其贀 不 變 者鄺 而郝 觀斣 之謺 ,則跅 物葡 與焥 我 皆 無葆 盡譲 也 .”37) 「 無葆 盡譲 亭虞 記贲 」, 前蘤 集讛 권권4, p.392. “ 大 凡 有 始 而郝 無葆 不 卒諎 , 造諂 物葡 者鄺 之謺 意邶 也 . 天 下 萬莺 物葡 , 畢 竟 同 歸晄 於 盡譲 , 而郝 欲 鄿 其贀 無葆 盡譲 者鄺 ,違 天 理 也 . 今賥 松 巖 公敶 構旷 三 楹熎 小 亭虞 於 垂 老 之謺 年趄 , 以郆 無葆 盡譲 扁蹪 之謺 , 其贀 意邶 何 居 ? 萬莺 物葡 之謺 中謦 , 莫 久既 者鄺 海 岳 , 而郝 東 海 桑 泰踖 山 礪 , 曾謱 不能 以郆 一鄋 瞬 , 而郝 蘇 軾 , 一鄋 拘旳 儒 也 . 乃赼 敢 貪踆 天 之謺 物葡 , 以郆 江 上 山 間 之謺 淸 風 明菾 月 爲 無葆 盡譲 酺藏 , 不 亦焯 異郘 哉藖 !”38) 상게문문. “ 彼 蓬 蓬 然煑 起贵 於 北 海 , 蓬 蓬 然煑 入鄟 於 南赧 海 , 其贀 入鄟 也 非 風 之謺 盡譲 乎 ? 但 見 宵 從諓 海 上 來 , 寧趋 知譌 曉 向 雲 間 沒萫 , 其贀 沒萫 也 非月 之謺 盡譲 乎 ? 噫 , 海 也 而郝 盡譲 , 岳 也 而郝 盡譲 , 風 也 而郝 盡譲 , 月 也 而郝 盡譲 . 矧 乎 世 之謺 人郳 , 其贀 知譌 者鄺 有 限 , 而郝 不 知譌 者鄺 無葆 限 , 其贀 <strong>得</strong> 者鄺 有 窮昪 ,而郝 不 <strong>得</strong> 者鄺 無葆 窮昪 , 其贀 生 者鄺 有 涯 , 而郝 其贀 死 者鄺 無葆 涯 , 如焜 是 而郝 求旻 無葆 盡譲 於 有 盡譲 之謺 域焱 , 是 造諂 物葡 者鄺 之謺 賊蘗 也 .”39) 상게문문. “ 雖 然煑 , 乾 坤敩 剝蒅 復 之謺 理 , 化 化 而郝 生 生 , 未葨 嘗 斯 須 間 斷 , 宜邵 君昝 子鄭 之謺 體 之謺 以郆 自鄻 强 不 息 . 不 息 於 天 理 爲 不 違 , 然煑 則跅 孰爲 近賢 其贀 楚 苦敓 縣 人郳 之謺 言焊 乎 ? 其贀 言焊 曰 : “ 知譌 足諊 之謺 足諊 , 常 足諊 .” 今賥 日鄏 到 斯 亭虞 , <strong>得</strong> 江 山 風 月 之謺 趣 無葆 盡譲 , 宜邵 主諨 人郳 之謺 名菼 之謺 也 .”40) 蘇 軾 , 전게문문 . “ 逝 者鄺 如焜 斯 , 而郝 未葨 嘗 往 也 , 盈熞 虛 者鄺 如焜 彼 , 而郝 卒諎 莫 消 長藓 也 .”41) 「 二郅 難赣 軒 記贲 」, 前蘤 集讛 권권4, p.393.-15 -


東 洋 學38 년 봄에 朴蒊 子鄭 가 韓 子鄭 를 위위해 초당 세 칸칸을을 지었는데 , 낙성한 뒤에 朴蒊 子鄭 가 韓 子鄭 로 하여금 柳 子鄭에게 헌<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이이름을을 요구하였다 . 柳 子鄭 가 二郅 難赣 으으로 명명하기를 청청하자 韓 子鄭 가 말하기를 , “ 내가 그 뜻을을 알겠다. 고을을 이이름은은 ‘ 公敶 ’ 이이라 하는데 幽 居 에서 雲 物葡 을을 사사로이이 취취하였으으니 이이것이이 첫첫 번째 어려움움이이요 , 성<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이이름은은 ‘ 儒 ’ 라 하는데 武葄 人郳 이이 그 風 月 을을 독점하였으으니 이이것이이 두 번째 어려움움이이다 .”라고 하였다. 柳 子鄭 가 말하기를 , “ 武葄 昌 은은 邑邭 을을 이이름한 것이이지만 文著 術 이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으며 , 不 夜는 城 을을 일컬은은 것이이지만 白 日鄏 이이 항상 없는 것은은 아니었다 . 하물물며 지금은은 이이름과과 실상이이 모두 온전하니 그렇게 이이름함에 무무슨 어려움움이이 있있겠는가 ?” 라고 하였다.韓 子鄭 가 말하기를 , “ 嘉 遯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마을을은은 巢 父 와 許 由 가 아니고는 살 수 없는데 지금 벼슬아치가 살고있있으으며, 鰲燠 頭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산은은 偓 佺蘠 이이 아니고는 구할 수 없는데 지금 火 食 하는 자가 안주하고자 하니,두 가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어려움움[ 二郅 難赣 ] 은은 당연하지 아니한가 ?” 라고 하였다. 柳 子鄭 가 말하기를 , “ 成 都 는 物葡 外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땅이이 아니지만 君昝 平蹴 ( 嚴焐 遵謢 ) 이이 주렴을을 내리고 살았으으며 岳 陽 또한 인인간 세상에 있있었지만 洞 賓 ( 呂焚 嵒 ) 이이 이이곳곳을을 날며 詩 를 지었다.하물물며 땅은은 사람을을 얻어야만 빛나지만 사람은은 땅을을 통하지 않고도 이이름을을드날릴 수 있있으으니, 나는 두 가지에 대해서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韓 子鄭 가 말하기를 ,“ 내가 어려워워하는 바를 그대는 쉽게 여기니, 그대가 어려워워하는 바를 얻어들을을 수 있있겠는가 ?” 라고 하였다. 柳 子鄭 가 말하기를 , “ 지금 이이 軒 은은 朴蒊 子鄭 가 짓고 韓 子鄭 가 살며 朴蒊 子鄭 가 물물려주고 韓 子鄭 가 나누어 받았다. 湖 山 과과 雲 月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승경을을 그 누가 온전히 간직하겠는가 ? 軒 이이 비록 빼어나더라도 주인인될 만한 자가 주인인되지 않으으면 비워워두고 지키지 않느니만 못못하고,손님될 만한 자가 손님되지 않으으면 적막하게 하여 토론하지 않느니만 못못한 법이이다.소리는 곡조에 따라 배치되고 그림자는 형상을을 따르며, 사물물은은 부류로써 합하고 사람은은 정으으로써 함께 한다.번개와 바람이이 서로 치듯이이 발을을움움직이이면 팔을을 흔들게 되고 음음과과 양이이 서로 호응응하니 불로써 말리고 물물로써 적신다. 朴蒊 子鄭 가 객을을공공경함이이 있있지 않았다면 어찌韓 子鄭 가 주인인을을 택함이이 있있었겠는가?유몽몽인인이이 韓 孝 仲謧 이이라는 武葄 人郳 과과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으로 구성된 이이 글은은 ‘ 二郅 難赣 ’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미에관관한 두 가지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론이이 순차적으으로 진술되고 있있다.하나는 지역과과 인인물물<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관관계계에 대한 것이이고 다른 하나는 賢 主諨 와 嘉 賓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관관계계에 대한 것이이다.공공주 유성이이라는 곳곳에 무무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사유물물이이 들어선다는 것이이 과과연 옳은은가 하는 문문제에 대해 유몽몽인인은은 무무창과과 불야,성도와악양<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예를 들어 어떤 인인물물이이 사느냐에 따라 그 지역<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성망이이 높아지는 것이이지 지역<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성망에 따라 사람<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가치가 정해지는 것은은 아니라는 결결론을을 이이끌어낸다. 이이는 바로 “ 人郳傑 地謽 靈 ” 이이라 한 「 등왕각서」에 대한 명쾌한 논박으으로서, ‘ 二郅 難赣 ’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진정한 함<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가 현주와가빈이이라는 논제에 있있음음을을 강조한 것이이다.한편 이이 글에는 당송고문문가들<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누정기에서는 흔히 사용되지 않는押 韻 을을 이이용한 수사법이이 보인인다. 강조 표시된 글자가 그것인인데, 術 ‧ 日鄏 은은 入鄟 聲 質讐 韻 으으로 압운운하였고 全蘢 ‧ 旃 은은 下平蹴 聲 先 韻 으으로 압운운하였으으며 彰 ‧ 揚 은은 下 平蹴 聲 陽 韻 으으로 압운운한 것이이다.通踬 韻 한 경우도 있있는데, 下 平蹴 聲 鹽煿 韻 과과 侵跌 韻 에 각각 속하는 簾 과과 吟邥 , 上 平蹴 聲 冬 과과 東 에 속하는 從諓 과과 同 이이그것이이다. 이이밖에도 上 平蹴 聲 支譃 韻 에 속하는 之謺 를 7 번이이나 연용하여 압운운하였다.또한 이이어지는 글에서도 비록 압운운은은 하지 않았지만 대우를 고려한 배비구를 적절히 배치하고시로써 찬미하는 내용을을 곁곁들임으으로써 고답적인인 풍격을을 창출출하였다. 42) 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글 가운운42) 상게문문. “ 如焜 魚 泳熑 淵煍 , 如焜 鳥談 歸晄 藪 , 如焜 淄趵 合 澠 而郝 易焳 牙 難赣 嘗 , 如焜 石 投踶 水 而郝 沒萫 人郳 莫 取 . 其贀 業焕 雖 殊 , 其贀 趣 不 二郅 , 然煑 則跅 觀斣 所 爲 主諨 ,服 傳蘡 訓 在藗 此讧 , 婚 媾 無葆 尤 , 體 易焳 義邽 以郆 是 . 古 人郳 之謺 以郆 賢 主諨 嘉 賓 爲 二郅 難赣 者鄺 , 是 天 下 難赣 莫 難赣 , 而郝 反蒚 掌酦 于 今賥 日鄏 , 吾燉 所 以郆 請 名菼 於 斯 軒者鄺 也 .” 軒 旣贒 名菼 , 而郝 柳 子鄭 請 賦 詩 以郆 娛燏 賓 主諨 . 於 朴蒊 子鄭 賦 兎踢 罝 , 取 公敶 侯 干 城 也 ; 於 韓 子鄭 賦 鹿 嗚燋 , 取 德 音邩 孔敹 昭 也 ; 於 二郅 子鄭 賦 衡門葝 , 取 衡 門葝 之謺 下 可 以郆 棲 遲譛 也 ; 又 賦 蘀 兮 , 取 叔 兮 伯 兮 倡 予焗 和 女趃 也 . 韓 子鄭 拜 手 曰 : “ 不 敢 當 不 敢 當 .” 於 是 乎 二郅 子鄭 之謺 賢 也 嘉也 , 君昝 子鄭 難赣 之謺 .”-16 -


유몽몽인인 산문문에 있<strong>있어서</strong> 自鄻 <strong>得</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미와 <strong>실현양상</strong>데는「 이이난헌기」 와 같이이 전체체적으으로는 산문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압운운이이나 대우‧배비등을을 활용하여 운운문문적 미감을을 강화한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있다. 43) 어떤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도로 이이처럼운운문문적인인 수사를 기문문에 적용하였는지는 각각<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작품마다 면밀하게 고찰할 문문제지만,적어도 유몽몽인인이이 장장르적 관관습(convention)에 얽매이이지 않고 자유롭고 개성있있는 작품세계계를구축하고 있있다는 사실만큼은은 분명하게 확인인할 수 있있다.43) 「 釣諄 隱那 亭虞 記贲 」‧「 香 翠 窩燹 記贲 」‧「 贈謹 金賱 書 狀 朝蚷 天 記贲 」 등을을 들 수 있있다.-17 -


東 洋 學4.맺음음말한국 한문문산문문사를 서술함에 있<strong>있어서</strong> 16 세기 후반~17세기 초반은은 전환기적 성격을을 띠고있있다. 조선초기 관관각파<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에서 나타나는 軟煠 美葯 한 당송문문에 대한 대안으으로 등장장한 복고적 산문문-고문문사-은은 글이이란 무무엇인인가, 어떤 글이이 뛰어난가,좋은은 글을을 짓기 위위한 방법은은 무무엇인인가 등에 관관한 진지한 성찰과과 창작<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계계기를 제공공하였다.당시 유행한 고문문사는“ 文著 必 秦譵 漢 詩 必 盛 唐 ”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구호 아래 명대 문문단을을 풍미했던 전후칠칠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이이론과과 흡사할뿐만 아니라 실제 그들<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집이이 소개되면서 본격화하였다.이이런 점에서 조선중기 고문문사<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예적 성격에 대한 접근은은 전후칠칠자에 대한 이이해가 동반되어야 함은은 당연하다고할 수 있있겠다.그러나 정작 고문문사 작가로 규정되어온 이이들<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이이론과과 작품을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문문필진한”이이라는 구호가 무무색해질만큼 다양한 양상을을 띠고 있있음음을을 확인인하게된다. 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경우도 이이에 해당한다.그는 고문문사를 창도했다고 평가되는 윤윤근수나 최최립보다도 더욱 적극적으으로 복고적 산문문론을을 개진했는데,그 중심에는 전범적 산문문 텍스트에 관관한 논<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가 자리잡고 있있다.그 가운운데 특기할만한 점은은 구양수와 소식으으로 대표되는 송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과과 이이몽몽양과과 왕세정으으로 대표되는 명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문문장장에 대한 부정적인인 인인식인인데, 이이러한 주장장은은 전후칠칠자<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그것과과 매우 흡사하다.유몽몽인인은은 송문문이이弛郎 縵 支譃 離 한 병폐에 빠졌다고 보았으으며 명문문은은 복고를 주장장하였으으되 모<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와 도습에 머물물고 말았다고 진단하였다.하지만 유몽몽인인이이 궁궁극적으으로 추구하였던 목표는 한두 가지 전범적 텍스트가 지닌 문문예적 경계계에 도달하는 것이이 아니라 폭넓은은 독서와연찬을을 통해 자기만<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독특한 작품세계계를 확보하는 것이이었으으며,그런 점에서 송문문과과 명문문 역시 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독서목록<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일부를 차지하고 있있었다.유몽몽인인은은 이이를 자득이이라고 표현하였는데, 「 盆 菊昙 記贲 」‧「 贈謹 李 聖 徵讜 令 公敶 赴 京 序 」‧「 喚 仙 亭虞 記贲 」 와같이이 작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진정성이이 선명하게 표출출된 글과과 公敶 羊 傳蘡 과과 「 醉趤 翁燳 亭虞 記贲 」 를 요령있있게 결결합한「 寒 碧 堂 記贲 」, 「 赤蘘 壁 賦 」 로부터 취취<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하여 함<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를 풍부하게 구성한 「 無葆 盡譲 亭虞 記贲 」,압운운을을 사용하여 고답적인인 풍격을을 구현한「 二郅 難赣 軒 記贲 」등을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으로 실현된 자득<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경계계를 확인인할 수 있있었다.이이와 같이이 유몽몽인인<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자득<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산문문론과과 작품세계계는 이이 시기 복고적 산문문이이 그 형성과과정에 있<strong>있어서</strong>는 전후칠칠자로부터 자극받은은 점이이 있있었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조선 문문단 내부<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환경 속에서 비판적으으로 수용되었음음을을 보여준다.주제어 : 柳 夢萬 寅郻 , 自鄻 <strong>得</strong> , 散 文著 , 古 文著 , 秦譵 漢 古 文著 , 唐 宋 古 文著 , 前蘤 後 七跉 子鄭 , 韓 愈 , 柳 宗諒 元 , 歐旸 陽 修 ,蘇 軾 , 郒 夢萬 陽 , 王 世 貞蚇 , 文著 體 , 修 辭 , 文著 藝熸 美葯-18 -


유몽몽인인 산문문에 있<strong>있어서</strong> 自鄻 <strong>得</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미와 <strong>실현양상</strong>< 참고 문문헌>歐旸 陽 修 , 歐旸 陽 文著 忠 集讛 ; 余焘 冠斗 英熣 주편, 唐 宋 八蹕 大 家 全蘢 集讛 , 國昗 際蚦 文著 化 出 版蹏 公敶 司 , 1997.蘇 軾 , 蘇 東 坡踼 全蘢 集讛 ; 余焘 冠斗 英熣 주편, 唐 宋 八蹕 大 家 全蘢 集讛 , 國昗 際蚦 文著 化 出 版蹏 公敶 社 , 1997.柳 夢萬 寅郻 , 於 于 野 譚 ( 萬莺 宗諒 齋藤 本 ); 景 文著 社 영인인본, 1979.柳 夢萬 寅郻 , 於 于 集讛 ; 韓 國昗 文著 集讛 叢 刊 63, 민족문문화추진회, 1991.朱諶 熹 저, 黎焮 靖蚏 德 편, 朱諶 子鄭 語 類 ; 中謦 華 書 局昘 , 1994.崔 岦 , 簡 郑 集讛 ; 韓 國昗 文著 集讛 叢 刊 49, 민족문문화추진회, 1990., 漢 史 列照 傳蘡 抄 ; 奎貹 章酱 閣 酺藏 木萣 版蹏 本 古 952.01.琴質 東 呟 , 「 柳 夢萬 寅郻 散 文著 理郗 論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構旷 造諂 와 意邶 味葢 」, 韓 國昗 漢 文著 學 硏煗 究昃 34 집, 韓 國昗 漢 文著 學 會 ,2004.申 翼郱 澈 , 「 柳 夢萬 寅郻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文著 學 觀斣 과과 表 現 手 法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特踺 徵讜 」, 성균관관대 박사학위위논문문, 1995.宋 知譌 泳熑 , 「 於 于 柳 夢萬 寅郻 散 文著 硏煗 究昃 」, 고려대 석사학위위논문문, 2004.金賱 愚 政虪 , 「 月 汀虳 尹邉 根賚 壽 散 文著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性 格 」, 漢 文著 學 論趥 集讛 19 집, 槿賛 域焱 漢 文著 學 會 , 2001., 「 簡 郑 崔 岦 散 文著 硏煗 究昃 」, 단국대 박사학위위논문문, 2004., 「 崔 岦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山 水 屛 序 와 柳 夢萬 寅郻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無葆 盡譲 亭虞 記贲 를 통해 본 古 文著 辭 <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 文著 藝熸 美葯 」,漢 文著 學 論趥集讛 23 집, 槿賛 域焱 漢 文著 學 會 , 2005.※임.이이 논문문은은 2006년 5월월 30일에 투고 완료되어2006년 6월월 21일에 편집위위원원회에서 심사위위원원을을 선정하고2006년 7월월 15일까지 심사위위원원이이 심사하고2006년 7월월 25일에 심사위위원원 및 편집위위원원회 회<strong>의</strong><strong>의</strong>에서 게재가 결결정된 논문문-19 -


東 洋 學< 中謦 文著 提蚚 要 >柳 夢萬 寅郻 散 文著 中謦 ‘ 自鄻 <strong>得</strong> ’ 的蘏 內赾 涵 及賴 其贀 結 構旷 形 式*金賱 愚 政虪 44)複 古 文著 風 出 現 的蘏 十 六 世 紀贬 末菂 到 十 七跉 世 紀贬 初 , 可 以郆 說 在藗 韓 國昗 漢 文著 散 文著 史 中謦 具旦 有 轉蘿 換 期贔 之謺 意邶 義邽 。 主諨導 被 稱跗 爲 所 謂 古 文著 辭 的蘏 複 古 文著 風 之謺 作酂 家 , 一鄋 般 可 論 爲 尹邉 根賚 壽 、 崔 岦 、 柳 夢萬 寅郻 等 人郳 。 他跙 們葓 所 倡 導的蘏 是 具旦 有 細 密蒂 而郝 整虫 齊蚩 的蘏 文著 章酱 結 構旷 , 艱 險 而郝 深 晦 的蘏 文著 體 和 包躃 涵 爭藦 論 、 顚虅 覆 之謺 內赾 容 的蘏 新 型 散 文著 , 這蘂對 寫 作酂 的蘏 意邶 義邽 和 方 法 提蚚 供敵 眞譳 誠 的蘏 反蒚 思 之謺 機贘 。 因郹 此讧 自鄻 然煑 而郝 然煑 出 現 把踿 他跙 們葓 統踫 歸晄 爲 一鄋 個 流 派蹄 的蘏 傾 向 。但 是 細 細 探踃 討踥 他跙 們葓 的蘏 實 際蚦 作酂 品 就 不 難赣 發 現 他跙 們葓 風 格 之謺 逈 異郘 。柳 夢萬 寅郻 通踬 過斏 對 當 時 文著 壇 的蘏 傾 向 和 主諨 要 散 文著 作酂 品 的蘏 透踷 析 , 把踿 左諤 傳蘡 、 國昗 語 、 戰蘭 國昗 策 、史 記贲、 漢 書 與焥 韓 愈 、 柳 宗諒 元 之謺 文著 , 定虣 論 爲 學 習 寫 作酂 之謺 典蘣 範 。 另 一鄋 方 面菷 對 以郆 歐旸 陽 修 和 蘇 軾 爲 代 表的蘏 宋 代 之謺 文著 因郹 其贀 弛郎 張酥 支譃 離 、 又 以郆 李 夢萬 陽 和 王 世 貞蚇 爲 代 表 的蘏 明菾 代 之謺 文著 因郹 其贀 專蘩 事 模萕 擬邸 和 剽 竊虍 而郝 下 了極賓 其贀 否 定虣 之謺 評蹷 。 很 顯 然煑 柳 夢萬 寅郻 如焜 此讧 這蘂 般 當 做諫 散 文著 論 的蘏 依邲 據 和 替 代 的蘏 東 西 就 是 ‘ 自鄻 <strong>得</strong> ’。並 主諨 張酥 廣斯爲 效 仿 自鄻 秦譵 漢 至譓 唐 宋 的蘏 諸蚢 家 之謺 文著 使 其贀 融邛 爲 己贍 有 ,進譿 而郝 寫 出 不 拘旳 泥 於 任鄔 何 文著 章酱 且讟 具旦 有 千 變 萬莺 化 的蘏夢萬 幻 美葯 之謺 文著 。 在藗 論 及賴 朝蚷 鮮 中謦 期贔 複 古 散 文著 出 現 之謺 原 因郹 時 , 經 常 提蚚 及賴 的蘏 是 對 前蘤 後 七跉 子鄭 的蘏 揚 棄贗 問葖 題蚨 。但 是 柳 夢萬 寅郻 是 完爀 全蘢 按 照蚽 相 反蒚 的蘏 方 向 主諨 張酥 複 古 的蘏 。不 僅賕 如焜 此讧 柳 夢萬 寅郻 又 通踬 過斏 實 際蚦 作酂 品 對 ‘ 自鄻 <strong>得</strong> ’ 表 現 <strong>得</strong> 很 徹 底藯 。 沒萫 有 做諫 作酂 的蘏 修 辭 堆踭 砌 並 在藗 平蹴 易焳 而郝 淡 泊蒌的蘏 語 氣贚 中謦 透踷 露 了 遺 失 感 的蘏 盆 菊昙 記贲 ,適蘝 當 配 合 散 行 與焥 齊蚩 行 且讟 在藗 伸 縮 而郝 自鄻 然煑 的蘏 文著 章酱 中謦 描萳 寫 理 想 境界 之謺 內赾 心 矛萜 盾 的蘏 喚 仙 亭虞 記贲 , 巧旎 妙萱 借计 用 公敶 羊 傳蘡 和 醉趤 翁燳 亭虞 記贲 的蘏 寒 碧 堂 記贲 ,與焥 赤蘘 壁 賦 相 比理 論 上 更 上 一鄋 籌謀 的蘏 無葆 盡譲 亭虞 記贲 ,把踿 滕 王 閣 序 之謺 寓 意邶 在藗 韻 文著 化 的蘏 結 構旷 中謦 加 以郆 再藕 現 的蘏 二郅 難赣 軒 記贲 等 文著 , 對 在藗 柳 夢萬 寅郻 强 蛏調 的蘏 關斥 於 ‘ 自鄻 <strong>得</strong> ’ 的蘏 創 作酂 原 理 到 底藯 以郆 何 種諙 方 式 實 現 之謺 問葖 題蚨 上 表 現 <strong>得</strong> 非 常 明菾鮮 。關斥 鍵 語 : 柳 夢萬 寅郻 , 自鄻 <strong>得</strong> , 散 文著 , 古 文著 , 秦譵 漢 古 文著 , 唐 宋 古 文著 , 前蘤 後 七跉 子鄭 , 韓 愈 , 柳 宗諒 元 , 歐旸 陽 修 ,蘇 軾 , 郒 夢萬 陽 , 王 世 貞蚇 , 文著 體 , 修 辭 , 文著 藝熸 美葯* 檀 國昗 大 漢 文著 敎旐 育還 科斊 講 師-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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