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2013 봄호 - 프랑스문화예술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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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014 Views

90 ❚ 2013 프랑스문화예술연구 제43집 그에게 정체성은 결국 이동하는 것, 움직이는 것, 변화하는 것이다. 이 민자는 그의 정체성을 이민국에서 그의 문화경험을 통해 재정의 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에게 “자유로운 말의 공간” 6) 을 열어야 한다. 통행의 독자들은 등장인물들을 통해 작가가 바란 문화횡단의 실천 을 그 다양성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다양성은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세 개의 장소를 통해 구체화 된다. 등장인물들의 문화적응이 형성 된 아이티, 그들의 이민국이자 문화수용이 일어나는 몬트리올(Montréal), 그리고 문화적응과 문화수용의 중간항으로 기능하고 있는 마이애미 (Miami). 따라서 우리의 논의는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유랑생활을 통 해 어떻게 각자의 문화정체성 신화를 일구어나가고 있으며, 이 신화가 어 느 지점에서 에밀 올리비에의 문화횡단의 의미와 맞닿고 있는 가를 고찰 하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다. 2. 탈조국과 유랑인의 초상 소설은 브리지트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7) . 그녀가 태어나고 자랐던 6) Émile Ollivier, 《Quatre thèses sur la transculturation》, p. 89. 7) 통행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병렬되어 진행된다. 하나는 아메데(Amédée) 와 브리지트(Brigitte)를 중심으로 한 가공의 아이티 보트 피플의 이야기, 다른 하나는 몬트리올에 망명한 기자 노르망(Normand)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 나타나는 이중의 틀은 이렇다. 노르망(자신의 뿌리를 되찾기를 꿈꾸는 아이티 출신 퀘벡인)의 정체성 탐구인 동시에 아메데와 그 동료들의 서사(이들은 플로리다로 도주하기로 결 심한다)다. 노르망은 마이애미에서 보트 피플로 구출된 브리지트의 가공의 이야기를 접한다. 그는 브리지트의 이야기를 카세트에 녹음한다. 그러나 노르망이 마이애미에 서 심장마비로 죽자 부인인 레이다(Leyda)가 남편의 시체와 유품을 거두어 달라고 레 지(Régis)라는 친구에게 부탁한다. 레지는 오랫동안 카세트를 듣고, 카세트 속의 서로 다른 목소리들의 중개자가 되어 마이애미에서 최근까지 일어난 앙파로(Amparo)의 과 거 이야기, 아이티 국민의 기억에 대한 브리지트의 이야기, 노르망의 이야기(포르토 프랭스에서 보낸 그의 어린 시절, 몬트리올에서의 망명생활, 마이애미에서의 회복을 위한 체류 이야기가 담겨 있다)들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한다. 다성의 목소리 가 교차하는 두 이야기 속에서 각각의 사건이 전개되고 있고, 레지가 그 관계를 맺어 주고 있는 것이다.

에밀 올리비에(Émile Ollivier)의 통행Passages ❚ 91 아이티에 대한 기억이 현재시제로 묘사된다. 과거에 대한 기억의 현재가 현재의 기억처럼 생생하다. 바다가 있고, 섬이 있다. 섬에 대한 기억은 새롭지 않다. 코딱지 만한 땅도 조상들의 넋, 독립영웅들의 형상, 불가사의한 일들, 정 령들과 피의 신들이 몸을 숨기어 왔던 마법의 봉분으로 생각될 수 있다. 8) 스페인과 영국의 식민지군을 차례대로 격파하며 1804년 마침내 프랑 스로부터 독립하여 아이티(Haïti)란 국명을 갖게 하고 식민지란 처참하고 참담한 기억을 희석시킬 수 있게 해준 조상들과 신들의 가호는 아이티를 희망과 꿈과 행복을 가꾸어갈 수 있는 가능성의 땅으로 만들었을 것이 다. 그래서 브리지트와 아메데(Amédée Hosange) 부부와 같은 농부들에 게 이 땅은 그들의 뿌리가 사는 곳이자 그 줄기가 튼실하게 자라 그들의 정체성을 굳건하게 세우는 장소이다. 그래서 이 땅은 그들의 존재 이유 이고, 이 땅을 그 누구에게도 넘길 수가 없으며, 함부로 유용할 수 없다. 이 땅은 그들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 미래의 땅에 대한 기억의 현재는 그러나 곧 불행의 기억으로 변한다. 아이티의 산과 바다 사이를 채우고 있는 포르타레퀴(Port-à-l'Écu)같은 작은 마을들은 예전의 푸르고 비옥한 땅은 사라지고 “저주받은 곳”(PAS, 19)이 되었으며,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하여 죽은 영혼들로 뒤덮인 마을이 되었다”(PAS, 25). 미국 자본주의 세력의 침입으로 아메데와 같은 농부들의 경작지가 뒤발리에 정권의 후 원을 받은 “Standard Fruit Company”(PAS, 28)의 손에 넘어갔던 것이다. 아무런 대항책도 강구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에 게 남은 유일한 해결책은 고국을 떠나는 길 밖에 없다. 아메데의 말처럼 고국을 떠나는 행위가 “땅 없는 민족”(PAS, 31)으로 추락하는 고통이 되 8) Émile Ollivier, Passages, Paris, Le serpent à plumes, 2001, p. 13. 그 이하 PAS로 표기.

에밀 올리비에(Émile Ollivier)의 통행Passages ❚ 91<br />

아이티에 대한 기억이 현재시제로 묘사된다. 과거에 대한 기억의 현재가<br />

현재의 기억처럼 생생하다.<br />

바다가 있고, 섬이 있다. 섬에 대한 기억은 새롭지 않다. 코딱지<br />

만한 땅도 조상들의 넋, 독립영웅들의 형상, 불가사의한 일들, 정<br />

령들과 피의 신들이 몸을 숨기어 왔던 마법의 봉분으로 생각될 수<br />

있다. 8)<br />

스페인과 영국의 식민지군을 차례대로 격파하며 1804년 마침내 프랑<br />

스로부터 독립하여 아이티(Haïti)란 국명을 갖게 하고 식민지란 처참하고<br />

참담한 기억을 희석시킬 수 있게 해준 조상들과 신들의 가호는 아이티를<br />

희망과 꿈과 행복을 가꾸어갈 수 있는 가능성의 땅으로 만들었을 것이<br />

다. 그래서 브리지트와 아메데(Amédée Hosange) 부부와 같은 농부들에<br />

게 이 땅은 그들의 뿌리가 사는 곳이자 그 줄기가 튼실하게 자라 그들의<br />

정체성을 굳건하게 세우는 장소이다. 그래서 이 땅은 그들의 존재 이유<br />

이고, 이 땅을 그 누구에게도 넘길 수가 없으며, 함부로 유용할 수 없다.<br />

이 땅은 그들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 미래의 땅에 대한 기억의 현재는<br />

그러나 곧 불행의 기억으로 변한다. 아이티의 산과 바다 사이를 채우고<br />

있는 포르타레퀴(Port-à-l'Écu)같은 작은 마을들은 예전의 푸르고 비옥한<br />

땅은 사라지고 “저주받은 곳”(PAS, 19)이 되었으며, “알아볼 수 없을 만큼<br />

변하여 죽은 영혼들로 뒤덮인 마을이 되었다”(PAS, 25). 미국 자본주의<br />

세력의 침입으로 아메데와 같은 농부들의 경작지가 뒤발리에 정권의 후<br />

원을 받은 “Standard Fruit Company”(PAS, 28)의 손에 넘어갔던 것이다.<br />

아무런 대항책도 강구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에<br />

게 남은 유일한 해결책은 고국을 떠나는 길 밖에 없다. 아메데의 말처럼<br />

고국을 떠나는 행위가 “땅 없는 민족”(PAS, 31)으로 추락하는 고통이 되<br />

8) Émile Ollivier, Passages, Paris, Le serpent à plumes, 2001, p. 13. 그 이하 PAS로<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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