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 - 한국브레히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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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리미니 프로토콜’과 다큐멘터리 연극 김성희(계원대) 다큐멘터리는 실제 상황 actuality을 다루며, 어떤 면에서는 실재 the real를 다루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실재’란 것이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훨씬 심오한 것이다. 궁 극적으로 우리가 조우할 수 있는 유일한 실재란 심층적인 해석이다. 1. 들어가는 말 1.1. 현실을 무대로 - 존 그리어슨 무대는 더 이상 전문배우들만이 독점하는 영역이 아니다. 어느덧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정제되지 않은 몸짓을 무대에서 만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그게 아니라 면, 거친 비전문 연기자들의 존재감은 극장과 우리의 시선을 낯설게 하는 전략으로 활용될 수 있는 걸까.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쉬쉬팝 She She Pop의 서약 Testament(2011)에서 배우들은 자신들의 실제 아버지와 함께 무대에 서서 세대 간의 갈등을 논하고, 벤야민 베르동크 Benjamin Verdonck 역시 Wewilllivestorm(2005)에 서 본인의 실제 아버지(헤르만 베르동크)와의 묘한 이해관계를 무대 위에서 드러낸 다. 1973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를 재현하는 마시모 푸를란 Massimo Furlan의 1973(2010)에 출연한 한 사회학자는 즉흥적으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사회학적 의미를 성찰한다. 일종의 ‘메타연극’이라 할 수 있는 이들 작품은 텍스트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연극적 장치를 사용하는 대신 연극의 텍스트에 대한 성찰을 진행하는 과정을 무대에서 보여준다.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과 다큐멘터리 연극<br />

<strong>김성희</strong>(계원대)<br />

다큐멘터리는 실제 상황 actuality을 다루며, 어떤 면에서는 실재 the real를 다루기도 한다.<br />

하지만 진정한 ‘실재’란 것이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훨씬 심오한 것이다. 궁<br />

극적으로 우리가 조우할 수 있는 유일한 실재란 심층적인 해석이다.<br />

1. 들어가는 말<br />

1.1. 현실을 무대로<br />

- 존 그리어슨<br />

무대는 더 이상 전문배우들만이 독점하는 영역이 아니다. 어느덧 우리는 평범한<br />

사람들의 정제되지 않은 몸짓을 무대에서 만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그게 아니라<br />

면, 거친 비전문 연기자들의 존재감은 극장과 우리의 시선을 낯설게 하는 전략으로<br />

활용될 수 있는 걸까.<br />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쉬쉬팝 She She Pop의 서약<br />

Testament(2011)에서 배우들은 자신들의 실제 아버지와 함께 무대에 서서 세대 간의<br />

갈등을 논하고, 벤야민 베르동크 Benjamin Verdonck 역시 Wewilllivestorm(2005)에<br />

서 본인의 실제 아버지(헤르만 베르동크)와의 묘한 이해관계를 무대 위에서 드러낸<br />

다. 1973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를 재현하는 마시모 푸를란 Massimo Furlan의<br />

1973(2010)에 출연한 한 사회학자는 즉흥적으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사회학적<br />

의미를 성찰한다. 일종의 ‘메타연극’이라 할 수 있는 이들 작품은 텍스트의 내용을<br />

전달하기 위해 연극적 장치를 사용하는 대신 연극의 텍스트에 대한 성찰을 진행하는<br />

과정을 무대에서 보여준다.


142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이러한 시도는 무용에서도 이루어진다. 알랭 플라텔 Alain Platel과 프랑크 판 랙케<br />

Frank Van Laecke가 공동 연출한 가드니아 Gardenia(2010)에서는 성전환 수술을<br />

실제로 했거나 고려한 경험이 있는 아홉 명의 은퇴한 남성들이 등장, 여성성과 노화<br />

과정이라는 두 상충된 몸의 변화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자전적으로 펼친다. 제롬 벨<br />

Jérôme Bel은 베로니크 두아누, 루츠 포르스터 등 평생 무대에 서왔던 무용수들을 무<br />

대에 등장시켜 스펙터클을 연출하는 대신 그들의 인생을 이야기하게 한다.<br />

국내 작품에서도 연기나 무용 경력이 없는 ‘일반인’이 무대에 등장하여 자신의 이<br />

야기를 풀어내는 광경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임민욱의 불의 절벽(2011)에서는 고<br />

문 끝에 간첩으로 몰려 19년 옥살이를 했던 김태룡의 자기 진술을 들려준다. 서현석,<br />

조전환의 ㅣㅣㅣㅣㅁ(2010)에서 목수 조전환은 무대에서 집을 짓는 과정을 직접<br />

보여주며 집에 관한 본인의 생각을 털어 놓는가 하면, 김황의 모두를 위한 피짜<br />

(2011)에서는 탈북자들이 등장하여 북쪽의 가족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낭독한다. 안무<br />

가 안은미의 무용 작품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2011)에서는 20여명의 ‘시골 할머니’<br />

들이 등장, 무대에서 ‘막춤’을 선보인다.<br />

이렇게 전문적으로 훈련되지 않은 신체의 거칠면서도 자연스러운 몸짓을 무대에<br />

서 보게 되는 것은 연극적 체험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무대와 연극 언어의 관습에<br />

대한 어떠한 새로운 담론이 이를 통해 도출될 수 있을까? 결국 이러한 시도들을 통<br />

해 재정립할 수 있는 연극의 매체적 특징이란 무엇일까?<br />

무대 밖의 현실을 무대 위로 끌어들이는 일련의 시도들은 오늘날 ‘다큐멘터리 연<br />

극 documentary theater’이라는 개념으로 소개되고 있다. 본 연구는 오늘날 ‘다큐멘터<br />

리 연극’이 연극의 본질에 대해 어떠한 질문을 던지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br />

1.2. 리미니 프로토콜<br />

다큐멘터리 연극이 오늘날 제기하는 문제들을 가장 지속적으로 성찰하는 극단이<br />

있다면, 리미니 프로토콜 Rimini Protokoll일 것이다. 전문 배우나 무용수를 배제함에<br />

가장 적극적인 사례이기도 한 리미니 프로토콜은 슈테판 카에기 Stefan Kaegi, 헬가<br />

르트 하우크 Helgard Haug, 다니엘 베첼 Daniel Wetzel의 삼인으로 구성된 창작 집단<br />

이다. 이들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담론적 기반을 다진 한스 티스 레만 Hans-Thies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과 다큐멘터리 연극 143<br />

Lehmann이 교수로 재직한 기센대학의 공연과학 학과 Institut für Angewandte<br />

Theaterwissenschaft에서 수학하였고, 이들에 대한 평가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맥락<br />

에서 이루어져 온 것은 필연적이다.<br />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맥락에서 우선적으로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는 이 극단의 특<br />

징은 작업 방식에 있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서, 레만은 기존<br />

의 희곡에 의존하는 태도로부터 탈피하고 텍스트를 다른 구성 요소들과 동등한 것으<br />

로 접근하는 성향을 이야기한다. 1) 리미니 프로토콜을 이루는 세 사람의 역할은 더<br />

이상 희곡을 구심점으로 삼지 않는 ‘포스트드라마적’ 지향점을 그대로 반영한다. 극<br />

단의 동등한 일원으로서 세 사람의 기능은 연출이나 희곡, 미술 등의 특정한 영역으<br />

로 분화되어 있지 않고 모두가 연출가이자 극작가로서의 역할을 맡는다. 즉, 누군가<br />

가 희곡을 쓰고 또 다른 누군가가 이를 해석하며 연기자들의 개성을 이끌어내는 기<br />

존의 연극 제작 과정은 리미니 프로토콜에 적용되지 않는다. 분업적인 제작 과정을<br />

배제하는 유기적이고 논증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작품이 구상, 제작, 완성되는 것이다.<br />

하나의 허구적 혹은 극적 상황을 전제하고 이를 언어적으로 장식하는 대신 그들은<br />

작품에 참여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현실을 작품으로 이끌어낸다. 수직<br />

적인 위계질서는 당연히 없거니와, 구성원들 간의 소통은 동등한 위치에서의 즉각적<br />

이거나 즉흥적인 발상의 주고받음으로 이루어진다. 2)<br />

이러한 대화적이고 개방적인 제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구성적 기반이 바로<br />

참여자들의 삶이다. 그들은 보통 하나의 주제에 연관되는 일련의 실제 인물들을 인터<br />

뷰하면서 작품을 구상, 발전시키며, 이러한 대화의 과정은 자연히 ‘캐스팅’ 과정이 된<br />

다. 이렇게 ‘캐스팅’된 출연자는 대부분 전문적으로 배우 훈련을 받은 바가 없는 일<br />

반인들일 뿐 아니라, 연극 혹은 다른 창작 영역에 연관된 일을 한 적도 없는 사람들<br />

이다. 그들은 특정한 인물을 연기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 리미니 프로토콜<br />

이 출연자들을 ‘전문인 expert’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무대에 선 자기 자신에 관<br />

1) Hans-Thies Lehmann: Postdramatisches Theater. Frankfurt/M 1999. S. 86-87.<br />

2) Florian Malzacher: Dramaturgies of Care and Insecurity - The Story of Rimini Protokoll. In:<br />

Miriam Dreysse(ed.)(trans.: Daniel B. Rogers, Ehren Fordyce, Geoffrey Garrison, Mat Hand, Sophia<br />

New, Walter Suttcliffe): Experts of the Everyday: The Theaters of Rimini Protokoll. Berlin 2008,<br />

pp. 14-43.


144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해서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전문적’인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을 ‘일<br />

반인’ 혹은 ‘비전문 배우’라 칭하지 않고 ‘전문인’이라는 용어를 고집하는 것은 배우/<br />

일반인, 전문/비전문, 연극/현실 등의 이분법적인 양립을 해체하는 전환적 관점을 반<br />

영하는 것이다.<br />

2000년부터 리미니 프로토콜이 지향해온 연극적 접근이 ‘다큐멘터리 연극’이라는<br />

용어로 설명되어 온 것은 이렇게 연극 밖의 현실로 무대 위의 사건을 재배치하려는<br />

노력 때문이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다큐멘터리 연극’ 작품들은 현실적인 것들을 무<br />

대 위로 불러들임으로써 환영을 제거한다기보다는 연극의 환영적 기반에 대한 성찰<br />

적 거리를 제안하고 연극의 본질에 대한, 연극과 삶의 상호 연관성에 대한 진지한 고<br />

민을 소통한다.<br />

2. 다큐멘터리 연극의 역사적 맥락<br />

2.1. ‘다큐멘터리’의 원형적 의미<br />

아방가르드의 근원적 기반은 현실이다. 현실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부터 벗어나<br />

현실과 즉각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태도야말로 아방가르드 예술의 기반이다. 프랑<br />

스 혁명을 계기로 앙리 드 생시몽 Henri de Saint-Simon과 올린데 로드리게스 Olinde<br />

Rodrigues가 ‘척후병’이라는 의미의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한 이<br />

후,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아방가르드’는 실질적인 행동적 실천과 늘 연관되었다. 3)<br />

현실과 행동이라는 19세기 아방가르드의 전략적 목적의식에 가장 밀접하게 부합<br />

하는 하나의 형식이나 개념이 있다면, ‘다큐멘터리’이다. 영상연구가 서현석은 다큐<br />

멘터리와 아방가르드의 접점에서 라는 논문에서 다큐멘터리와 아방가르드 사이에 존<br />

재해 왔던 상호 배제적인 관계는 2차 대전 전후의 시대적 정황에 따른 부수적인 역<br />

효과이며, 둘 사이에는 보다 본질적인 공통적 문제의식이 공유됨을 밝힌다. 바로 현<br />

실과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그것이다.<br />

3) 크리스토퍼 인네스(김미혜 옮김): 아방가르드 연극의 흐름: 1892-1992. 현대미학사 1997.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과 다큐멘터리 연극 145<br />

‘다큐멘터리 연극’이라는 용어를 고찰함에 있어서 결정적 좌표가 되는 바는 1927<br />

년 ‘다큐멘터리’라는 개념을 영화에 처음으로 도입한 존 그리어슨 John Grierson의<br />

제안으로, 그가 간단하게 정의내리는 ‘다큐멘터리’란 “현실의 창의적 처리 creative<br />

treatment of reality”이다. 4) 그리어슨은 다큐멘터리의 첫 번째 원칙들 이라는 기념비<br />

적인 글에서 다큐멘터리가 확보하는 매우 중요한 하나의 속성을 강조하는데, 그의 관<br />

점은 오늘날 ‘다큐멘터리’의 의미를 조명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기반이 된다. 그가 강<br />

조하는 다큐멘터리의 핵심은 바로 타성적 태도로부터의 파격이다. 5) 그리어슨이 다큐<br />

멘터리라는 개념을 창발적으로 활용하는 근원적인 이유 자체가 기존의 영화가 가진<br />

환영성 illusionism에 대한 반향의 의지 때문이다. 그리어슨이 난색을 표하는 유형의<br />

영화는 ‘스튜디오 영화’로, 인간의 삶이 작위적으로 재구성되는 방식이 반복될 때 예<br />

술은 타성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삶 그 자체로부터 발견하고 선택하는 것들이<br />

야말로 새롭고 활기찬 예술 형식이 될 수 있다” 6)는 것이다.<br />

이러한 믿음을 추진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으로서 그리어슨은 숙달된 전문 배우나<br />

작위적인 배경이 아닌 현장의 “원래의 original 혹은 태생의 native” 인물이나 장소를<br />

다룰 것을 촉구한다. 그것은 “그들이 스튜디오의 관점에서 구성하거나 스튜디오의<br />

기계적인 과정을 통해 도출하는 것보다 실제 세계에 대해 훨씬 더 심오하고 경이로<br />

운 해석의 힘을 갖기 때문이다.” 7) 정제되지 않은 거친 재료들이야말로 도시의 특정<br />

한 삶에 길들여진 배우들이 지배하는 스튜디오 체계의 피상적인 장치가 근접할 수<br />

없는 친밀한 지식을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br />

오늘날 ‘다큐멘터리’라는 용어는 현실을 전달하는 특정한 관습을 일컫기 위해 사<br />

용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원형적인 맥락에서는 기존의 환영적 재현 방식에 대한<br />

전복과 저항의 의지를 실행하는 전략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서현석이 지적하듯, “현<br />

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능동적 참여는 다큐멘터리가 아방가르드와 공유하는 본질”인<br />

것이다. 8)<br />

4) 재인용: Forsyth Hardy: Introduction, In: Forsyth Hardy(ed.): Grierson on Documentary. New York<br />

and Washington 1971, p. 13.<br />

5) John Grierson: First Principles of Documentary. In: Hardy(ed.): Grierson on Documentary, pp.<br />

145-156.<br />

6) Ebd., p. 146.<br />

7) Ebd., p. 147.


146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그리어슨이 피력한 다큐멘터리의 이러한 기능은 영화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나, 오<br />

늘날 기존 연극 관습에 대한 ‘다큐멘터리 연극’을 맥락화 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사적<br />

단서가 된다. 즉, 환영적 재현 장치에 대한 저항적이고도 대안적인 구체적 전략으로<br />

‘다큐멘터리 연극’은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br />

우리는 여기서 또한 그리어슨이 다큐멘터리를 규정한 방식에 좀 더 세밀하게 귀<br />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가 다큐멘터리를 정의내림에 있어서 ‘창의적’이라는 단서를<br />

다는 이유는 그가 구상하는 영화의 형태를 ‘실제영화 actuality film’나 ‘뉴스릴<br />

newsreel’ 혹은 ‘레포타주 reportage’와 구분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즉, ‘다큐멘<br />

터리’는 사건을 기록한 자료나 기록, 혹은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과는 분명하<br />

게 차별이 되는 형식이다. 그가 말하는 ‘창의성’의 경계와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에<br />

대해서는 좀 더 세밀한 고찰이 필요하지만, 연극의 맥락에서 중요해지는 지점은, 단<br />

지 현실을 즉각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 아닌, 현실에 대한 성찰과 재현방식에 대한<br />

고민을 전제하는 의미로서 ‘다큐멘터리 연극’에 접근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br />

영화의 역사에서 그 파격의 수사를 상실했던 ‘다큐멘터리’라는 개념이 오늘날 ‘연<br />

극’이라는 개념과 만나면서 새롭게 형식적 파격에 대한 기표로 재활하게 된 것은<br />

1920-30년대 영화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에서는 잊힌 아<br />

방가르드적 참여 영역으로서의 현실을 환기시키는 고무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다큐<br />

멘터리’라는 말로써 그리어슨이 의도했던 예술의 타성에 대한 급진적 공략은 오늘날<br />

연극 무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br />

2.2. 피스카토르의 정치극<br />

현실적 혹은 다큐멘터리적인 구성 요소들이 연극 작품을 통해 무대화되는 것이 오<br />

늘날의 새로운 혁신은 물론 아니다. 미술이론가 할 포스터 Hal Foster에 따르면, 시각<br />

미술에서 현실에 대한 인류학적 관심이 집중되어 나타난 시기는 역사적으로 아방가<br />

르드 미술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20년대와 1960년대, 그리고 1990년대이다. 9) 우<br />

8) 서현석: 다큐멘터리와 아방가르드의 접점에서 - 수행적 다큐멘터리에 관한 수행적 단상들. 실린<br />

곳: 한국영화학보. 43호(2010), 229-271쪽.<br />

9) 할 포스터(이영욱, 조주연, 최연희 옮김): 실재의 귀환. 경성대학교출판부 2003.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과 다큐멘터리 연극 147<br />

연치 않게도, 연극에서 ‘다큐멘터리 연극’ 혹은 그 전형이 나타난 것은 바로 이 시기<br />

들이다.<br />

토마스 이르메 Thomas Irmer는 1920년대와 1960년대 독일 연극에서의 다큐멘터리<br />

적인 연출방식들이 오늘날의 새로운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전형이 되면서도, 오늘날<br />

에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과 태도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인지한다. 10) 그가 오<br />

늘날의 다큐멘터리 연극의 역사적 전형으로 꼽는 사례들은 1920년대 에르빈 피스카<br />

토르 Erwin Piscator가 시도한 ‘정치연극 politisches Theater’과 1960년대 중반에 확산<br />

된 다큐멘터리 연극이다. 이 두 시기에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들이 연극의 재료로<br />

활용된 것은, 포스터의 말대로, 정치 상황의 급격한 변화가 현실에 대한 관심을 고조<br />

시킴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br />

유태인인 피스카토르는 1919년부터 1931년에 망명을 하기까지 반군국주의와 평화<br />

주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이념적으로 뚜렷한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br />

다. 1925년에 초연된 그럼에도 불구하고! Trotz alledem!에 이르러 무르익은 형식<br />

은, 역사에 관한 다양한 형태의 기록물들을 드라마와 혼합하는 것이었다. 그의 표현<br />

을 그대로 옮기자면, 그의 작품은 “역사적으로 인증된 연설, 논문, 신문에서 오려낸<br />

것, 구호, 전단, 전쟁과 혁명의 사진과 필름, 역사적 인물들과 장면들로 이루어진 커<br />

다란 몽타주” 11)였다. 특히 가장 논란 많은 구성 방식은 자료 영화를 무대에 영사하여<br />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이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일종의 입증 자료로 활용되면서 “무<br />

대사건과 역사적 현실 사이에서 의식적인 연결부분”으로 작용하였다. 12) 그는 드라마<br />

와 사실적인 기록을 충돌시킴으로써 전통 연극의 폐쇄적인 구조를 배제하며, 현실 정<br />

치에 대한 비판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br />

이르메가 중요시여기는 피스카토르의 업적은 역사에 대한 냉철한 문제의식이다.<br />

피스카토르의 연출 방식에서 또 하나의 특징적인 부분은 실존하는 역사적 인물을 주<br />

인공을 삼았다는 점으로, 그의 작품은 주인공의 행동에 대한 분석적 관점을 관객이<br />

10) Thomas Irmer: A Search for New Realities: Documentary Theatre in Germany. In: The Drama<br />

Review. Vol.50 No.3 (Fall 2006). pp. 16-28.<br />

11) 에르빈 피스카토르: 기록극. 실린 곳: 만프레드 브라우넥(김미혜, 이경미 옮김): 20세기 연극 - 선<br />

언문, 양식, 개혁모델. 연극과인간 2001, 335쪽.<br />

12) 이상면: 에르빈 피스카토르. 실린 곳: 김미혜, 남상식, 안치운, 이상면, 장인숙: 20세기 전반기 유<br />

럽의 연출가들. 연극과인간 2001, 272쪽.


148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갖도록 유도했고, 이를 통해 역사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공하고자 했다.<br />

물론 피스카토오가 활동하기 시작한 시기는 영화로부터 ‘다큐멘터리’라는 용어 자<br />

체가 오늘날의 의미로 개념화되지 않은 때였고, 그가 그의 작품을 일컬으며 사용한<br />

‘다큐멘터리’라는 단어는 ‘기록’의 의미에 가까운 것이었으므로, 그 이후에 구체적으<br />

로 형식화, 담론화되고 꾸준한 변화를 겪으며 오늘날까지 이른 ‘다큐멘터리’라는 개<br />

념에는 완전하게 부합하지 않는 면들이 있다. 리미니 프로토콜이 역사적으로 중요한<br />

실제 인물의 행적을 재현하는 거시적 접근 대신 일반인이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br />

직접 기술하도록 한 것은 피스카토르와 비교할 때 미시적인 역사에 대한 보다 즉각<br />

적이고 직접적인 접근이라 하겠다.<br />

또한, 김형기가 말하듯, 피스카토르가 현실의 기록물들을 연극의 내용으로 활용한<br />

것은 계급투쟁의 정당성을 성립시키고, 역사적 현실에 대한 자신의 관점에 신뢰성을<br />

부여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13) 이는 현실을 기록, 재현하는 장치 자체에 대한 비판적<br />

성찰을 중시하는 현대 다큐멘터리의 쟁점과는 분명 현실과 매체에 접근하는 기본적<br />

인 철학적 태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다만, 역사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 의식으로<br />

부터 출발하여 무대를 개방적인 담론의 장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분명 피스카토<br />

르의 시도는 오늘날의 다큐멘터리 연극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br />

2.3. 1960년대의 다큐멘터리 연극<br />

이르메와 김형기 등 다큐멘터리 연극의 연구가들이 오늘날의 새로운 다큐멘터리<br />

연극의 중요한 전형으로 거론하는 1960년대의 다큐멘터리 연극은 독일에서 롤프 호<br />

흐후트 Rolf Hochhuth, 하이나 킵하르트 Heinar Kipphardt, 페터 바이스 Peter Weiss<br />

등의 극작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에 의한 다큐멘터리 연극 역시 피스카토르와<br />

마찬가지로 매우 구체적인 정치적 노선을 취하였고, 이는 정치적으로 모호한 기존의<br />

연극에 대한 반향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삼은 작품의 주제들은 전범 재판, 홀로코스<br />

트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태도, 미국의 핵무기 프로그램 등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하<br />

13) 김형기: 일상의 퍼포먼스화 - 혹은 뉴 다큐멘터리 연극 - 리미니 프로토콜의 연출작업을 중심으<br />

로. 실린 곳: 김형기, 심재민, 김기란, 최영주, 최성희, 이진아, 파트리스 파비스: 포스트드라마 연<br />

극의 미학. 푸른사상 2011, 213-242쪽.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과 다큐멘터리 연극 149<br />

면서도 충분히 공론화되지 않은 문제들로, 이들의 극작은 사건에 관한 실제 문서들을<br />

기반으로 과거의 역사를 재현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바이스는 1968년의 선언문을 통<br />

해 그가 추구한 다큐멘터리 연극의 방법론에 대해 다음과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br />

다큐멘터리 연극은 사실을 보도하는 연극이다. 회보의 의사록, 파일, 서신, 통계표, 주식매<br />

매 공식성명, 은행과 사업보증 대차대조표, 공식적 사건 실록, 연설문, 인터뷰, 공인의 성명,<br />

보도자료, 라디오나 사진 보도, 영화 등 현재를 증언하는 모든 매체들이 연극 제작의 기반<br />

이 된다. 다큐멘터리 연극은 그 어떤 날조를 배제하며, 오직 인증된 기록 자료들만을 변형<br />

없이 활용하여 형식을 구성하고, 무대로부터 이를 유포한다. 14)<br />

이렇게 공인된 자료들을 활용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현실에 대한 예술의 참여를 적<br />

극적으로 실현하는 것으로, 그들은 개별적인 작품에서 다루어진 사안들이 무대를 떠<br />

나 실질적인 탐구나 담론화로 이루어지도록 종용하였다. 다분히 선동적인 기능을 위<br />

한 정치적 연극으로서의 이 작품들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분명한 판단이나 관점을<br />

취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김형기의 표현대로, 연극 무대는 “역사에 대한 법정”으로<br />

기능하였다. 15)<br />

1960년대의 정치적 목적의식이 강한 다큐멘터리 연극은 극작과 연출의 분리된 기<br />

능을 활용하는 대신 두 영역의 창작 과정을 일치시키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br />

서 오늘날의 포스트드라마 연극과는 다른 제작 기반을 갖는다. 이러한 차이는 이미<br />

완성된 대본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극작을 연출 과정과 일치시키는 리미니 프로토<br />

콜에 의해 더욱 부각되기도 한다.<br />

또한 지난 역사에 대한 반성이나 논쟁보다는 현재에 대한 미시적 접근을 중시하는<br />

리미니 프로토콜의 태도는 두 시대간의 차이를 현저하게 나타낸다. 후자에 있어서,<br />

국가보다는 소공동체가, 계몽이나 선동보다는 자발적 사유와 성찰이, 결과보다는 과<br />

정이 연극적 체험의 더 핵심적인 지식 기반으로 여겨지는 것이다.<br />

14) Peter Weiss: Notizen zum dokumentarischen Theater. In: Joachim Fiebach(Hrsg.): Manifeste<br />

europäischen Theaters: Grotowski bis Schleef. Berlin 2003. S. 67–73.<br />

15) 김형기: 일상의 퍼포먼스화 - 혹은 뉴 다큐멘터리 연극 - 리미니 프로토콜의 연출작업을 중심으<br />

로, 221쪽.


150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3. 다큐멘터리 연극의 새로운 지평<br />

3.1. ‘사유’로서의 연극<br />

리미니 프로토콜의 작품들은 “현실의 창의적 처리”라는 다소 느슨한 그리어슨의<br />

정의에 구체적인 조직의 결을 부여한다. 그리어슨이 강력하게 제안한 “원래의” 혹은<br />

“태생적인” 인물들이 이끌어내는 삶의 해석이 오늘날 리미니 프로토콜에 의해 연극<br />

에서도 구현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br />

실적인 것들을 ‘처리’하는 리미니 프로토콜만의 접근 방법을 함축할 수 있는 단어<br />

가 있다면, ‘사유’이다. 이는 한스 티스 레만이 리미니 프로토콜의 작품 세계를 분석<br />

하면서 제안한 바로, 그들의 창작 방법론의 연극의 근원에 대한 성찰을 함의하고 있<br />

다는 것이다. 레만은 그 근거로 ‘연극 theater’과 ‘이론 theoria’이 동일한 어원적 근원<br />

을 갖는다는 점을 제시하며, 두 영역이 본래 서로 이질적인 활동이 아니라 본질적으<br />

로 동일함을 강조한다. 실질적으로 ’연극‘은 곧 ’사유‘라는 것이다. 레만은 이에 대해<br />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br />

‘사유 thought’ 혹은 ‘이론 theoria’은 언제나 어떤 형태로든 ‘보는 looking at’ 것과 불과분의<br />

관계에 있어 왔다. 사유는 항상 ‘관점’이나 ‘인식’ 혹은 ‘감별’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론’은<br />

생각들의 상호관계를 ‘눈앞에’ 배열하는 과정이며, 이로써 ‘통찰력 insight’을 구축한다. ‘이<br />

론’은 ‘연극’과 근원적으로 깊게 관련되어 있다. 16)<br />

리미니 프로토콜의 ‘연극’은 ‘탐구’ 그 자체다. 그리어슨이 말한 “세계에 대한 해<br />

석”과 연관 지을 수 있기도 한 이들의 방법론은 “원래의” 인물이 펼쳐내는 삶에 대<br />

한 해석으로부터 사유의 층위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즉, 사유와 현실의 역동적인 관<br />

계가 곧 리미니 프로토콜의 작업 영역이 된다.<br />

16) Lehmann: Theory in Theatre? - Observations on an Old Question. In: Experts of the Everyday: The<br />

Theaters of Rimini Protokoll, pp. 153-154.


3.2. 스펙터클을 넘어<br />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과 다큐멘터리 연극 151<br />

프랑스의 큐레이터이자 미술 이론가 니콜라 부리오 Nicolas Baurriaud는 기 드보르<br />

Guy Debord가 경고한 스펙터클의 헤게모니가 오늘날 오락 매체를 통해 재구성되고<br />

있음을 직시하면서, 이제는 소비자가 단지 스펙터클을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것에 그<br />

치지 않고 스펙터클의 일부로 참여하는 현상을 거론한다. 17) 리얼리티 텔레비전이 그<br />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는데, 이러한 참여형 스펙터클은 창작과 소비의 경계를 허<br />

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사실상 소비자의 시선과 쾌락을 기반으로 하는 스펙터<br />

클 사회의 권력을 도리어 강화하는 형국으로 진행된다는 특징을 간과할 수 없다는<br />

것이다. 소비자는 스펙터클을 치장하는 ‘액스트라’가 되어 스스로의 이미지를 소비하<br />

게 된다. 부리오가 말하는 ‘엑스트라들의 사회’는 이렇게 소비와 참여를 혼재시킴으<br />

로써 스펙터클의 권력적 작용을 재창출하는 오늘날의 이미지 소비 형태를 일컫는 말<br />

이다. 엑스트라들의 사회에서 개인은 “자유에 대한 시간제 대체물”로 전락한다. 18)<br />

리미니 프로토콜의 작품에 등장하는 실제 인물들이 리얼리티 쇼의 등장인물들과<br />

구분되는 지점은 바로 ‘사유’에 있다. 리얼리티 쇼 역시 실존 인물들이 자기 자신을<br />

재현하면서 대중 매체의 폐쇄적인 시청각적 재현 체제를 일상적 공간으로 확장한다<br />

는 점에서 리미니 프로토콜의 ‘다큐멘터리 연극’과 공유되는 방법론적 요소들을 지닌<br />

다. 작위적 연출보다는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실제 상황에 더 비중을 둔다는 점 자체<br />

가 리얼리티 쇼가 지닌 ‘다큐멘터리적’ 묘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과 외모를 자<br />

본 가치로 환산하는 경쟁 사회의 극단을 리얼리티 쇼에서 볼 수 있다면, 리미니 프로<br />

토콜의 공연 작품들은 그러한 사회적 장치들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사유의 영역으<br />

로 삼는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갖는다. 이러한 특징이 리미니 프로토콜 작품들에 출연<br />

하는 ‘전문가’들이 부리오가 말하는 ‘엑스트라’들로 축소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이<br />

다. 사회적 관계들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발생하고 어떠한 사회적 장치들이 연루되는<br />

가를 가시화하는 과정이 리미니 프로토콜의 작업인 것이다.<br />

여기에서 말하는 ‘사회적 관계들’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는 관계는 물론 관객<br />

과 연기자 간의 사회적 관계이다. 관객이 바라보는 무대 위의 인물이 오직 무대 위에<br />

17) Nocolas Bourriaud(trans: Simon Pleasance, Fronza Woods): Relational Aesthetics. Paris 2002.<br />

18) Ebd., p. 113.


152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서 전문적으로 혹은 직업의 일환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크게 다<br />

름없는 세계에서 나름대로의 방식과 해석을 통해 살아가는 실존적 인격체라는 사실<br />

을 인지하는 것은 리미니 프로토콜의 작품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체험적 조건이 된<br />

다.<br />

3.3. 사회적 과정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연극<br />

리미니 프로토콜에 있어서 출연자들이 스펙터클의 구성적 요소, 즉 ‘엑스트라’들<br />

로 전락하지 않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철학적 입지이다. 그들이 행하는 캐스팅 과<br />

정은 단지 이미 희곡작품에 적합한, 즉 희곡을 몸과 언어로 해석하는 데에 적절한 능<br />

력을 가진 인력을 물색하는 과정이 아니라, 아예 작품을 전체적으로 구상하고 구성하<br />

는 과정과 일치한다. 그것은 출연자들의 삶과 생각, 정서 등이 작품의 핵심이 되기<br />

때문이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출연자들의 삶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br />

다큐멘터리 영화를 촬영하듯, 리미니 프로토콜은 그들이 선택한 사람들의 모습을<br />

직접적으로 작품에 반영한다. 작품의 주된 주제와 방향은 대략 미리 결정된다 하더라<br />

도,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수집, 나열하는 대신, ‘전문인’들과의 장기적인 대<br />

화 중에 발생하는 여러 부수적인 모티브들에 귀를 기울이며, 이에 따라 정해진 결과<br />

가 아닌 유기적인 과정이 중시된다. 완성된 작품에서 사용되는 대사는 이러한 과정을<br />

통해 출연자들로부터 직접 도출된 말들이고, 무대에서의 출연자들의 발화는 다큐멘<br />

터리의 인터뷰와 흡사하게 관객을 향해 자신의 기억과 생각을 일인칭 문장으로 서술<br />

하는 것이다.<br />

이를테면, 네모파크 Mneopark(2005)에 등장하는 실제 인물들은 바젤에 거주하<br />

는 미니어처 기차 동호회 회원들로, 그들은 출연을 할 뿐만 아니라, 직접 거대한 미<br />

니어처 마을을 조립함으로써 무대의 시노그라피 제작에 직접적으로 참여한다. 무대<br />

는 일종의 가상적, 혹은 실질적인 공동체가 되는 셈이다. ‘가상적’인 것은 미니어처라<br />

는 장치가 현실 속의 마을에 대한 도상 Ikon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며, ‘실질적’인 것은<br />

무대 장치를 제작하는 과정 자체가 사회적 관계를 새롭게 발생시키는 것이기 때문이<br />

다. 시노그라피는 거대한 허구적 공간이자 출연자들의 노동의 결과이기도 하며, 그들<br />

의 사적인 기억을 지시하는 ‘역사적’ 기표이자, 기억을 현실로 구현하는 수행적 장치


가 되기도 한다.<br />

3.4. 민족지학의 지평과 한계<br />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과 다큐멘터리 연극 153<br />

물론 다큐멘터리 연극이라는 형식이 연극의 미래를 짊어지는, 절대적인 선구적 역<br />

할을 다하는 것만은 아니다. 다큐멘터리라는 형식 자체가 많은 수사적, 윤리적, 미학<br />

적 문제들을 동반하듯, 다큐멘터리 연극 역시 다른 연극에 적용되지 않는 나름대로의<br />

의문점들을 함유할 수밖에 없다. 특히 창의적 주체가 작업의 영역으로서 타인의 삶을<br />

영입하는 태도가 최근 여러 예술 영역에서 조심스럽게 문제적인 것으로 지적되어 왔<br />

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다큐멘터리 연극에 관한 관점 역시 다각적이어야 할 필요성<br />

이 생겨난다.<br />

할 포스터가 지적하듯, 1980년대 이후 미술 작가나 큐레이터나 평론가들이 공통적<br />

으로 갖게 된 하나의 열망의 대상은 민족지학이다. 19) 즉, 미술관의 공간적, 제도적,<br />

정치적, 경제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향해 창작의 영역을 넓히고 사회 현실에<br />

대한 탐구를 통해 지식의 지평을 개방하고자 하는 태도가 미술계에 지배적으로 나타<br />

나게 된 것이다. 이는 곧 개인의 독창력과 결과 중심적인 창작행위로부터 사회관계와<br />

과정을 중시하는 수행적 행위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이기도 하다. 결국 미니멀리즘 20)<br />

과 개념미술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난 새로운 지향점이기도 하면서, 초현실주의로 대<br />

표되는 초기 아방가르드의 유산이기도 한, 미술의 골이 깊은 선망의 대상은 사회 현<br />

실에 대한 민족지학의 접근 방식과 태도이다. 민족지학자로서의 미술작가, 민족지학<br />

자로서의 큐레이터, 민족지학자로서의 평론가는 모더니즘이 부여한 ‘매체’의 무게에<br />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사회적 단상과 문화적 현상들을 향한 통찰력을 발휘한다. 그들<br />

의 작업실과 전시장은 폐쇄된 공간이 아닌, 열려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통합된다.<br />

포스터는 미술이 선망하는 민족지학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비유럽 문<br />

화와 같은) 이타성(alterity)에 대한 집중된 관심,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인해)<br />

19) 포스터: 실재의 귀환.<br />

20) 포스터는 미니멀리즘의 핵심적 정의로서, 완성된 오브제로서의 독립된 작품, 즉 형식미나 조형미<br />

를 가진 미학적 대상이 아닌, 주변의 공간적 문맥이 작품의 한 부분 혹은 연장이 되는 성향을 강<br />

조한다. 앞의 책.


154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문화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 문맥과 관계를 중시하는 접근 방식, 학제간 중재와<br />

융합을 추구하는 태도, 그리고 탐구자 자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그것이다. 이러한<br />

미술계의 방향성에는 최근에는 연극도 동조하게 되었다. 아르토가 연극이 현실의 ‘분<br />

신’이라고 했다면, 오늘날 ‘현실’과 ‘분신’의 간극은 여러 방식으로 허물어지고 있으<br />

며, 그 구체적인 양상들은 포스터가 제안한 민족지학의 다섯 성향들에 근접한다.<br />

문제는 물론 민족지학이 미술계가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방법론적으로 이<br />

상적인 학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포스터에 따르면, 특히 서구의 관점에서 타문화를<br />

타자화하고 원초적인 단계로 설정하는 입장, 그리고 그에 따라 인간 문화의 다양성을<br />

문명의 선형적 단계들로 규정하는 선입관적 태도는 결정적인 수사적, 윤리적 결함으<br />

로 지적되어 왔다. 미술이 이러한 오류에 쉽게 빠져드는 것은 민족지학에 대한 면밀<br />

하고 냉철한 판단에 앞서 낭만적이고 편협된 시각에 의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br />

그렇다면, 다큐멘터리 연극은 민족지학의 고질적인 문제, 그리고 시각 미술의 낭<br />

만적 태도로 인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br />

이에 관해서는 여러 다른 관점을 통해 접근할 수 있겠으나, 다음에서는 연극이라<br />

는 매체의 특성을 기반으로 하는 현실과 환영성의 관계를 고찰하는 것으로써 하나의<br />

방법론을 이루고자 한다.<br />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 페스티벌봄 제공


4. 현실에 대한 성찰<br />

4.1. ‘전문가’의 몸짓<br />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과 다큐멘터리 연극 155<br />

이준서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서 몸의 기호적 중층화<br />

현상을 이야기한다. 이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경우에 있어서 희곡을 기반으로 하는<br />

해석 행위로서 ‘연기’가 이루어지는 대신 신체의 즉물적이고도 즉각적인 존재감이 무<br />

대에서 발현됨을 의미하며, 이에 따라 무대에 대한 관객의 체험적, 해석적 개입이 다<br />

양화된다. 이에 대해 이준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br />

기존에는 연기자의 몸이 허구적 등장인물의 행동/줄거리 Handlung를 해석하여 재현하는 수<br />

단이었다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는 몸이 ‘행위 Akt’의 발현소로서 기능하며 그 발현이<br />

우연성에 내맡겨질 가능성조차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다. 21)<br />

주어진 허구적 상황에 대한 ‘해석’이나 ‘재현’이 아닌 ‘행위’의 발현소로서 몸이<br />

기능하는 하나의 구체적이고도 극단적인 상황이 바로 전문적인 직업 배우가 아닌 신<br />

체가 무대화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작품은 실제로 훈련되지 않<br />

은 비전문 퍼포머들을 출연시킴으로써 ‘행위의 발현소’로서의 몸의 존재감을 독특한<br />

형태로 극대화한다. 이는 훈련되지 않은 신체만이 발산할 수 있는 고유한 특질의 것<br />

으로서, 리미니 프로토콜의 작품의 중요한 재질이자 기반이 된다.<br />

전문 연기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볼 때 리미니 프로토콜 작품의 출연자들은 ‘완<br />

벽한’ 연기와는 거리가 먼 몸짓을 보여준다. 엔스 로젤트 Jens Roselt에 따르면, 리미<br />

니 프로토콜이 완벽하지 않는 ‘연기’를 무대화하는 것은 기존의 미학적 기준에 부합<br />

하려는 태도를 배제하고 인간의 신체 행위에 대한 새롭고 능동적인 관점을 창출하는<br />

것이기도 하다. 22) 즉, 그들의 작품은 기존의 미적 가치체계에 대한 체계적인 문제의<br />

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br />

21) 이준서: 포스트드라마 연극과 몸의 담론들 (I) - 무대 위 몸의 기호적 중층화 경향을 중심으로, 실<br />

린 곳: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11집(2003), 424-447쪽.<br />

22) Jens Roselt: The Performance Is Starting Now. In: Experts of the Everyday: The Theaters of Rimini<br />

Protokoll, pp. 46-63.


156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로젤트는 리미니 프로토콜의 이러한 작품 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br />

‘완벽’이란 언제나 전통적인 사회 규범의 틀과 가치 판단의 기준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개<br />

념이다. 비완벽의 미학은 ‘완결성’이라는 신화를 폐기하며, 연기자의 최종적인 최고 수준에<br />

입각하여 연출을 하는 접근 방식 그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한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작품<br />

들은 이 대신 부조화, 모순, 다원성, 불완전함, 그리고 개방성을 추구한다. 전통 연극이 ‘표<br />

현’을 위한 숙련된 매개로서 인간의 신체를 정형화했다면, ‘비완벽’의 연극은 신체의 한계<br />

와 부조화를 탐구하며 이들이 자연스럽게 체현되도록 유도한다. 23)<br />

로젤트는 나아가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연극의 근원적 속성에 절대적인 조건이 아<br />

님을 상기시킨다. 그에 따르면, 정규 교육기관에서 연기라는 분야를 훈련 영역으로<br />

삼은 것만 하더라도 20세기의 시대적인 현상이며, ‘직업 배우’라는 개념 자체가 생긴<br />

것도 오래되지 않은 최근의 현상이다. 로젤트가 이러한 지적을 하는 이유는 물론 오<br />

늘날 절대적인 구성 조건으로 여겨지는 요소들 자체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만들어진<br />

요구에 부합하는 것뿐임을 밝히기 위함이며, 이는 곧 ‘연기’라는 행위나 ‘배우’라는<br />

역할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보다 냉철한 사고가 선행될 때 연극에 대한 이해의 폭이<br />

넓어짐을 의미한다.<br />

4.2. 삶의 생소화<br />

그동안 리미니 프로토콜의 작품에는 다양하고 많은 ‘전문인’들이 등장해왔다. 크<br />

로스워드 피트 스톱 Kreuzwortätsel Boxenstopp(2000)에는 자동차 경주장에서 일을<br />

한 경험이 있는 7-80대의 노인들이 등장하여 ‘속도’를 화두로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br />

고 현재의 삶과 비교한다. 특히 과거에 빠른 속도가 일상이었던 이들에게 이제는 간<br />

단한 신체 동작도 부담이 된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자동차 경주와 노인이 일상 속<br />

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의 공통점은 구체적인 전략에 따라 정확하게 계획을 실행해야<br />

한다는 것이고, 이를 수행하지 못할 때는 안전사고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무대에서<br />

펼쳐지는 이러한 이야기는 노화와 신체, 시간과 근육운동, 속도와 계획, 문화와 생명<br />

23) Ebd., p. 62.


등 서로 느슨하게 연결된 주제들을 다층적으로 연결시킨다.<br />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과 다큐멘터리 연극 157<br />

베를린에서 진행되는 국회 본회의를 본(Bonn)시에서 실시간으로 재현하는 도이<br />

칠랜드 2 Deutschland 2(2001)는 본의 실제 시민들의 연기로 진행된다. 각 연기자는<br />

한 명의 국회의원을 맡게 되어 실제 국회에서 자신이 맡은 의원이 발언을 하면 헤드<br />

폰으로 그 내용을 들으면서 동시에 이를 발화한다. 즉석으로 이루어지는 시뮬레이션<br />

은 국회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기능과 더불어 국회 안에서의 정치적 역학에 대<br />

한 생소화 효과를 창출한다.<br />

죽음에 관한 묵상을 펼치는 데드라인 Deadline(2003)은 실제 장례식 집행자, 묘<br />

비 석공, 카지노 안내원, 퇴직한 시장, 장례식 반주가, 간호원 등을 주인공으로 삼아<br />

그들이 목격한 구체적인 죽음을 논한다. 대중매체가 묘사하는 화려하거나, 엄숙하거<br />

나, 혹은 즉각적인 죽음과는 달리, 그들이 논하는 죽음은 대부분 긴 시간에 걸쳐 이<br />

루어지는 고요한 과정이다.<br />

네모파크에 등장하는 출연자들은 미니어처 기차 모델을 조립하는 것을 취미 혹<br />

은 일로 삼는 사람들로, 이들은 무대에서 기차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면서 자신의 삶<br />

의 이야기들을 모형 마을에 투사한다. 미니어처는 이야기의 은유적인 혹은 즉각적인<br />

배경이 되어 관객의 상상에 구체적인 디테일을 부여한다. 출연자들은 미니어처 마을<br />

을 오가며 자신의 삶으로부터 ‘전문가’적인 관점에서 ‘드라마’를 이끌어낸다. 미니어<br />

처 여기저기에 설치된 소형 카메라를 통해 포착되는 재현적 풍경은 프로젝트로 무대<br />

뒷벽에 영사되기도 하고, 크로마키(chroma key) 효과를 통해 다른 카메라 앞에서 말<br />

하는 출연자의 모습이 전경에 합쳐지기도 한다.<br />

한국에서도 공연된 바 있는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Karl Marx: Das<br />

Kapital, Erster Band(2006) 24)에서는 마르크스의 고전적인 저서의 지대한 영향으로<br />

인해 삶이 바뀐 사람들 여덟 명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신용카드 적립금에 돈을 보태<br />

어 비싼 양복을 맞춘 마오이스트, 백만장자가 될 것을 꿈꾸는 맹인 콜 센터 직원 등<br />

이 포함되며, 한국에서 공연될 때에는 자본론을 한국어로 최초로 완역한 강신중이<br />

출연을 하기도 했다. 25)<br />

24) 이 작품의 한국 공연은 2009년 3월 27-28일 아르코예술대극장에서 이루어졌다.<br />

25) 리미니 프로토콜은 독일 외의 나라에서 공연을 할 때에는 그 나라의 상황에 맞게 개작을 하며,<br />

특히 해당 국가 출신의 출연자를 새롭게 섭외한다. 한국 공연이 성사되었을 때 카에기는 한국을


158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이 작품들에 등장하는 ‘전문가’들은 대부분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러 사람들 이<br />

지켜보는 무대 위에 선 경우들이다. 무대에 서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연기자가 갖는<br />

극심한 부담감은 도리어 관객의 체험에 풍성한 숙고의 여지를 제공하게 된다.<br />

로젤트 역시 리미니 프로토콜이 추구해 온 미학적 지향점은 모순적이게도 무대 위<br />

의 비전문 연기자들이 ‘비완벽성’을 드러내는 순간에 극대화된다고 말한다. 피로감을<br />

느끼거나, 신체나 목소리를 능숙하게 통제하지 못하여 소리가 갈라지거나 실수를 하<br />

는 경우, 혹은 대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그것이다.<br />

특히 크로스워드 피트 스톱에 등장하는 출연자들은 노화로 인해 기억력이 감퇴<br />

된 상태에서 연기를 하기 때문에 대사를 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실제로 이 작품<br />

이 초연될 때 출연자 중 한 명은 대사를 잊고 침묵에 빠졌고, 옆에 있던 다른 출연자<br />

가 귓속말로 대사를 상기시켜주었다.<br />

이러한 즉흥적이거나 돌발적인 ‘무대 사고’는 단지 무대의 환영을 해체할 뿐 아니<br />

라, 연기자의 정제되지 않은 인격적 실체를 순식간에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기호<br />

적 불확실성은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가 말하는 풍크툼 punctum과 흡사하게, 교<br />

육되거나 훈련되지 않은 감각의 영역으로 관객의 체험을 몰아간다. 신체를 스펙터클<br />

화하는 그 어떤 연극적 제스처에 흐르지 않는 역동성이 환영에 구멍을 내고 신체의<br />

비린내 나는 고유함을 노출시킨다.<br />

심재민이 지적하듯,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 몸의 육체성 Körperlichkeit이 충실히<br />

드러날 때 몸은 정해진 고정적 의미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에 새로운 수행적<br />

performativ 기능을 부여하게 된다. 26) 리미니 프로토콜의 경우, 몸의 고유한 신체성이<br />

노출됨으로써 발생하는 수행적 효과는 무대 위의 상황에 대한 관객의 판단에 영향을<br />

끼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허구와 현실 간의 차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작동하게 되<br />

는 것이다.<br />

제랄드 지그문트 Gerald Siegmund는 리미니 프로토콜의 무대에 펼쳐지는 즉각적<br />

인 상황에 적절한 개념으로 ‘허구 fiction’를 말한다. 27) 그가 여기서 말하는 ‘허구’란<br />

방문하여 적절한 출연자들을 물색했고, 당시 독일에서 거주하고 있던 강신중을 알게 되어 독일로<br />

돌아가 작업을 진행하였다.<br />

26) 심재민: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수행성, 현상적인 몸, 그리고 새로운 형이상학. 실린 곳: 김형기, 심<br />

재민, 김기란, 최영주, 최성희, 이진아, 파트리스 파비스: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 77쪽.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과 다큐멘터리 연극 159<br />

‘환영’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재현이 대상과 일치한다는 신화적 믿음을 버리는 과정<br />

으로 나타난다. 상상적인 것이 무대화되는 과정 그 자체를 인지시키는 자기반영적 실<br />

체가 곧 그가 말하는 ‘허구’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허구’는 공인된 사실과 그를 체<br />

험하는 개인의 방식 간에 명백한 간극이 존재하고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리는 재현<br />

체계이다. 이러한 허구성의 발생은 역설적으로 현실에 대한 자기성찰적인 접근의 경<br />

로가 된다. 허구성에 대한 관객의 질문은 현실을 부정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이러한<br />

상황은 변증법적인 새로운 결과로서의 ‘현실’을 도출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현<br />

실이란 혼란이 야기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28) 즉, 무대 위의 ‘현실’은 출연자 각<br />

자가 일상 속에서 진행시키는 현실이 아니라, 무대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제3의 현<br />

실인 것이다.<br />

이러한 역설은 곧 포스트드라마 연극과 브레히트의 미학이 맞닿는 부분이기도 하<br />

다. 즉, 현실과 허구의 중층적 혼재는 무대에 대한 관객의 성찰을 보다 정교한 사색<br />

과 질문의 장으로 유도하는 것이다.<br />

4.3. 현실과 허구의 중층<br />

이준서도 강조한 바 있듯, 레만이 중요시하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핵심적인 특징<br />

에는 무대 위에서 언어와 문학을 우선하는 위계질서가 작용하지 않는 점이 포함된다.<br />

문학적 구조의 헤게모니가 장악하지 않는 무대는 모든 시각적, 청각적 요소들이 동등<br />

한 무게를 지니며 활발한 역학관계를 형성한다. 29)<br />

여러 다각적, 다원적인 구성 요소들이 중층을 이루게 되는 이러한 특질은 리미니<br />

프로토콜의 작품에서는 매우 특이한 층위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바로 허구와 현실의<br />

중층화 작용이다.<br />

리미니 프로토콜은 하나의 정해진 상황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현실적인 것<br />

27) Gerald Siegmund: The Art of Memory - Fiction as Seduction into Reality. In: Experts of the<br />

Everyday: The Theaters of Rimini Protokoll, pp. 188-211.<br />

28) Ebd., p. 83.<br />

29)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국내의 가장 이른 연구로는 다음이 있다. 김형기: 다<br />

중매체시대의 포스트드라마 연극. 실린 곳: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8집(2000), 5-29쪽.


160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을 무대화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현실의 무대화 과정은 그렇다고 해서 즉각적<br />

이고 가공되지 않은 날 것으로 관객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크로<br />

스워드 피트 스톱의 돌발 상황에서처럼 연기자가 불확실하거나 불완전한 태도를 보<br />

이는 경우 관객의 반응은 통상적인 몰입이나 집중으로부터 벗어나 양가적이고도 분<br />

열적인 상황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무대 위의 실제 인물들이 환영적이지 않은 현<br />

실의 단상들을 전달한다는 믿음을 재고해야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브레히트의 고<br />

전적인 거리두기가 모방적 환영에 대한 비판적 거리감을 제안하는 것이었다면, 리미<br />

니 프로토콜의 거리두기는 현실이 침투한 무대를 가공되지 않은 즉각적 ‘현실’로 받<br />

아들일 수 있는 위험에 대하여 역설적인 생소화를 제안하는 것이다. 아무리 실제 인<br />

물이 등장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한다고 하지만, 결국 관객은 그들의 이야기의 진정성<br />

혹은 진위에 대한 의혹을 유보하는 것이 그릇된 것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br />

다시 말하면, 김형기의 지적하듯, 리미니 프로토콜의 작품에서는 현실이 모방적으<br />

로 재현되는 대신 “의식적으로 형성”된다. 30) 출연자들은 자신이 연기하는 상황이 허<br />

구적 상상에 기반하지 않음을 인지하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구태여 완전한 현<br />

실이라는 인상을 작위적으로 주입하지도 않는다. 즉, 현실적인 재료들이 매우 구체적<br />

인 방식을 통해 형식화되었음을 감추지 않는다. 이는 곧 관객이 무대 위의 상황을 체<br />

험함에 있어서 양가적이거나 복합적인 층위에서 사유하게 됨을 의미한다. 즉, 현실과<br />

형식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야말로 리미니 프로토콜이 촉진하는 ‘사유’의 중요한 영역<br />

이다.<br />

미리엄 드레이스 Miriam Dreysse는 이와 같은 효과를 두고 “현실에 대한 거리감이<br />

형성되고, 몰입에 대한 방해나 소외 혹은 장치의 노출 등과 같은 브레히트적 효과가<br />

이루어진다” 31)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나 자신의 관점에서 바<br />

라보는 세계의 모습에 관한 발화일지라도 무대의 특성상 ‘허구’로서의 특징을 갖는<br />

장치들의 매개화 과정을 통해 전달되는 발화의 내용은 작위적인 ‘허구’와 구분될 수<br />

없는 지점에 이른다. ‘공연’이라는 맥락에서 발생하는 모든 구두적 교류는 궁극적으<br />

30) 김형기: 일상의 퍼포먼스화 - 혹은 뉴 다큐멘터리 연극 - 리미니 프로토콜의 연출작업을 중심으<br />

로, 233-234쪽.<br />

31) Miriam Dreysse: The Performance Is Starting Now. In: Experts of the Everyday: The Theaters of<br />

Rimini Protokoll, p. 84.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과 다큐멘터리 연극 161<br />

로 작위적인 계약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드레이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br />

리미니 프로토콜의 작품은 ‘현실’을 (‘재현’하지 않고) ‘형성’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br />

형성되는 과정을 노출시키기도 한다. 즉, 그것의 ‘현실’로서의 위상은 제거되고, 동시에 ‘허<br />

구화’ 과정이 진행된다.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경계 자체가 불안정해지는 것이다. 32)<br />

지그문트가 말하는 ‘허구화’의 과정 역시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상태<br />

에서 발생하는 이차적인 재현 체제의 전환을 의미한다. 즉, 리미니 프로토콜의 무대<br />

는 허구적 재현과 현실의 현현이라는 두 재현 체제가 중층적으로 작동하는 양가적이<br />

고 순환적이며 모순적인 장치라 할 수 있다.<br />

4.4. 주체의 불확실성과 사색의 단초<br />

무대에서 자신의 신체를 전람하는 방식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들의 몸짓은 어색하<br />

면서도 자연스럽다. 그들의 집중력은 무대 밖의 자신을 향해 발휘된다. 스스로가 사<br />

유하는 언어적 주체로서의 ‘자신’은 대상이 된다. 사유의 주체와 사유의 대상은 분열<br />

적으로 충돌한다.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한 노력, 즉 봉합의 과정은 ‘무대’라는 작위적<br />

인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연극적’인 계약의 형태로 진행될 수밖에<br />

없다.<br />

본연적으로도, 상징적 주체에 대한 봉합은 ‘연극적’일 수밖에 없다. 라캉주의자들<br />

이 말하듯, 상징 질서에 스스로를 영입하기 위한 모든 노력은 근원적으로 작위적인<br />

것이다.<br />

이러한 모순적인 양가성은 관객의 체험을 불확정적인 것으로 진동시킨다. 현실과<br />

허구의 이분법은 영원히 폐기되는 대신 도리어 유령이 되어 관객의 판단을 유보시킨<br />

다. 무대 위의 몸짓과 발화가 작위적인 허구인지 진정한 현실인지에 대한 판단은 확<br />

고하게 완결될 수 없다.<br />

자크 랑시에르 Jacques Rancière는 두 가지 이상의 재현 체제 사이에서 정확한 판<br />

단을 유보하게 되는 ‘불확정적 indeterminate’인 관객의 체험적 상황이 ‘사색’의 단초<br />

32) Ebd., p. 83.


162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가 된다고 말한다. 33) 그가 말하는 ‘사색적 이미지 pensive image’란, 하나의 완결된<br />

현실이나 재현으로 환원하는 대신 매워지지 않는 간극을 발생시키는 경우로, 이러한<br />

간극은 관객의 호기심과 탐구력을 작동시킴으로써 해독의 층위와 방법을 질적으로,<br />

양적으로 풍족하게 한다는 것이다.<br />

랑시에르의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환영에 대한 브레히트적인 거리두기는 그에 대<br />

비되는 또 다른 재현체제가 중층적으로 공존할 때 더욱 입체적인 질문과 사색으로<br />

이어진다. 의혹과 질문은 현실과 연극의 관계에 대한 심층적인 사유의 지평을 열 수<br />

있는 것이다.<br />

5. 맺으며<br />

타자화된 대상의 인격적, 문화적 디테일들을 작품의 구성 요소로 삼는다는 것은<br />

다큐멘터리의 역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윤리적 문제로 대두되어 왔다. 리미니 프로토<br />

콜의 다큐멘터리 연극이 지향하는 하나의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윤리 의식에 대한<br />

사색과 성찰이 곧 작품의 출발점이자 관람자의 체험적 좌표가 된다는 사실이다.<br />

무대화되는 현실은 지극히 낯설고 부자연스러운 실재의 이미지를 현현한다. 출연<br />

자들의 불확정적인 행위나 돌발적인 부조리를 통해 실재의 구멍이 노출되는 것이다.<br />

그러나 실재의 현현이 무대 위의 쇼크로 끝나버린다면, 바로 그 지점이 우리가 고찰<br />

해야할 문제의식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br />

리미니 프로토콜의 가치는 현실을 무대화하거나, 재현 체제의 관습을 일방적으로<br />

폐기하거나, 혹은 현실과 허구를 가르는 기준을 소각하는 것에 있지 않다. 현실과 허<br />

구가 변죽되면서 발생하는 간극의 정치학이야말로 그들이 추구하는 연극 매체에 대<br />

한 성찰의 영역이다. 관객의 호기심과 통찰력을 작동시키는 것이 이들이 지향하는<br />

‘현실’인 것이다.<br />

그러한 면에서 리미니 프로토콜의 작품은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것에<br />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떠한 단서와 정<br />

33) Jacques Rancière(trans: Gregory Elliott): The Emancipated Spectator, London and New York 2009.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과 다큐멘터리 연극 163<br />

보가 주어지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삶이 아니라, 그 단서와 정보를 체득하는 과정을<br />

창발적으로 사유하고 창출하는 과정으로서의 삶 말이다.<br />

참고문헌<br />

김형기: 다중매체시대의 포스트드라마 연극. 실린 곳: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8집<br />

(2000), 5-29쪽.<br />

김형기: 일상의 퍼포먼스화 - 혹은 뉴 다큐멘터리 연극 - 리미니 프로토콜의 연출<br />

작업을 중심으로. 실린 곳: 김형기, 심재민, 김기란, 최영주, 최성희, 이진아,<br />

파트리스 파비스: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 푸른사상 2011, 213-242쪽.<br />

서현석: 다큐멘터리와 아방가르드의 접점에서 - 수행적 다큐멘터리에 관한 수행적<br />

단상들. 실린 곳: 한국영화학보. 43호(2010), 229-271쪽.<br />

심재민: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수행성, 현상적인 몸, 그리고 새로운 형이상학. 실린<br />

곳: 김형기, 심재민, 김기란, 최영주, 최성희, 이진아, 파트리스 파비스: 포<br />

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 푸른사상 2011, 65-115쪽.<br />

에르빈 피스카토르: 기록극. 실린 곳: 만프레드 브라우넥(김미혜, 이경미 옮김): 20<br />

세기 연극 - 선언문, 양식, 개혁모델. 연극과인간 2001, 331-337쪽.<br />

이상면: 에르빈 피스카토르. 실린 곳: 김미혜, 남상식, 안치운, 이상면, 장인숙: 20<br />

세기 전반기 유럽의 연출가들. 연극과인간 2001, 259-303쪽.<br />

이준서: 포스트드라마 연극과 몸의 담론들 (I) - 무대 위 몸의 기호적 중층화 경향을<br />

중심으로. 실린 곳: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11집(2003), 424-447쪽.<br />

크리스토퍼 인네스(김미혜 옮김): 아방가르드 연극의 흐름: 1892-1992. 현대미학<br />

사 1997.<br />

할 포스터(이영욱, 조주연, 최연희 옮김): 실재의 귀환. 경성대학교출판부 2003.<br />

Bourriaud, Nocolas(trans: Simon Pleasance, Fronza Woods): Relational Aesthetics. Paris<br />

2002.<br />

Dreysse, Miriam(ed.)(trans.: Daniel B. Rogers, Ehren Fordyce, Geoffrey Garrison, Mat<br />

Hand, Sophia New, Walter Suttcliffe): Experts of the Everyday: The Theaters of


164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Rimini Protokoll. Berlin 2008.<br />

Hardy, Forsyth(ed.): Grierson on Documentary. New York and Washington 1971.<br />

Irmer, Thomas: A Search for New Realities: Documentary Theatre in Germany. In: The<br />

Drama Review. Vol.50 No.3 (Fall 2006). pp. 16-28.<br />

Lehmann, Hans-Thies: Postdramatisches Theater. Frankfurt/M 1999.<br />

Rancière, Jacques(trans: Gregory Elliott): The Emancipated Spectator. London and New<br />

York 2009.<br />

Weiss, Peter: Notizen zum dokumentarischen Theater. In: Joachim Fiebach(ed.):<br />

Manifeste europäschen Theaters: Grotowski bis Schleef. Berlin 2003. S. 67-73.<br />

Zusammenfassung<br />

Rimini Protokoll und das dokumentarische Theater<br />

Kim, Seong-Hee (Kaywon Uni)<br />

Eine immer grösser werdende Anzahl an Theaterproduktionen bezieht Laien oder<br />

untrainierte Schauspieler mit ein, die sich selbst oder ihre Ansicht des Lebens<br />

darstellen. Oft auch als “Dokumentarisches Theater” bezeichnet, bringen diese<br />

Produktionen reales Leben und gegenwärtige Situation auf die Bühne und versuchen<br />

eine direkte Verbindung zwischen Realität und Theater zu schaffen. Ein Verband, der<br />

eindringlich solche Möglichkeiten erforschte, ist das Rimini Protokoll, dessen Karl<br />

Marx: Das Kapital, Erster Band, 2010 in Korea aufgeführt wurde.<br />

Seit 2000 engagiert sich das Rimini Protokoll dafür, die Realität auf die Bühne zu<br />

bringen, um mit einer einzigartigen Strategie das Fundament des theatralischen


Keyword<br />

(한글/독일어)<br />

다큐멘터리 연극<br />

dokumentarisches Theater<br />

아방가르드 연극<br />

Avant-Garde Theater<br />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과 다큐멘터리 연극 165<br />

Apparats in Frage zu stellen. Die Spannung zwischen szenischen Handlungen und<br />

Referenzen zur Außenwelt jenseits der Bühne wurden zu einer strategischen Geste, um<br />

den illusionistischen Grundstein des theatralischen Vertrags zu erschüttern, an den die<br />

Zuschauer gebunden sind. Darüber hinaus bringen ihre Arbeiten im dokumentarischen<br />

Theater neue Modelle der Bindungen des Zuschauers mit der Realität ein. Die<br />

Radikalität des dokumentarischen Theaters liegt in ihrem Bestreben, das soziale<br />

System, das als kommunikative Ausführungsart wirkt, zu hinterfragen und neu<br />

darzulegen.<br />

Diese Studien beleuchten wie das dokumentarische Theater die<br />

Grundvoraussetzungen der Avant-Garde neu beleben und den brechtischen Geist wieder<br />

erfinden kann. Rimini Protokoll bietet eine neue Ansicht, wie Theater als Mittel<br />

verwendet werden kann, Leben und Kunst zu integrieren.<br />

∙ 필자 E-Mail: ganesakorea@yahoo.co.kr (<strong>김성희</strong>)<br />

포스트드라마 연극<br />

post-dramatisches Theater<br />

장치<br />

Apparat(dispositiv)<br />

∙ 투고일: 2011년 6월 30일/ 심사일: 2011년 7월 15일/ 심사완료일: 2011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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