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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매체와 예술의 변화 - 한국브레히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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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r />

서론<br />

<strong>새로운</strong> <strong>매체와</strong> <strong>예술의</strong> <strong>변화</strong> *<br />

-발터<br />

벤야민과 레프 마노비치의 매체미학<br />

정용환 ( 상명대 )<br />

20세기<br />

후반부터 급속도로 발달해온 컴퓨터 기술과과 정보 산업은은 우리 삶의의 모든<br />

분야에 적지 않은은 <strong>변화</strong>를 가져왔다 . 이점에서는 예술 분야도 예외가 아니어서 우리는<br />

뉴미디어 , 즉 네트워워크로 연결결된 컴퓨터가 예술과과 미학의의 패러다임 교교체를 가져왔다<br />

는 주장장을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있다 . “ 디지털 매체의의 등장장은은 예술 작품 그 자체의의<br />

성격과과 특성 , 그리고 그것의의 생산방식과과 수용방식에 전면적인인 <strong>변화</strong>를 가져왔다 ” 1)는<br />

것이다.<br />

<strong>새로운</strong>운 매체가 <strong>예술의</strong>의 전면적인인 <strong>변화</strong>를 가져오리라는 이러한 기대는 역사를 되돌<br />

아보았을을 때 결결코 <strong>새로운</strong>운 것이 아니다 . 20세기 초에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은은<br />

기술복제시대의의<br />

예술작품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br />

Reproduzierbarkeit 에서<br />

영화라는 <strong>새로운</strong>운 매체가 19세기<br />

미학의의 전통과과 급진적으으로<br />

단절하고 현대사회에 적합한 <strong>새로운</strong>운 예술을을 창출할 것으으로 기대했다 . 그는 이러한 기<br />

대에서 우리는 영화가 전통 미학의의 관관점에서 <strong>예술의</strong>의 범주에 부합 되는가 따질 것이<br />

아니라 이 <strong>새로운</strong>운 매체를 통해서 “ <strong>예술의</strong>의 성격 전체가 바뀐 것이 아닐까 하는 물<br />

음음” 2)을을 제기해야 한다고 보았다 . 문문제는 ‘ 예술로서의의 영화 ’ 가 아니라 ‘ 영화로서의의 예<br />

* 본 논문문은은 상명대학교교 2008 학년도 교교내연구비에 의의하여 연구되었음음 .<br />

1) 심혜련 :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의의 미학 , 서울울 2006,19 면 .<br />

2) 발터 벤야민 ( 최성만역 ): 기술복제시대의의 예술작품 사진의의 작은은 역사 외 . 벤야민 선집 제 2 권권 , 서울울<br />

2007, 9 면 . 이 에세이의의 2판과과 3판<br />

그리고 관관련 노트들의의 인인용은은 이 선집을을 따랐으으며 부분적으으로<br />

번역을을 수정했다 ( 이하 선집으으로 약칭칭하고 면수만 병기한다 ). 벤야민의의 다른 글은은 다음음 전집에서<br />

인인용했다 . 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Frankfurt a. M. 1972-89( 이하 로마 숫자로 권권<br />

수를 , 아라비아 숫자로 면수를 표기한다 ).


332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술 ’ 이라는 것이다 . 이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뉴미디어에 적합한 <strong>새로운</strong>운 미학을을 추구<br />

하는데 있있어서 벤야민을을 본받아야할 선례로 간주하는 매체학자도 있있다 . “20세기에<br />

사진과과 영화라는 복제기술이 벤야민으으로 하여금 <strong>새로운</strong>운 미학을을 구상하게 했듯이 21<br />

세기에 컴퓨터와 디지털이라는 합성기술 또는 기술생성 역시 우리에게 <strong>새로운</strong>운 미학<br />

을을 구성할 과과제를 제기한다” 3)는 것이다.<br />

예술과과 매체는 불가분의의 관관계계에 있있으으며 매체는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극적<br />

인인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 자체를 적극적으으로 각인인하는 것도 사실이다. 4)<br />

그러나 <strong>새로운</strong>운 매체가 바로 <strong>새로운</strong>운 미학을을 가져오리라는 성급한 기대는 기술적 가능<br />

성과과 예술적 가능성의의 혼동에 기초를 두고 있있는 것이 아닐까?<br />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은은 역사적 , 예술사적으으로 20 세기 초와는 다르다 . 과과거와<br />

의의 급진적 단절을을 통해 <strong>새로운</strong>운 사회를 만들려는 사회주의의 실험은은 많은은 대가를 치룬<br />

채 실패로 끝났고 , 생산력과과 기술의의 발전이 인인류의의 보편적 행복을을 가져 오리라던 기<br />

대도 생태계계 위위기에 직면해 수그러들었으으며 , 전통예술과과 고전미학을을 파괴괴하고 전혀<br />

<strong>새로운</strong>운 예술을을 창조하려던 , 아니 더 나아가서 예술을을 삶으으로 지양하려던 전위위주의의의의<br />

동력도 소진되었다 . 역사에서나 예술사에서나 탈현대가 진보의의 대서사에 대한 회의의<br />

를 통칭칭한다면 5) 오늘날 매체미학도 이러한 탈현대적 상황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못하다<br />

고 할 수 있있다 . 실제로 우리는 매체예술가나 매체이론가들에게서 기술낙관관론적 예술<br />

론과과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회의의의의 목소리도 들을을 수 있있다 . 예를 들어 매체예술가인인<br />

박찬경은은 “ 신매체가 구매체를 대체한다 ” 는 식의의 단선적 , 기술중심적 예술사관관을을 비<br />

판하며 “ 하드웨웨어적으으로 <strong>새로운</strong>운 매체도 소프트웨웨어적으으로 얼마든지 낡을을 수 있있다 ” 6)<br />

고 지적하고 있있다 . 잘잘 알려진 영상문문화 이론가인인 앤드류 달리 Andrew Darley도<br />

디지<br />

3) 진중권권 : 서문문 , 실린 곳곳 : 같은은 이 ( 편 ): 미디어아트 . <strong>예술의</strong>의 최전선 , 서울울 2009, 11 면 .<br />

4) 벤야민은은 바로 이러한 “ 강한 매체개념 ” 의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 Jochen Schulte-Sasse: Medien/medial,<br />

in: Karlheiz Barck u. a. (Hg.): Ästhetische Grundbegriffe. Bd. 4, Stuttgart 2002, S. 1.<br />

5) “ 탈현대는 개관관하기 어려운운 영역이고 이 단어 자체가 모순적이지만 공공통적인인 출발상황은은 , 계계몽몽주<br />

의의에서 시작되어 오늘날 끝난 하나의의 현대가 있있다는 것이다 . 이 현대는 지식과과 예술 , 기술의의 진보<br />

그리고 동시에 자유의의 진보를 통해서 정말로 해방된 사회 , 빈곤곤과과 지배와 무무지로부터 해방된 사<br />

회에 도달하려 했다 .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일반적으으로 이러한 것들의의 발전이 계계속되지만 그것이<br />

결결코 우리가 바라던 해방을을 가져오지 않았음음을을 확인인하지 않을을 수 없다.”(Jean-François Lyotard:<br />

Immaterlialtät und Postmoderne, Berlin 1985, S. 65)<br />

6) 박찬경 : 문문화 / 예술생산양식의의 진화 , 문문화과과학 12(1997년 8 월월 ), 61 면 .


<strong>새로운</strong> <strong>매체와</strong> <strong>예술의</strong> <strong>변화</strong> 333<br />

털 이미지가 합성 , 조작의의 측면에서 그림이미지나 사진이미지와는 다르지만 심미적 ,<br />

문문화적 관관점에서 반드시 <strong>새로운</strong>운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하면서 기술결결정론적 예술<br />

관관으으로부터 거리를 취취하고 있있다. 7)<br />

기술과과 <strong>예술의</strong>의 관관계계를 일방적인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인 것으으로 보고 오래된 <strong>매체와</strong><br />

<strong>새로운</strong>운 매체의의 관관계계를 단절이나 대체가 아니라 혼합의의 관관점에서 파악하는 가장장 대표<br />

적인인 사람은은 레프 마노비치 Lev Manovich 라고 할 수 있있을을 것이다 . 컴퓨터 애니메이<br />

션과과 프로그래밍 , 매체예술과과 미학 등 실제와 이론 양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온<br />

이 러시아 출신의의 매체미학자는 주저인인 뉴미디어의의<br />

언어 The Language of New<br />

Media에서<br />

추상적 매체이론을을 제시하거나 매체<strong>예술의</strong>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을 늘어놓<br />

는 대신 뉴미디어를 시각매체사의의 구체적인인 맥락 속에서 분석하고 , “ 뉴미디어와 이<br />

전 매체 사이의의 연속성 , 역사적 반복과과 혁신 사이의의 상호작용 ” 8)에 주목하며 , 특히 뉴<br />

미디어가 어떻게 영화의의 형식과과 규범을을 차용하는지 탐구하고 있있다 . 기존의의 <strong>매체와</strong> 뉴<br />

미디어의의 관관계계를 단절이나 대체보다 “ 혼성성의의 미학 ”( 뉴 , 11) 의의 관관점에서 고찰한다는<br />

점에서 마노비치의의 매체미학은은 넓은은 의의미에서 탈현대적인인 것으으로 간주할 수 있있다. 9)<br />

벤야민 연구자인인 미리암 한젠 Miriam Hansen은은 기술복제시대의의 예술작품 의의<br />

제 2<br />

판에서 애니메이션 미키마우스에 대한 벤야민의의 관관심을을 , 디지털 시대에는 애니메이<br />

션이 실사영화에 대해 우위위를 이룬다는 마노비치의의 인인식과과 연관관시킨 바 있있다. 10) 그<br />

러나 벤야민과과 마노비치의의 매체미학은은 개별적인인 공공통점에 있있어서 뿐 아니라 <strong>새로운</strong>운<br />

7) 박명진 : 디지털 영상예술 : 해독과과 해석의의 체험으으로부터 감각과과 놀이적 체험으으로 . 앤드류 달리에게<br />

듣는다 , 실린 곳곳 : 최정호편 : <strong>새로운</strong>운 예술론 - 21 세기 한국문문화의의 전망 , 서울울 2001, 664 면 참조 .<br />

8) Lev Manovich: The Language of New Media, Cambridge 2001, S. 285. 이하 이 책에서의의 인인용은은<br />

다음음 역서를 따랐으으며 부분적으으로 번역을을 수정했다 . 레프 마노비치 ( 서정신역 ): 뉴미디어의의 언어 ,<br />

서울울 2004( 인인용은은 ‘ 뉴 ’ 라는 약칭칭에 면수를 병기한다 ).<br />

9) 이러한 관관점에서 쓰여진 또 하나의의 대표적인인 매체미학서는 볼터와 그루신의의 재매개<br />

Remediation<br />

다<br />

. 이 책의의 저자들도 뉴미디어의의 소위위 “ 완전히 <strong>새로운</strong>운 차원원 ”, “ 완전히 <strong>새로운</strong>운 표현세계계 ” 를 과과거<br />

와의의 근본적 단절이라는 현대주의의의의 수사학으으로 평가절하한다 . 그들은은 뉴미디어도 다른 <strong>매체와</strong><br />

마찬가지로 기존의의 <strong>매체와</strong> 변증법적 관관계계를 맺는다고 보며 이러한 관관계계를 재매개라고 부른다.<br />

“ 디지털 매체에서 <strong>새로운</strong>운 것은은 텔레비전 , 영화 , 사진 그리고 회화를 재매개하는 독특한 전략들에<br />

있있다 ” 는 것이다 .( 제이 데이비드 볼터 , 리처드 그루신 ( 이재현역 ): 재매개 . 뉴미디어의의 계계보학 , 서울울<br />

2006, 60 면 )<br />

10) Vgl. Miriam Bratu Hansen: Room - for - Play. Benjamin’s Gamble with Cinema, in: Christian<br />

Schulte(Hg.): Walter Benjamins Medientheorie, Konstanz 2005, S. 166.


334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strong>매체와</strong> <strong>예술의</strong>의 <strong>변화</strong>의의 관관계계에 대한 기본 관관점의의 차원원에서 비교교될 수 있있다 . 이 논문문에<br />

서 필자는 현대와 탈현대의의 대표적인인 매체미학자라고 할 수 있있는 이 두 사람의의 이론<br />

을을 비교교하는데 있있어서 공공통점 뿐 아니라 무무엇보다 차이점에 주목할 것이다.<br />

II. 발터 벤야민 : 영화의 <strong>새로운</strong> 미학<br />

1. 전위주의와 자율성 미학의 해체<br />

전위위주의의가 전통의의 파괴괴 , 과과거와의의 급진적 단절을을 통해 예술을을 혁신하려고 한다면<br />

벤야민에게 있있어서 전통과과 과과거를 특징지우는 것은은 아우라다 . 아우라의의 개념은은 벤야<br />

민의의 저작에서 매우 다의의적으으로 사용된다 . 벤야민의의 미학에서 이 개념의의 사용을을 작품<br />

미학적 차원원과과 수용미학적 차원원으으로 나누어보면 전자의의 경우 아우라의의 특징은은 진품<br />

성 Echtheit, 유일성 Einzigartigkeit, 일회성 Einmaligkeit 이고 후자의의 경우는 관관조 , 교교감 ,<br />

거리 , 시각이다 . 기술복제시대의의 예술작품 은은<br />

아우라적 전통예술과과 탈아우라적 복제<br />

<strong>예술의</strong>의 이분법적 대립을을 통해 구조화되어 있있다 . 한편에 원원본 , 유일성 , 일회성 , 관관조 ,<br />

교교감 , 거리 , 시각 등이 있있다면 다른 편에 그와 대립되는 것으으로 사본 , 다수성 , 반복성 ,<br />

정신분산 Zerstreuung, 소외 , 가까움움 , 촉각 등이 있있다 . 벤야민의의 전체 저작을을 살펴보면<br />

아우라의의 상실에 대한 애도와 아우라의의 파괴괴를 통한 <strong>예술의</strong>의 혁신이라는 해방적 전망<br />

사이에 양가성이 존재하지만 기술복제시대의의 예술작품 에서<br />

우세한 것은은 아우라의의<br />

파괴괴가 가져올 해방적 가능성에 대한 기대다. 11)<br />

기술복제시대의의 예술작품 의의<br />

핵심 테제는 전통 <strong>예술의</strong>의 아우라에 종말을을 가져온<br />

것이 <strong>새로운</strong>운 매체의의 기술적 복제가능성이라는 것이다 . 여기서 전통 예술이란 19세기<br />

까지의의 예술사 전체를 가리킨다 . 사진 그리고 무무엇보다 영화는 부르주아 시대 뿐 아<br />

11) Vgl. Angela Spahr: Der Verfall der Aura. Walter Benjamin, in: Daniela Kloock/ Angela Spahr:<br />

Medientheorien, München 2007, S 24; Josef Fürnkäs: Aura, in: Michael Opitz/Edmund<br />

Wizisla(Hg.): Benjamins Begriffe. Bd. 1, Frankfurt a. M. 2000, S. 118. 뉴미디어의의 언어 에서<br />

마<br />

노비치가 벤야민의의 아우라 개념에 대해서 언급할 때는 ‘ 애도 ’ 의의 측면에만 주목하지만 ( 뉴 , 232,<br />

410) 벤야민의의 매체미학에서 방점은은 ‘ 해방 ’ 에 찍혀있있다 .


<strong>새로운</strong> <strong>매체와</strong> <strong>예술의</strong> <strong>변화</strong> 335<br />

니라 그 이전의의 예술사 전체를 전복할 잠재력을을 가지고 있있다는 것이다 . 그런데 벤야<br />

민이 아우라적 예술작품의의 객관관적인인 특성으으로 제시하는 진품성 , 유일성 , 일회성은은 예<br />

술사 전체에 적용하기에는 문문제점이 많다 . 많은은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중세 예술에서<br />

위위 개념들은은 결결코 중요한 역할을을 하지 않았기 때문문이다 . 중세에는 아직 천재적 예술<br />

가나 독창적 작품의의 관관념이 싹트지 않았다 . 당시에 중요한 것은은 창조가 아니라 순응응<br />

이었고 예술가들은은 기존의의 작품에서 필요한 요소들을을 취취해서 잘잘 짜맞추어 조화로운운<br />

구성물을을 만들어내는 수공공업자였다 . 중세 문문화는 유일무무이한 원원본의의 문문화가 아니라<br />

“ 변주의의 문문화 ” 12)였다 . 에니온과과 라투르가 지적하는 것처럼 “ 무무한한 반복 , 표준 , 도식 ,<br />

변주가 먼저 있있었고 작품은은 그 후에 생겼다 . 현대 이전에는 유일무무이한 작품의의 작곡<br />

가 같은은 것은은 아예 없었다.” 13)<br />

벤야민은은 이 에세이에서 기술복제시대의의 예술과과 20세기<br />

이전의의 예술사 전체를 대<br />

립시키고 있있지만 사실 그가 주된 공공격목표로 삼는 것은은 , 생산의의 측면에서 독창적 천<br />

재의의 개념 , 작품의의 측면에서 아름다운운 가상의의 개념 , 수용의의 측면에서 관관조의의 개념을을<br />

중심으으로 한 19 세기의의 자율율성 미학이었다 . 14) 19세기<br />

미학과과 문문화에 대한 벤야민의의<br />

비판은은 당대의의 다양한 예술적 전위위운운동에 대한 그의의 관관심과과 밀접한 관관련이 있있다 . 다<br />

른 전위위주의의자들과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율율성 미학을을 근간으으로 하는 시민 문문화가 산업<br />

화 , 대중화 , 도시화로 특징 지워워지는 20세기<br />

초의의 현대 사회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br />

으으며 현실보상적인인 이데올로기의의 역할을을 할 뿐이라고 보았다 . 그는 철두철미한 현대<br />

의의 자식으으로서 “ 시대에 대한 일말의의 환상도 없으으면서 동시에 시대에 전적으으로 충실<br />

한 태도 ”(II, 216) 를 견견지하려 했고 전위위주의의에 의의한 19세기<br />

문문화의의 과과격한 파괴괴를 부<br />

12) Maria Rosa Menocal: The Flip side, in: Hans Ulrich Gumbrecht/Michael Marrinan(Hg.): Mapping<br />

Benjamin. The Work of Art in the Digital Age, Califonia 2003, S. 293. 호르스트 벤첼은은 이러한<br />

점에서 탈현대문문화와 중세문문화의의 공공통점을을 지적한다. (Vgl. Horst Wenzel: The Reverent Gaze.<br />

Toward the Cultic Function of the Artwork in the Premodern and the Postmodern Age, in: Hans<br />

Ulrich Gumbrecht/Michael Marrinan(Hg.): a. a. O., S. 215.)<br />

13) Antoine Hennion/ Bruno Latour: How to Make Mistakes on So Many Things at Once - and<br />

Become Famous for It, in: Hans Ulrich Gumbrecht/Michael Marrinna(Hg.): a. a. O., S. 94.<br />

14) 벤야민은은 이 에세이에 대한 한 노트에서 “ 이 논문문이 일차적으으로 19세기<br />

이래 우리에게 전승된 예<br />

술 개념을을 비판하기 위위한 길을을 트려고 노력한다 ”( 선집 2, 222) 고 밝히고 있있다 . 페터 뷔르거는 벤야<br />

민의의 에세이를 칸칸트 이후 독일의의 관관념론적 미학에 대한 비판의의 일환으으로 해석했다.(Vgl. Peter<br />

Bürger: Zur Kritik der idealistischen Ästhetik, Frankfurt a. M. 1983, S. 125)


336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정적으으로 보기보다 불가피한 문문화적 정화 과과정으으로 , “ 긍정적 야만 ”(II, 215) 으으로 간주<br />

했다 . 예를 들어 그가 19 세기의의 역사주의의적 , 절충주의의적 건축에 대한 현대주의의 건축<br />

가들의의 비판에 동조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 19세기<br />

건축물의의 페쇄성과과 내밀성<br />

에 대립되는 현대 유리 건축물의의 투명성과과 익명성을을 그는 아우라의의 파괴괴로서 긍정적<br />

으으로 평가했다.<br />

유리로 된 사물은은 ‘ 아우라 ’ 를 가지고 있있지 않다 . 유리는 비밀의의 적이고 소유의의 적이기도 하<br />

다.(II, 217) 15)<br />

도판 하노버의 다다주의자인 쿠르트<br />

< 1><br />

슈비터스의 몽타주<br />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의 예술작품 <br />

에서 19세기<br />

미학의의 낡은은 관관념들을을 일<br />

소하는 데 있있어 선구자적 역할을을 한 것<br />

으으로 주목하는 전위위운운동은은 무무엇보다 다<br />

다주의의다 . 다다주의의자들은은 아름다운운 가<br />

상과과 유기적 총체성 , 관관조적 수용에 의의<br />

해 특징 지워워지는 19세기<br />

미학에 전면<br />

전을을 선포한다 . 그들의의 시는 “ 외설적인인<br />

문문구와 언어의의 온갖 폐기물을을 담아놓은은<br />

‘ 말의의 샐러드 ’”( 선집 2, 88) 이고 그림은은<br />

단추나 승차권권 같이 범속한 잡동사니들<br />

을을 조립한 몽몽타주다 . 다다주의의자들의의<br />

‘ 작품 ’ 은은 승화되지 않은은 날 것 그대로의의 현실 재료들을을 불연속적 , 이질적 , 대립적으으<br />

로 병치함으으로써 고전미학이 추구하는 아름답고 조화로운운 가상을을 파괴괴한다. 16) 벤야<br />

민에 따르면 “ 아름다운운 가상의의 의의미는 지금 종언을을 고하고 있있는 아우라적 지각의의<br />

시대에 토대를 이룬다 ”( 선집 2, 71). 전통적 예술작품의의 아름다운운 가상에 수용미학의의<br />

15) 이 글 경험과과 빈곤곤 Erfahrung und Armut 에서<br />

오스트리아의의 현대 건축가 아돌프 로스 , 프랑스의의<br />

현대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 , 바우하우스 등에 대한 언급은은 당대의의 전위위적 예술운운동에 대한 벤야<br />

민의의 관관심이 매우 포괄괄적이었음음을을 보여준다.<br />

16) Vgl. Peter Bürger: Theorie der Avantgarde, Frankfurt a. M. 1974, 105f.


<strong>새로운</strong> <strong>매체와</strong> <strong>예술의</strong> <strong>변화</strong> 337<br />

측면에서 관관조와 집중의의 태도가 상응응한다면 다다주의의 ‘ 예술작품 ’ 의의 몽몽타주는 수용<br />

자에게 충격을을 불러일으으키고 수용자의의 정신을을 분산시킨다 . 그것은은 수용자를 매혹하<br />

고 몰몰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 찌른다 ’.<br />

이로써 그것은은 영화에 대한 수용을을 촉진하게 되었는데 영화의의 정신분산적 요소 역시 일차<br />

적으으로 촉각적인인 요소이다 . 즉 그 정신분산적 요소는 찌르듯이 관관객을을 엄습하는 장장면과과 쇼<br />

트의의 교교체에 토대를 두고 있있다. 영화는 다다주의의가 아직도 도덕적 충격 속에 포장장해서<br />

감싸고 있있던 육체적 충격을을 그 포장장으으로부터 해방시켰다 .( 선집 2, 89)<br />

20세기<br />

산업화와 도시화의의 물결결 속에서 관관조의의 태도는 사회 현실로부터의의 고립을을<br />

통해서만 가능하다 . 벤야민은은 그럼으으로써 자율율성 미학을을 특징지우는 관관조는 “ 비사회<br />

적 태도의의 학교교 ” 가 되었다고 보며 , 고립된 개인인의의 의의식을을 이완시켜 집단적 유대의의 전<br />

제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 일반적으으로 부정적으으로 간주되어온 - 정신분산을을 “ 일종의의<br />

사회적 태도 ”( 선집 2, 88) 로서 재평가한다 .<br />

그러나 벤야민에 따르면 다다주의의를 비롯해 전위위주의의의의 예술작품은은 자율율성 미학<br />

을을 완전히 대체하기에는 한계계가 있있다 . 전위위주의의자의의 예술작품은은 예술을을 가상에서 현<br />

실로 끌어내리려는 그들의의 의의도에도 불구하고 다수 대중에게는 여전히 수용을을 위위해<br />

많은은 예술사적 지식이 필요한 난해한 것으으로 남아있있기 때문문이다 . 그들의의 작품 앞에서<br />

주눅이든 대중은은 능동적 비평의의 태도로 나아가지 못못한다 . 채플린의의 영화를 즐기면서<br />

비평하는 대중이 피카카소와 초현실주의의 작품에 대해서는 여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아<br />

우라적 태도를 취취한다는 것이다 ( 선집 2, 80). 게다가 전위위주의의 작품은은 여전히 문문학이<br />

나 회화 등 전통적인인 매체를 사용하고 있있기 때문문에 집단적인인 수용에는 적합치 않다.<br />

벤야민은은 이러한 관관점에서 영화라는 <strong>새로운</strong>운 매체를 ‘ 전위위주의의의의 지양 ’ 으으로 파악한다 .<br />

그에게 영화는 자율율성 미학에 대한 전위위주의의의의 혁신을을 계계승할 뿐 아니라 난해성 , 개<br />

인인적 수용 등 전위위주의의의의 한계계까지 극복한 <strong>새로운</strong>운 <strong>예술의</strong>의 패러다임으으로 다가온 것이다.<br />

2. <strong>새로운</strong> <strong>예술의</strong> 패러다임으로서의 영화<br />

벤야민에 따르면 “ 다다주의의는 영화가 그것의의 기술적 구조를 통해 연출하는 ‘ 충격 ’


338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을을 그것의의 내용을을 통해 만들어내려고 했다 ”( 선집 2, 210). 역으으로 말해서 영화에 있있어<br />

서 자율율적 <strong>예술의</strong>의 아우라를 해체시키는 것은은 다다주의의 작품의의 경우와 달리 도발적인인<br />

내용이 아니라 매체의의 ‘ 기술적 구조 ’ 자체라는 것이다 . 여기서 영화의의 기술적 구조란<br />

카카메라를 통한 재현과과 편집 과과정을을 가리킨다 . 이 과과정을을 거치면서 전통 예술에 내재<br />

한 아우라가 해체되고 자율율성 미학의의 조화로운운 가상과과 관관조적 수용태도가 파괴괴된다<br />

는 것이다 . 벤야민은은 그의의 영화론에서 연극 , 회화 등 전통적 예술장장르와 자율율성 미학<br />

을을 영화와 이분법적으으로 대립시킴으으로써 영화를 <strong>새로운</strong>운 탈아우라적 <strong>예술의</strong>의 패러다임<br />

으으로 제시하려 한다.<br />

영화에서 아우라의의 파괴괴는 이미 카카메라를 통한 촬영 과과정에서 시작된다 . 벤야민이<br />

보들레르에 관관한 몇가지 모티브 Über einige Motive bei Baudelaire에서<br />

설명한 것<br />

처럼 아우라의의 경험은은 눈길의의 교교환에서 생긴다 . 어떤 사물에서 아우라를 경험한다는<br />

것은은 그것에 “ 눈을을 뜨는 능력 ”(I, 647) 을을 부여한다는 것 , 즉 주체와 사물의의 관관계계를 상<br />

호주관관적 관관계계로 경험한다는 것을을 의의미한다. 17) 아우라적 경험에서 사물에 인인간과과 동<br />

등한 교교감적 주체의의 지위위가 부여된다면 , 카카메라라는 기술적 매체에 의의한 매개는 영화<br />

배우에게서 교교감의의 주체의의 지위위를 박탈하고 인인간을을 한낱 객체로 소외시킨다는 것이<br />

다 . 벤야민은은 이 점에서 영화배우를 연극배우와 대비시킨다 . 연극무무대에서 배우는 자<br />

신의의 온전한 존재 전체로 관관객 앞에 현전한다 . 그는 분절되지 않은은 유기적 , 총체적<br />

연기를 통해 관관객과과 교교감하고 그들의의 감정이입을을 끌어낸다 . 그에 반해 영화 촬영 과과<br />

정에서 배우는 통일적인인 연기의의 주체라고 할 수 없다 . 그의의 앞에는 관관객이 아니라 감<br />

독 , 카카메라맨 , 음음향전문문가 , 조명사 등 “ 전문문가 집단 ”( 선집 2, 65) 이 있있으으며 그는 그들의의<br />

다양한 요구사항에 한낱 “ 소도구 ”( 선집 2, 70) 처럼 객체로서 던져진다 . 그들은은 배우에<br />

게 단편적인인 장장면의의 연기를 주문문하고 , 그것을을 여러 각도에서 반복해 촬영하며 , 편집<br />

자가 그 중 “ 최고기록 ”( 선집 2, 65) 을을 골라낸다 . 영화 촬영은은 나중에 스크린에서 재현<br />

되는 순서대로 순차적으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날씨 등 제반 여건에 따라 불연속<br />

17) Vg. Jürgen Habermas: Walter Benjamin. Bewußtmachende und rettende Kritik, in: ders.:<br />

Philosophisch-politische Profile, Frankfurt a. M. 1981, S. 356. 벤야민은은 기술복제시대의의<br />

예술작품<br />

에서도<br />

사물 일반의의 지각과과 예술작품의의 수용을을 엄밀히 구별하지 않는다. Vgl. Detlev Schöttker:<br />

Kommentar, in: Walter Benjamin: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br />

Frankfurt a. M. 2008, S. 211.


<strong>새로운</strong> <strong>매체와</strong> <strong>예술의</strong> <strong>변화</strong> 339<br />

적으으로 , 그리고 순서를 바꾸어서 진행되는 것이 다반사고 이러한 과과정을을 통해서도 연<br />

기의의 통일성과과 총체성은은 파괴괴된다 . 영화감독을을 비롯해 영화제작집단의의 영화배우에<br />

대한 태도는 아우라적 교교감의의 태도가 아니라 카카메라를 통한 “ 평가 Test”( 선집 2, 65) 의의<br />

태도다 . 벤야민은은 이 관관계계를 연습과과정에서 선수의의 기록을을 평가하는 운운동감독의의 태도<br />

와 비교교한다 . 두 관관계계에서 문문제되는 것은은 모두 주체간의의 아우라적 교교감이나 감정이입<br />

이 아니라 전문문가의의 객관관적 관관찰과과 평가이다 . 벤야민의의 설명에 따르면 영화 생산에<br />

있있어서의의 이러한 관관계계는 영화 수용과과정에서 스크린 위위에 나타나는 영화배우의의 이미<br />

지에 대한 관관객의의 관관계계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 “ 관관객은은 카카메라의의 태도를 취취한다 .<br />

즉 관관객은은 평가한다 .”( 선집 2, 122) 18)<br />

벤야민은은 영화를 연극 뿐 아니라 회화와도 대립시킨다 . 여기서도 벤야민은은 특유의의<br />

유추적 사고방식을을 따라 카카메라맨을을 외과과의의사 Operateur 와 , 화가를 주술사와 비교교한<br />

다 . 주술사가 환자에게 “ 자연스러운운 거리 ” 를 유지한다면 외과과의의사는 환자의의 몸몸속으으<br />

로 파고듦으으로써 그를 “ 인인간 대 인인간으으로 대하는 것을을 포기하고 ”( 선집 2, 80) 사물화<br />

한다 . 화가가 주술사처럼 대상에 ‘ 아우라적 거리 ’ 를 유지하는데 반해 카카메라맨은은 외<br />

과과의의사처럼 대상 속으으로 파고든다.<br />

이를 통해 두 사람이 얻게 되는 이미지는 엄청나게 다르다 . 화가의의 이미지는 하나의의 전체<br />

적 이미지이고 카카메라맨의의 이미지는 여러 개로 쪼개어져 있있는 단편적 이미지들로서 이 단<br />

편적 이미지들은은 <strong>새로운</strong>운 법칙에 의의해 다시 조립된다 .( 선집 2, 80)<br />

영화와 연극의의 대비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화와 회화의의 대비에서도 강조되는 것은은<br />

카카메라 촬영과과 몽몽타주에 의의한 유기적 총체성과과 조화로운운 가상의의 해체 , 한마디로 말해<br />

서 아우라의의 파괴괴다 . 여기서 몽몽타주는 반드시 특정한 예술적 양식로서의의 몽몽타주 편<br />

집 , 즉 에이젠슈타인인 Eisenstein 의의 영화에서처럼 내용적 , 형식적으으로 이질적인인 쇼트를<br />

충돌시키는 것을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19) 그것은은 단편적인인 쇼트들을을 조립 (montieren) 하<br />

18) 벤야민은은 이 에세이의의 제 2 판에서는 영화배우가 “ 기계계장장치에 맞서 자신의의 인인간성 ( 혹은은 관관객들에게<br />

비친친 인인간성 ) 을을 관관철하고 기계계장장치를 자신의의 승리의의 제물로 만든다 ”( 선집 2, 67) 고 하는데 기계계장장<br />

치에 의의해 철저히 객체화되고 한낱 ‘ 소도구 ’ 로 전락한 영화배우가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변신할<br />

수 있있는 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있다.<br />

19) Vgl. Andrea Gnam: Der Kameramann als Operateur. Benjamins Beitrag zu einer Theorie des frühen


340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는 편집 기술 자체를 지칭칭한다 . 벤야민은은 “ 영화라는 <strong>매체와</strong> 함께 주어진 이 기술 ” 20)<br />

자체가 동영상의의 압도적인인 속도와 함께 아름다운운 가상을을 파괴괴하고 관관객에게 충격을을<br />

줌으으로써 관관조적 수용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 영화는 이러한 과과정을을 통해 다<br />

다주의의가 ‘ 내용 ’ 을을 통해 도달하려고 한 것을을 매체의의 ‘ 기술적 구조 ’ 자체를 통해서 성<br />

취취한다는 것이다.<br />

캔캔버스는 보는 사람을을 관관조의의 세계계로 초대한다 . 그는 그 앞에서 자신을을 연상의의 흐름에 내<br />

맡길 수가 있있다 . 그러나 영사막 앞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 영화의의 장장면은은 눈에 들어오자<br />

마자 곧 다른 장장면으으로 바뀌어 버린다 .( 선집 2, 142)<br />

영화라는 매체의의 기술적 특성은은 작품으으로서의의 영화를 규정할 뿐 아니라 그 수용방<br />

식까지 규정한다 . 영화의의 몽몽타주와 빠르게 교교체되는 이미지는 관관객의의 육체를 ‘ 찌르듯<br />

이 ’ 엄습해 충격효과과를 불러일으으키고 관관객의의 정신을을 분산시킨다 . 벤야민은은 유물론적<br />

관관점에서 정신적 , 시각적 , 관관조적인인 기존 <strong>예술의</strong>의 수용방식에 육체적 , 촉각적 , 정신분<br />

산적인인 영화의의 수용방식을을 대비시키고 거기에 정치적으으로 진보적인인 의의미를 부여한다.<br />

예술 작품 앞에서 집중하는 사람의의 태도는 언제든지 종교교적 태도로 되돌아갈 수 있있다 . 그<br />

에 반해 예술작품을을 자신에게 작용하도록 하는 대중의의 산만한 zerstreut 태도는 언제든지 정<br />

치적 태도로부터 그들의의 인인간다운운 형상을을 기대할 수 있있다 .( 선집 2, 214)<br />

영화의의 수용방식은은 집단적 , 비평적이라는 점에서도 아우라적 <strong>예술의</strong>의 경우와 대비<br />

된다 . 영화관관에서 대중은은 “ 산만한 평가자 ”( 선집 2, 146) 로서 영화를 즐기면서 동시에<br />

비평한다 . 대중은은 집단적 감상을을 통해 영화에 대한 의의견견을을 교교환하고 개인인적인인 연상에<br />

빠지지 않도록 서로 “ 통제 ” 함으으로써 스스로를 “ 조직 ” 한다는 것이다 ( 선집 2, 82).<br />

벤야민에 따르면 영화는 작품미학과과 수용미학의의 측면에서 자율율성 미학의의 대안을을<br />

제시할 뿐 아니라 생산미학의의 차원원에서도 큰 <strong>변화</strong>를 가져온다 . 생산력의의 발전이 생산<br />

수단의의 소유자인인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의 관관계계에 변혁을을 가져오듯이 사진 , 영화 같은은<br />

Films, in: Christian Schulte(Hg.): a. a. O., S. 179f.<br />

20) Peter Bürger: Theorie der Avantgarde, S. 99.


<strong>새로운</strong> <strong>매체와</strong> <strong>예술의</strong> <strong>변화</strong> 341<br />

기술복제술을을 통한 예술적 생산력의의 발전은은 “ 정신적 생산수단의의 사회화 ”(II, 701) 를<br />

촉진하고 예술작품의의 생산자와 수용자 사이의의 비대칭칭적인인 관관계계에 일대 변혁을을 가져<br />

올 것이라는 것이다 . 여기서 벤야민에게 영향을을 준 전위위운운동은은 다다주의의보다 러시아<br />

의의 생산주의의다 . 러시아 생산주의의자들은은 문문학적 능력을을 천재의의 독점물이 아니라 “ 공공<br />

유재산 ”(II, 695) 으으로 간주했으으며 노동자 글쓰기 운운동 등을을 통해 저자와 독자 사이의의<br />

거리를 제거하려 했다 . 벤야민에 따르면 영화라는 매체는 그 대중적 특성상 누구나<br />

비평가로서 수용과과정에 능동적으으로 참여할 수 있있을을 뿐 아니라 생산과과정에도 참여할<br />

수 있있다 . 왜냐하면 “ 오늘날은은 누구나 영화에 출연할 권권리가 있있 ” 기 때문문이다 ( 선집 2,<br />

76). 그러나 이러한 “ 복제되기 Reproduziertwerden 에 대한 현대인인의의 정당한 요구 ”( 선<br />

집2, 77) 21)는 생산관관계계의의 <strong>변화</strong> 없이는 온전히 충족될 수 없다 . 자본주의의 사회에서는<br />

영화산업이 스타 숭배를 조장장함으으로써 대중의의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고 있있기 때문문이<br />

다 . 그에 반해 러시아에서는 영화가 현실도피적인인 환상의의 왕국이 아니라 평범한 노동<br />

자가 현실적인인 노동과과정 속에 자신을을 재현하는 무무대를 제공공함으으로써 예술과과 문문화의의<br />

민주화에 기여한다는 것이다.<br />

3. 영화와 산업사회<br />

벤야민은은 영화라는 <strong>새로운</strong>운 매체가 가져온 <strong>예술의</strong>의 <strong>변화</strong>를 생산미학 , 작품미학 , 수<br />

용미학 등 모든 차원원에서 검토하지만 그의의 관관심의의 초점은은 수용의의 측면이다 . 영화는<br />

예술작품의의 관관조적 수용방식을을 파괴괴하고 그 충격효과과를 통해 탈아우라적 수용방식을을<br />

창출한다 . 그런데 충격적 , 촉각적 , 정신분산적인인 이 <strong>새로운</strong>운 예술 수용방식은은 산업화 ,<br />

도시화 , 대중화 같은은 급격한 사회적 <strong>변화</strong>로 인인한 인인간의의 지각구조의의 <strong>변화</strong>와도 밀접하<br />

게 연관관되어 있있다 . 벤야민이 영화와 산업사회를 매개하는 주된 고리는 바로 이러한<br />

21) 여기서 ‘ 복제 Reproduzieren’ 의의 개념은은 물론 인인간복제가 아니라 ‘ 촬영 Aufnehmen’ 의의 의의미로 사용<br />

되었다 . 벤야민의의 글에서 ‘ 복제 ’ 라는 개념도 그와 대립되는 아우라의의 개념만큼 다의의적이다 . 벤야<br />

민은은 사진을을 통한 “ 예술작품의의 복제 ”( 선집 2, 45, 52) 에 대해서 말하지만 이 경우도 ‘ 복제 ’ 보다 ‘ 모<br />

사 Abbild’ 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 왜냐하면 예를 들어 한 조각물의의 사진은은 그 조각물의의 복<br />

제품은은 아니기 때문문이다. (Vgl. Klaus Weimar:Text-Critical Remarks et Alia, in: Hans Ulrich<br />

Gumbrecht/Michael Marrinan(Hg.): a. a. O., S 191; Henning Ritter: Toward the Artwork Essay,<br />

Second Version, in: Hans Ulrich Gumbrecht/Michael Marrinna(Hg.): a. a. O., S. 204)


342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지각의의 <strong>변화</strong>다 . 영화의의 탈아우라적 수용방식은은 산업사회에서 인인간의의 지각구조의의 변<br />

화를 반영하는 동시에 촉진한다는 것이다.<br />

영화에서는 충격적 지각이 형식적 원원칙으으로서 관관철된다 . 콘베이어 벨트에서 생산의의 리듬을을<br />

규정하는 것은은 영화에서 수용의의 리듬의의 토대가 된다.(I, 631)<br />

벤야민은은 충격적 , 정신분산적 지각을을 매개로 영화관관과과 산업사회의의 노동현장장 사이<br />

에 유추관관계계를 설정한다 . 충격과과 정신분산은은 영화의의 수용 뿐 아니라 현대의의 대도시와<br />

공공장장에서의의 지각 방식을을 규정한다 . 영화관관에서 쉴 틈 없이 쇄도하는 이미지에 직면한<br />

관관객과과 마찬가지로 대도시의의 혼잡한 교교통 속에 있있는 통행자나 자동화된 공공장장의의 콘베<br />

이어 벨트 앞에 있있는 노동자도 기계계의의 압도적인인 리듬에 던져져 있있다 . 현대인인은은 엄청<br />

난 속도로 자신에게 육박해오는 다양한 자극과과 요구에 더 이상 집중이나 관관조 같은은<br />

전통적 지각방식을을 취취할 수 없으으며 그러한 방식으으로는 거기에 적절히 대처할 수도<br />

없다 . “ 역사적 전환기에 인인간의의 지각기관관에 부과과된 과과제는 단순히 시각 , 다시 말해<br />

관관조를 통해서 해결결할 수 없으으며 촉각적 수용의의 주도 하에 습관관을을 통해서 점차적으으<br />

로 해결결된다 ”( 선집 2, 91). 복잡한 대도시 도로에서 사고의의 위위험에 처하지 않고 운운전을을<br />

하거나 컨베이어 벨트에서 할당된 작업을을 완수하기 위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br />

밀려오는 자극과과 요구에 주의의를 적절히 분산하고 기계계와의의 육체적 , 촉각적인인 상호작<br />

용을을 습관관화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 이 점에서 영화의의 수용은은 정신분산적 , 촉각적 지<br />

각방식을을 촉진시킴으으로써 “20 세기 인인간을을 위위한 일종의의 생존훈련 ” 22)이 될 뿐 아니라<br />

“ 산업생산력의의 증대 ” 23)에도 기여한다.<br />

영화를 통해 “ 인인간의의 자기소외가 지극히 생산적으으로 활용되게 되었다 ”( 선집 2, 73)<br />

면 이러한 ‘ 자기소외의의 생산적 활용 ’ 은은 물론 산업 생산력의의 증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br />

벤야민은은 영화가 촉발하는 정신분산의의 지각 방식에 경제적인인 관관점에서 뿐 아니라 정<br />

치적인인 관관점에서도 긍정적인인 기능을을 부여한다 . 그것은은 관관조와 정신집중이 항상 종교교<br />

적 숭배로 퇴행할 위위험을을 가지고 있있으으며 파시즘으으로 귀결결될 가능성을을 가지고 있있는데<br />

반해 정신분산은은 “ 파시즘의의 목적을을 위위해서는 전혀 쓸모가 없다 ”( 선집 2, 43) 는 소극적<br />

22) Angela Spahr: Der Verfall der Aura. Walter Benjamin, S. 31.<br />

23) Miriam Bratu Hansen: Room - for - Play. Benjamins Gamble with Cinema, S. 154.


<strong>새로운</strong> <strong>매체와</strong> <strong>예술의</strong> <strong>변화</strong> 343<br />

인인 의의미에서 만이 아니다 . 브레히트의의 서사극이 전통극과과 달리 관관객에게 연극 ( 배우 )<br />

에 대한 감정이입이 아니라 이성적 평가의의 태도를 취취하게 하려 한다면 벤야민은은 영<br />

화가 불러일으으키는 정신분산의의 상태가 이러한 태도와 친친화력이 있있는 것으으로 보았다.<br />

영화에서 카카메라를 통한 매개는 서사극의의 소격효과과와 같은은 결결과과를 가져온다 . 영화 관관<br />

객은은 카카메라와 마찬가지로 감정이입이 아니라 이성적 평가의의 태도를 취취하고 집단적<br />

인인 의의견견 교교환을을 통해 공공통된 견견해에 이르게 된다 . 말하자면 탈아우라적 예술형식으으로<br />

서의의 영화가 “ 비판적 공공론의의 전제 ” 24)가 된다는 것이다.<br />

기술복제시대의의 예술작품 의의<br />

제 2판에는<br />

영화의의 사회적 기능과과 관관련하여 생산력<br />

의의 증대라는 생산주의의적 모델 25) , 비판적 공공론의의 형성이라는 브레히트적 모델이외에<br />

“ 인인간과과 기계계장장치 사이의의 균형 ”( 선집 2, 82) 의의 창출이라는 또 하나의의 모델이 존재한다 .<br />

여기서 벤야민은은 영화가 관관객의의 “ 집단적 웃웃음음 ”( 선집 2, 85) 을을 유발함으으로써 산업화와<br />

기술문문명이 가져온 심리적 억압을을 해소하는 일종의의 “ 정신적 예방접종 ”( 선집 2, 82) 의의<br />

기능을을 하리라는 생각을을 전개한다 . 그것은은 그가 초현실주의의를 수용하는 과과정에서 발<br />

전시킨 , 개인인적 주체를 대체한 집단적 신체의의 신경감응응 Innervation으으로서의의<br />

예술이라<br />

는 구상 26)에 토대를 둔 것이다 . 그러나 출판본인인 제 3판에서는<br />

브레히트적 모델이 초<br />

현실주의의적인인 모델을을 대체한다 . 한젠의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은 , 디즈니 애니메이션에<br />

대한 관관객의의 집단적 웃웃음음은은 “ 혁명적이기는 커녕 최악의의 부르주아적 새디즘 ”(I, 1001)<br />

의의 표출에 불과과하다는 아도르노의의 지적 때문문이라기보다 , 절박한 정치상황 때문문에 벤<br />

야민이 이 모델의의 정치적 의의미에 대해서 회의의하게 되었기 때문문이다. 27) 파시즘의의 급<br />

속한 확산에 직면해서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은 “ 집단의의 신경감응응 ”( 선집 2, 59) 이 아니라<br />

24) Russel Berman: Moderne, Modernismus und Öffentlichkeit, in: Peter Uwe Hohendahl(Hg.):<br />

Öffentlichkeit. Geschichte eines kritischen Begriffs, Stuttgart 2000, S. 89.<br />

25) 러시아 생산주의의자들의의 궁궁극적인인 목적은은 예술 생산의의 민주화를 통한 경제적 생산력의의 증대였다.<br />

린트너는 벤야민이 작가를 생산자라고 부를 때 경제적인인 생산이 아니라 예술적인인 생산을을 의의미한<br />

다고 하지만 벤야민도 러시아 생산주의의자들처럼 노동과과 상호행위위를 엄밀하게 구분하지는 않는다.<br />

(Vgl. Burkhardt Lindner(Hg.): Benjamin Handbuch, Stuttgart 2006, S. 435; 마르크스주의의에서 노동<br />

과과 상호행위위의의 미분화에 대해서는 Vgl. Jürgen Habermas: Technischer Fortschritt und soziale<br />

Lebenswelt, in: ders.: Technik und Wissenschaft als Ideologie, Frankfurt a. M. 1963, S. 115.)<br />

26) 노르베르트 볼츠 / 빌렘 반 라이엔 ( 김득룡 역 ): 발터 벤야민 - 예술 , 종교교 , 역사철학 , 서울울 2000, 114<br />

면 이하 ; 강수미 : 인인간학적 유물론과과 <strong>예술의</strong>의 생산과과 수용 - 발터 벤야민의의 초현실주의의 를<br />

중심으으<br />

로 , 미학 제 52 집 (2007년 12 월월 ), 58 면 이하 참조 .<br />

27) Vgl. Miriam Bratu Hansen: a. a. O., S. 165.


344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 집단적 이성 ”( 선집 2, 75) 의의 평가였던 것이다 . 기술복제시대의의 예술작품 전체가 체<br />

계계적인인 논문문보다는 이론적 몽몽타주의의 성격을을 띠고 있있지만 특히 제 2판에서<br />

영화의의 사<br />

회적 기능에 대한 이 제 3의의<br />

모델은은 논리적 비약이 심한 이론적 스케치의의 인인상을을 주<br />

므로 이 부분이 제 3 판에서 삭제된 것은은 이러한 사실과과도 무무관관치 않을을 것이다 . 28)<br />

III. 레프 마노비치 : 뉴미디어의 혼성성의 미학<br />

1. 영화에서 뉴미디어로 - 연속성과 불연속성<br />

벤야민은은 영화를 회화나 연극 등 기존의의 예술 장장르를 비롯해 예술 전통 전체와의의<br />

대립 관관계계에서 파악했다 . 그는 영화가 자율율성 미학과과 단절하고 아우라적 지각을을 파괴괴<br />

하며 , <strong>예술의</strong>의 기능전환을을 가져옴으으로써 사회의의 급진적 변혁에 기여할 것으으로 보았다 .<br />

그에 반해 마노비치는 “ 과과거와의의 극단적 분리는 대가를 요구한다 ”( 뉴 , 359) 며 정치적<br />

이든 심미적이든 급진적 단절의의 대가에 주목한다 . 마노비치도 과과거로의의 회귀를 옹호<br />

하는 보수주의의자나 복고주의의자는 아니다 . 그는 단지 <strong>변화</strong>를 오래된 것과과 <strong>새로운</strong>운 것<br />

사이의의 단절이나 분리 , 교교체가 아니라 차용과과 혼합 , 상호작용으으로 파악할 뿐이다 . 마<br />

노비치는 자신의의 이러한 역사관관을을 넓은은 의의미에서 탈현대주의의의의 흐름에 속하는 것으으<br />

로 이해한다 ( 뉴 , 10).<br />

마노비치가 기존의의 매체에서 뉴미디어로의의 이행에 관관한 설명에서 주로 참조하는<br />

것은은 현대주의의에서 탈현대주의의로의의 이행에 대한 프레드릭 제임슨 Frederic Jameson의의<br />

설명모델이다 . 제임슨에 따르면 현대주의의와 탈현대주의의의의 관관계계를 근본적인인 단절이나<br />

전면적인인 교교체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한 역사적 시기에 공공존하는 여러 가지 경향들을을<br />

28) 생산주의의와 초현실주의의는 부르주아적 개인인을을 해체하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예술 행위위와 경제<br />

적 생산의의 관관계계에 대해서는 상반된 입장장을을 취취한다 . 러시아 생산주의의자들이 실용주의의적 관관점에서<br />

예술과과 노동을을 기능적으으로 결결합시키려하는데 반해 초현실주의의자들은은 둘을을 배타적인인 것으으로 파악<br />

하고 가치로서의의 노동 자체를 부정한다 (Vgl. 할 포스터외 : 1900 년 이후의의 미술사 : 모더니즘 , 반모<br />

더니즘 , 포스트모더니즘 , 서울울 2007, 26 면 ; Peter Bürger: Der französische Surrealismus, Frankfurt<br />

a. M. 1996, S. 203). 이 점에서도 영화의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이 제 3의의<br />

구상을을 다른 모델들과과 결결<br />

합시키기는 어려웠웠을을 것이다.


<strong>새로운</strong> <strong>매체와</strong> <strong>예술의</strong> <strong>변화</strong> 345<br />

동질화시킨다는 문문제점이 있있다 . 따라서 그는 탈현대주의의를 현대주의의를 대체한 완전<br />

히 <strong>새로운</strong>운 문문화적 패러다임으으로 제시하기보다 다양한 경향들의의 지속과과 병존 속에서<br />

“ 문문화적 우세종 ” 29)으으로 , 즉 하나의의 지배적인인 경향으으로 간주할 뿐이다 . 마노비치는 이<br />

전의의 매체에서 뉴미디어로의의 이행도 마찬가지로 급진적 단절이 아니라 이전에 지배<br />

적이었던 요소가 배경으으로 밀려나고 배경에 있있던 요소가 전면에 등장장하는 식으으로 점<br />

진적으으로 일어난다고 본다 . “ 이전에는 배경이나 변두리에 속했던 문문화적 가능성들이<br />

중심으으로 온다 . 예를 들어 애니메이션이 실사영화에 , 공공간적 몽몽타주가 시간적 몽몽타주<br />

에 , 데이터베이스가 서사에 도전한다 .”( 뉴 , 413) 뉴미디어 문문화는 시각매체의의 전통 ,<br />

그 중에서도 특히 초기 영화에 잠재한 다양한 가능성들과과의의 상관관관관계계 속에서 발전한<br />

다는 것이다.<br />

영화는 20세기의의<br />

주도적인인 대중문문화가 되었지만 벤야민이 기대한 것과과 달리 탈아<br />

우라적 대중예술로서 전통적인인 시각문문화나 미학과과의의 급진적 총체적인인 단절을을 가져오<br />

지는 못못했다 . 영화에서<br />

스크린의의 이미지는 완전한 환영과과 시각적 풍부함을을 추구하는 한편 관관객은은 의의심을을 중지시키<br />

고 이미지에 몰몰입하도록 한다 . 현실 속의의 스크린은은 관관객의의 물리적 공공간 안에 자리 잡고 있있<br />

는 제한된 창에 불과과한데도 말이다 . 하지만 관관객은은 그것 밖의의 물리적 공공간을을 무무시하고 자<br />

신이 이 창 안에서 보고 있있는 것에만 전적으으로 집중한다 .( 뉴 , 147)<br />

영화를 통해 회화와 연극의의 환영주의의적 , 사실주의의적 전통이나 몰몰입과과 집중의의 수용<br />

방식은은 파괴괴되었다기보다 오히려 강화되었다 . 벤야민이 탈아우라적 지각방식으으로서<br />

제시한 정신분산은은 그가 거기에서 끌어낸 정치적 효과과는 논외로 한다고 해도 영화의의<br />

수용태도에 대한 현상학적 묘묘사로서도 “ 이상할정도로 현실과과 동떨어진 것 ” 30)으으로 판<br />

29) Frederic Jameson: Postmoderne - zur Logik der Kultur im Spätkapitalismus, in: Andreas Huyssen/<br />

Klaus R. Scherpe(Hg.): Postmoderne. Zeichen eines kulturellen Wandels, Hamburg 1986, S. 48.<br />

30) Angela Spahr: Der Verfall der Aura. Walter Benjamin, S. 29. 벤야민은은 예술작품에 정신을을 집중하<br />

는 사람은은 “ 옛날 중국의의 전설에서 어떤 화가가 자기가 완성한 그림을을 보고 그 속으으로 들어갔다는<br />

식으으로 작품 안으으로 들어간다 ”( 선집 2, 90) 고 하면서 이러한 몰몰입적 수용방식을을 영화의의 정신분산<br />

적 수용과과 대비시키는데 실제 영화 관관객은은 오히려 이 중국 전설 속의의 화가에 가깝다 . 노엘 캐캐롤<br />

이 지적하는 것처럼 “ 영화는 정신분산을을 유도하지 않는다 . 영화는 관관객의의 눈을을 스크린에 붙잡아<br />

매는 기계계다 .”(Noel Carroll: A Philosophy of Mass Art, Oxford 1998, S. 131)<br />

심지어는 에이젠슈


346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명되었다 . 벤야민은은 영화 작품이나 수용방식을을 카카메라를 통한 재현 , 불연속적 편집 ,<br />

동영상의의 속도 등 영화 기술 자체에서 도출했지만 영화의의 이미지가 필연적으으로 불연<br />

속적으으로 된 것도 , 수용이 산만해진 것도 아니다 . 벤야민은은 영화의의 기술과과 생산방식<br />

에서 그 산물로서의의 영화 이미지와 수용방식을을 도출하는 기술결결정론적 관관점의의 제약<br />

때문문에 서사적 , 환영주의의적 전통의의 지속력을을 과과소평가했다 . 그는 또 어둠 속에 스크<br />

린을을 향해 배치된 좌석에 앉아서 가상의의 3차원원<br />

공공간으으로 열린 창안을을 들여다보는<br />

“ 영화의의 물리적 인인터페이스 ”( 뉴 , 122) 가 정신분산적 , 집단적 수용보다 몰몰입적이고 개<br />

인인적인인 수용을을 촉진시킨다는 점도 간과과했다.<br />

벤야민의의 영화론에서 엿보이는 기술결결정론적 관관점은은 오늘날 뉴미디어론에서도 되<br />

풀이해 나타나고 있있다 . 오늘날 많은은 매체이론가들도 뉴미디어 문문화를 <strong>새로운</strong>운 기술과과<br />

문문화적 전통 , “ 컴퓨터의의 층층위위와 문문화의의 층층위위 ”( 뉴 , 92) 의의 상호작용으으로 보지 않고 디지<br />

털 기술 자체의의 특성에서 그 문문화적 산물과과 수용방식을을 도출한다 . 뉴미디어 기술의의<br />

<strong>새로운</strong>운 점은은 불연속적 재현 자체에 있있는 것이 아니다 . 왜냐하면 영화도 초당 24프레<br />

임으으로 분절되어 있있고 그런 점에서 어떤 의의미에서 이미 디지털적이기 때문문이다 . 뉴미<br />

디어 기술의의 진정한 새로움움은은 “ 수적 재현 ”( 뉴 , 70) 에 있있다 . 컴퓨터 데이터가 쉽게 조<br />

작 변경할 수 있있는 것 , 즉 그 “ 가변성 ”( 뉴 , 80) 도 그것이 숫자로 구성되어 있있기 때문문<br />

이다 . 그런데 컴퓨터 데이터의의 이러한 분절적 , 수리적 성격에서 바로 그 문문화적 산물<br />

의의 특성이 도출되는 것은은 아니다 . 프레임의의 분절성 , 편집의의 비선형성이라는 영화 기<br />

술의의 특성과과 마찬가지로 분절적 , 수적 재현이라는 뉴미디어 기술의의 특징도 그리스의의<br />

전설적인인 화가 제욱시스의의 포도 그림 이후로 유구히 이어져 온 환영주의의 시각문문화의의<br />

전통에 근본적인인 단절을을 가져오지는 못못했다 . 마노비치가 지적하는 것처럼 “ 디지털<br />

시각문문화의의 역설은은 모든 이미지작업이 컴퓨터에 기반하고 있있음음에도 선원원근법 , 심도<br />

효과과 , 모션블러 31) 등 사진이나 영화이미지의의 지배가 오히려 점점 더 확산되고 있있다<br />

는 것이다 ”( 뉴 , 240).<br />

컴퓨터는 사진이나 영화 같은은 이전의의 <strong>매체와</strong> 달리 ‘ 인인조이미지 synthetic image’ 32)<br />

타인인의의 영화를 비롯해 러시아의의 몽몽타주 영화도 극적 긴장장을을 겨냥해 구성되었으으므로 정신분산적<br />

으으로 수용될 수는 없다 (Vgl. Andrea Gnam: Der Kameramann als Operateur. Benjamins Beitrag zu<br />

einer Theorie des frühen Flims, in: Christian Schulte(Hg.): a. a. O., S. 186).<br />

31) 모션블러는 빠른 동작에서 화면을을 흐리게 처리하는 효과과를 가리킨다.


<strong>새로운</strong> <strong>매체와</strong> <strong>예술의</strong> <strong>변화</strong> 347<br />

를 만들어 낼 수 있있다 . 컴퓨터의의 인인조이미지는 궁궁극적으으로 숫자로 이루어졌다는 점에<br />

서 사진이나 영화이미지와 물질적으으로 다를 뿐 아니라 카카메라 앞의의 지시체를 필요로<br />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으로도 다르다 . 많은은 매체학자들은은 ‘ 원원본없는 이미지 ’<br />

라는 이 존재론적 차이에서 디지털 미학의의 혁신성을을 찾고 있있다. 33) 컴퓨터가 만들어<br />

낸 인인조이미지는 무무한한 해상도와 세밀함을을 가지고 있있기 때문문에 지각의의 차원원에서도<br />

인인간의의 눈이나 카카메라가 포착한 이미지와는 다르다 .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 , 존재론적 ,<br />

지각적 차이도 환영주의의 문문화의의 속행을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 환영주의의의의 전통은은 오히<br />

려 환타지 영화나 사이언스 픽션 영화 등에서 ,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도 일어날<br />

수 있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 인인조사실주의의 synthetic reallism”( 뉴 , 245) 를 통해 그 영<br />

역을을 확장장해왔다. 34) 헐리우드 영화에서 인인조이미지는 , 우리가 그동안 영화의의 반복적<br />

경험으으로 사실적인인 것으으로 받아들이게 된 필름 이미지로 재가공공된다.<br />

주라기 공공원원 에서<br />

컴퓨터 이미지는 필름 이미지에 앞에 굴굴복한다 . 모든 방법이 동원원되어<br />

컴퓨터 이미지의의 완벽함은은 훼손되고 또 영화 내용에 의의해 은은폐된다 . 컴퓨터로 만들어진 이<br />

미지의의 원원래 깔끔하고 날카카로운운 , 그리고 초점이나 입자성이 없는 성질은은 여러 방식으으로 훼<br />

손된다 . 심도효과과와 입자성이 인인위위적으으로 더해진다 .( 뉴 , 268)<br />

마노비치는 뉴미디어를 “ 영화 사실주의의의의 재생 ”( 뉴 , 392) 으으로 환원원하려는 이러한<br />

흐름을을 오늘날 뉴미디어 문문화의의 전개 방향 중 하나로서 확인인할 뿐 거기에 긍정적인인<br />

의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35) 그가 주목하는 것은은 오히려 부크 코직 Vuk Cosic의의<br />

아<br />

32) 마노비치 책의의 한국어 번역판에는 ‘syntheic’ 과과 ‘compositing’ 이 모두 ‘ 합성 ’ 으으로 번역되어 있있고 국<br />

내의의 매체학자들도 이 번역을을 따르고 있있지만 이 논문문에서는 혼동을을 피하기 위위해 전자는 ‘ 인인조 ’ 로 ,<br />

후자는 ‘ 합성 ’ 으으로 번역했다 . ‘compositing’ 은은 다른 이미지들을을 매끄럽게 이어 붙여 하나의의 이미지<br />

로 만드는 것으으로 ‘syntheic’ 과과는 분명히 의의미상 차이가 있있기 때문문이다 . 연속적인인 ‘ 합성<br />

compositing’ 이 불연속적인인 몽몽타주와 대립된다면 컴퓨터로 만들어낸 ‘ 인인조 synthetic’ 이미지는 카카<br />

메라로 실제 대상을을 찍은은 필름 이미지와 대립관관계계에 있있다.<br />

33) 심혜련 :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의의 미학 , 105 면 ; 진중권권 엮음음 : 미디어아트 , 10면<br />

참조<br />

34) 최근에 상영되어 대중적인인 인인기를 끌고 있있는 영화 아바타 는<br />

‘ 인인조사실주의의 ’ 의의 대표적인인 예라고<br />

할 수 있있다 . 아바타 는 75% 가 컴퓨터 그래픽으으로 제작되었지만 마노비치가 지적하듯이 이미 <br />

스타워워즈 에피소드 I은은 95% 가 컴퓨터 이미지로 이루어졌으으므로 ( 뉴 , 380) 실사에 대한 에니메이션<br />

의의 이러한 우위위가 전혀 <strong>새로운</strong>운 현상은은 아니다 . 문문제는 이 ‘ 원원본 없는 이미지 ’ 들도 결결국은은 ‘ 사실효<br />

과과 ’ 에 기여할 뿐이라는 것이다 .


348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 도판 2><br />

코직의 아스키 영화<br />

영화의의 문문화적 전통과과 <strong>새로운</strong>운 컴퓨터 기술의의 이러한 혼합에 있있다.<br />

스키 ASCII 영화 같은은 시도들<br />

이다 . 쥬라기 공공원원 의의<br />

특수효<br />

과과에서 숫자로 이루어진 디지<br />

털 코드가 겉으으로 드러난 필름<br />

이미지 아래 감추어져 있있다면<br />

코직의의 아스키 영화는 추상적<br />

코드와 사실적인인 이미지를 동<br />

시에 보여준다 .( 뉴 , 410) 마노비<br />

치의의 관관심의의 초점은은 영화 사실<br />

주의의 전통의의 단순한 지속보다<br />

이러한 혼합은은 온라인인 미술관관과과 컴퓨터 게임 , 가상현실과과 상호작용적 매체예술 등<br />

많은은 뉴미디어 장장르의의 소프트웨웨어 구조 자체에 내재한다 . 여기서 영화의의 전통이란 단<br />

일 시점의의 원원근법 , 직사각형의의 프레임 , 역동적인인 카카메라 , 촬영과과 편집 관관습 , 캐캐릭터<br />

등을을 지칭칭한다 . 컴퓨터 소프트웨웨어에서는 이러한 영화의의 요소들이 차례차례 도구상<br />

자로 들어와 우리가 데이터를 경험하고 파악하는 방식 자체를 규정하게 되었다 : “ 과과<br />

거에 영화였던 것이 이제 인인간과과 컴퓨터 간의의 인인터페이스가 된 것이다 .”( 뉴 , 136) 그<br />

러나 컴퓨터 인인터페이스의의 언어는 “ 혼성적 hybrid”( 뉴 , 142) 이다 . 그것은은 영화라는 재<br />

현 형식 뿐 아니라 이미지를 조작하고 제어하는 인인간 -컴퓨터 - 인인터페이스 (HCI) 의의 언<br />

어로 이루어져 있있다 . 컴퓨터의의 스크린은은 가상공공간으으로 열린 창인인 동시에 자동차나 비<br />

행기의의 제어판과과 같은은 가상의의 제어판인인 것이다 . 거기에는 “ 투명성과과 불투명성 , 환영<br />

적 공공간으으로서의의 이미지와 행위위 도구로서의의 이미지 ”( 뉴 , 142) 가 혼합되어 있있다 .<br />

컴퓨터 스크린의의 이러한 혼성적 성격은은 그 수용방식에도 영향을을 준다 . 메뉴 , 컨트<br />

롤 키 , 아이콘 등으으로 이루어진 제어판은은 환영의의 생산조건을을 드러냄으으로써 벤야민이<br />

영화에서 기대했던 것 같은은 정신분산적 지각을을 불러일으으킨다 : “ 기계계가 주기적으으로<br />

재등장장하고 메시지의의 커뮤뮤니케이션 통로가 지속적으으로 나타나면서 주체는 환영이라<br />

35) 볼터와 그루신도 이처럼 <strong>새로운</strong>운 매체가 이전의의 매체를 단순히 모방함으으로써 거기에 흡수되는 것<br />

을을 퇴행적 재매개 로 규정한다 제이 데이비드 볼터 리처드 그루신 재매개 면<br />

“ ” ( / : , 178 ).


<strong>새로운</strong> <strong>매체와</strong> <strong>예술의</strong> <strong>변화</strong> 349<br />

는 꿈의의 세계계에 너무무 오랫동안 빠져들 수는 없고 집중과과 분리를 번갈아 경험한다.”<br />

( 뉴 , 272) 하지만 마노비치는 컴퓨터 게임에 전형적인인 이러한 몰몰입과과 정신분산의의 교교<br />

체가 환영을을 근본적으으로 파괴괴하거나 해방적 인인식을을 가져다주지는 못못한다고 본다.<br />

환영과과 행위위 , 상상적인인 우주로 난 창과과 제어판의의 혼합으으로 이루어진 뉴미디어에서<br />

둘 중 어느 쪽이 우위위를 이루는가하는 문문제에 대한 마노비치의의 입장장이 일관관된 것은은<br />

아니다 . 왜냐하면 그는 컴퓨터 게임에서 영화적 환영의의 우위위를 지적한 후 “ 뉴미디어<br />

는 영화 스타일의의 환영을을 상호작용적인인 제어판이라는 더 넓은은 틀 안에 끼워워 넣고 있있<br />

다 ”( 뉴 , 276) 고 다시 제어에 손을을 들어주고 있있기 때문문이다 . 컴퓨터 게임이나 가상현<br />

실 , 상호작용적인인 컴퓨터 매체예술 등 혼성적인인 뉴미디어 문문화가 환영주의의의의 확장장에<br />

그칠칠지 아니면 <strong>새로운</strong>운 상호작용적 미학을을 창출할 것인인지는 앞으으로 좀 더 지켜보아야<br />

할 것이다 . 물론 매체학자 중에는 - 영화가 아니라 - 상호작용적인인 컴퓨터 게임에서<br />

뉴미디어문문화의의 패러다임을을 찾는 사람도 있있지만 이러한 견견해는 아직 질적인인 측면에<br />

서는 큰 설득력을을 얻지 못못하고 있있다 . 왜냐하면 매체예술가 제프리 쇼 Jeffrey Shaw가<br />

지적하듯이 컴퓨터 게임은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순전히 상업적인인 관관심에서만 개발되고<br />

있있어서 작가주의의 영화에 상응응할 만한 수준 있있는 예술적 산물을을 내놓지 못못하고 있있기<br />

때문문이다. 36)<br />

컴퓨터 게임과과 가상현실이 영화적 전통과과 <strong>새로운</strong>운 컴퓨터 기술의의 혼합의의 성격을을 가<br />

지고 있있다면 마노비치는 질적으으로 <strong>새로운</strong>운 뉴미디어의의 가능성은은 원원격행위위 Teleaction<br />

에서 찾는다 . 원원격행위위는 원원거리에서 실시간으으로 이미지를 전송할 뿐 아니라 이미지<br />

를 통해서 그 원원천인인 현실 자체를 제어하는 것을을 지칭칭한다 . 벤야민은은 기술복제시대<br />

의의 예술작품 에서<br />

고대 그리스 시대에 사람들이 <strong>예술의</strong>의 영원원한 가치를 추구한 것을을<br />

당시 기술의의 낮은은 발전수준과과 연관관시키면서 그리스 조각에 대한 영화의의 우월월성은은 기<br />

술 발전이 가능하게 한 그 “ 수정능력 Verbesserungsfähigkeit”( 선집 2, 61) 에 있있다고 보<br />

36) 진중권권편 : 미디어아트 , 193 면 참조 . 매체예술가 사이먼 페니 Simon Penny 는 “ 재현적 존재론에서<br />

수행적 존재론으으로의의 이동 ” 에 따라 컴퓨터 게임이 21세기<br />

문문화의의 패러다임이 될 것이라고 전망<br />

하면서 “ 모바일 게임의의 세익스피어 ” 를 기대하지만 , 다른 한편으으로 현재 유통되는 컴퓨터 게임에<br />

대해서는 화려한 비주얼을을 벗겨내면 “ 반복적 작업 , 사용자와 기계계의의 강압적 결결합 , 높은은 생산성과과<br />

결결합된 보상체계계 ” 등 “ 가장장 나쁜 종류의의 산업노동과과 구별되지 않는다 ” 고 평가절하한다 ( 같은은 책 ,<br />

263, 248 면 ). 만일 그렇다면 소위위 패러다임의의 <strong>변화</strong>란 것이 산업노동을을 위위해 필요한 ‘ 지각훈련 ’ 의의<br />

매체가 영화에서 컴퓨터 게임으으로 교교체된 것에 불과과하다고 할 수도 있있을을 것이다.


350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았다 . 영화 기술을을 통해 예술은은 더 이상 고정된 객체가 아니라 가변적인인 기호가 되었<br />

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러한 ‘ 수정능력 ’ 에 있있어 뉴미디어는 영화에 비해 장장족의의 발전<br />

을을 했다 . 컴퓨터 이미지는 숫자로 이루어져 있있으으므로 필름 이미지보다 변경과과 조작이<br />

훨씬 더 수월월하고 그 폭도 넓다 . 컴퓨터 게임이나 가상현실에서 주체가 시뮬레이션으으<br />

로 만들어진 가짜 세계계와 상호작용하면서 그것을을 <strong>변화</strong>시킬 수 있있다면 원원격행위위에서<br />

는 여기에서 한 걸음음 더 나아가 멀리 떨어진 곳곳에서 이미지를 조작함으으로써 현실 자<br />

체를 <strong>변화</strong>시킬 수 있있다 . 마노비치는 1960 년대 전위위적 예술가들이 퍼포먼스 , 해프닝<br />

등 행위위를 통해서 재현 개념 중심의의 전통 미학을을 벗어나려고 시도했지만 그다지 성<br />

공공적이지 못못했던 점을을 지적하면서 원원격행위위를 뉴미디어의의 <strong>새로운</strong>운 예술적 가능성으으로<br />

서 제시한다 ( 뉴 , 220).<br />

그러나 원원격행위위를 통한 거리의의 축소와 현실에의의 개입에서 마노비치가 긍정적인인<br />

가능성만을을 보는 것은은 아니다 . 벤야민은은 기술복제시대의의 예술작품 에서<br />

카카메라가<br />

아우라적 거리를 무무시한 채 대상 속으으로 침침투해 지금까지 묻혀 있있던 “ 시각적 무무의의식<br />

의의 세계계 ”( 선집 2, 84) 를 드러냄으으로써 지각의의 심화를 가져왔다고 보았으으며 , 영화 수용<br />

의의 촉각적 성격도 지각구조의의 <strong>변화</strong>라는 관관점에서 긍정적으으로 평가했다 . 근래에 들어<br />

서도 시각적 거리는 지배자의의 위위치에 선 주체가 객체를 지배하는 조건이라는 관관점에<br />

서 시각을을 비판하고 촉각을을 옹호하는 경향이 유행이다 . 그러나 마노비치가 지적하듯<br />

이 “ 시각의의 잠재적 공공격성은은 전자적으으로 가능해진 촉각이 지닌 공공격성에 비하면 아<br />

무무 것도 아니다 ”( 뉴 , 232). 오늘날 우리는 원원격행위위을을 통해서 멀리 있있는 대상을을 만질<br />

수 있있을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은은 아무무런 육체적 손상의의 위위험에도 노출되지 않은은 채<br />

대상을을 파괴괴할 수 있있다 . 수천 마일 거리에서 미사일을을 발사한 후 거기에 장장착된 카카메<br />

라가 전송하는 이미지를 보며 조작해 목표물을을 맞히는 군군사적 원원격행위위가 그 대표적<br />

인인 예일 것이다 . 원원격행위위는 “ 현전 - 행위위가능성 - 손상가능성 대 부재 - 수동성 - 손<br />

상불가능성이라는 지금까지 통용되어 온 대립관관계계를 무무력화한다” 37)는 점에서 역사상<br />

획기적이지만 그만큼 위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 이 점에 뉴미디어의의 <strong>새로운</strong>운 가능성인인 원원<br />

격행위위의의 양면성이 있있다는 것이다.<br />

37) Werner Kogge: Lev Manovich - Society of the Screen, in: Alice Lagaay/David Lauer(Hg.):<br />

Medientheorien - eine philosophische Einführung, Frankfurt 2004, S. 306.


2. 뉴미디어와 탈현대주의<br />

<strong>새로운</strong> <strong>매체와</strong> <strong>예술의</strong> <strong>변화</strong> 351<br />

마노비치에 따르면 뉴미디어는 그 자체로 기술의의 층층위위와 문문화의의 층층위위의의 혼합으으로<br />

이루어져 있있을을 뿐 아니라 당대의의 문문화적 흐름과과도 조응응관관계계에 있있다 . 벤야민이 영화를<br />

20세기 초 전위위주의의 <strong>예술의</strong>의 기술적 구현으으로 간주했다면 마노비치는 뉴미디어를 20<br />

세기 말 탈현대주의의 문문화의의 반영인인 동시에 조건으으로 파악한다 . 여기서 마노비치가 뉴<br />

미디어와 상관관관관계계에 있있는 것으으로 간주하는 것은은 제임슨 등 많은은 문문화이론가들이 탈<br />

현대주의의의의 특징으으로 지적하는 혼성모방과과 공공간의의 우위위다. 38)<br />

오늘날 우리의의 삶은은 대부분 기성품의의 목록 , 메뉴 , 카카탈로그로부터의의 선택으으로 이<br />

루어진다는 점에서 무무로부터의의 창조라는 예술관관은은 시대와 동떨어진 것이다 . 이러한<br />

전통적 예술관관을을 최초로 깨뜨린 것이 전위위주의의의의 몽몽타주라면 , 탈현대주의의의의 인인용 , 혼<br />

성모방 , 상호텍스트성에서 20 세기 말의의 문문화논리인인 “ 선택의의 논리 ”( 뉴 , 176) 가 지배적<br />

인인 표현에 도달한다 . 그런데 탈현대주의의의의 이러한 기법들은은 오늘날 컴퓨터 소프트웨웨<br />

어의의 인인터페이스 자체에 약호화되어 있있다 . 포토숍을을 비롯해 대부분의의 컴퓨터 소프트<br />

웨웨어를 가지고 우리가 하는 작업이 바로 주어진 메뉴와 컬렉션에서 선택하고 잘잘라내<br />

고 붙이고 변형하고 필터를 적용하는 일이다 . 선택과과 조합이라는 작업을을 기본으으로 하<br />

는 컴퓨터 소프트웨웨어는 탈현대주의의 문문화논리의의 반영이며 또 “ 이러한 소프트웨웨어가<br />

바로 탈현대주의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 뉴 , 185) 는 것이다 .<br />

뉴미디어 문문화는 순수 창조가 아니라 ‘ 선택의의 논리 ’ 를 따른다는 점에서 전위위주의의<br />

의의 연장장선에 있있지만 “ 연속성의의 미학 ” 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전위위주의의의의 “ 불연속성<br />

의의 미학 ”( 뉴 , 196) 과과 대립관관계계에 있있다 . 뉴미디어에는 “ 강력한 반몽몽타주적 경향 ”( 뉴 ,<br />

198) 이 지배한다 : “ 몽몽타주가 여러 요소 간의의 시각적 , 스타일적 , 의의미론적 , 감정적 불<br />

일치를 창조하는 것을을 목적으으로 한다면 합성 compositing은은<br />

봉합의의 흔적이 없는 전<br />

체 , 하나의의 형태 Gestalt 로 요소들을을 섞는 것을을 목적으으로 한다 .”( 뉴 , 199) 에이젠슈타<br />

인인과과 고다르의의 영화에서 볼 수 있있는 것 같은은 불연속적 몽몽타주가 아니라 , 다양한 출처<br />

에서 고른 이미지들을을 봉합면이 보이지 않도록 결결합하는 디지털 합성이 뉴미디어 문문<br />

38) 제임슨이 탈현대주의의의의 혼성모방을을 진정성의의 상실로 공공간의의 우위위를 역사의의식의의 쇠퇴로 간주한다<br />

,<br />

면 마노비치의의 책에는 그러한 부정적 뉘앙스는 없다. Vgl. Frederic Jameson: Postmoderne - zur<br />

Logik der Kultur im Spätkapitalismus, S. 56ff.


352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화의의 핵심적인인 기법이라는 것이다 . 마노비치에게 몽몽타주가 전위위주의의의의 단절적 역사<br />

관관에 상응응하는 것이라면 디지털 합성은은 또한 “ 연속적 궤궤도로서의의 역사개념 ”( 뉴 , 359)<br />

에 상응응하는 것이기도 하다.<br />

마노비치는 주라기 공공원원 이나 타이타닉 같은은 영화의의 특수효과과에서 연속성 미<br />

학의의 대표적인인 예를 본다 . 하지만 그가 뉴미디어의의 <strong>새로운</strong>운 가능성으으로 간주하는 것은은<br />

엄청난 자본과과 인인력이 투여된 이들 영화가 아니라 리브친친스키 Rybczynski, 제만<br />

Zeman, 토브레루츠 Tobreluts 처럼 일반 대중에게 덜 알려진 예술가들의의 작업이다 . 예<br />

< 도판 3> 리브친스키의 영화 계단 <br />

를 들어 폴란드 태생 작가인인 리브친친<br />

스키는 영화 계계단 에서<br />

에이젠슈타<br />

인인의의 영화 전함 포템킨 의의<br />

유명한<br />

오데사 계계단 장장면에 미국 관관광광객이<br />

와서 구경하는 장장면을을 합성해 넣었<br />

다 . 여기서 에이젠슈타인인 영화의의 흑<br />

백 오리지널 장장면과과 미국 관관광광객을을<br />

찍은은 컬러 비디오 이미지는 서로 구<br />

별되면서도 전위위주의의적인인 몽몽타주와<br />

달리 원원근법적으으로 일관관된 공공간을을 이룬다 . 리브친친스키의의 영화는 디지털 합성이 개발<br />

되기 이전에 제작되어 구식의의 비디오 키 기법을을 사용하였지만 , 마노비치는 영화 사실<br />

주의의의의 시뮬레이션을을 추구하는 헐리우드 특수효과과가 아니라 “ 현대적인인 콜라주와 헐<br />

리우드의의 영화적 사실주의의 사이의의 공공간 ”( 뉴 , 217) 을을 탐색하는 이러한 작가들의의 작업<br />

에서 뉴미디어 <strong>예술의</strong>의 더 많은은 미래를 본다.<br />

마노비치는 그의의 저서에서 때로는 뉴미디어의의 연속성의의 미학을을 전위위주의의 뿐 아니<br />

라 탈현대주의의와 대립시키기도 한다 ( 뉴 , 199, 359). 그것은은 탈현대주의의도 80년대<br />

뮤뮤직<br />

비디오에서 보듯이 몽몽타주 기법을을 사용했다는 이유 때문문이다 . 그러나 탈현대주의의에<br />

는 문문학에서 하이너 뮐뮐러 희곡의의 불연속적인인 몽몽타주와 움움베르토 에코 소설의의 혼성모<br />

방의의 예에서 보듯이 불연속성의의 미학과과 연속성의의 미학이 공공존한다 . 에코의의 소설은은<br />

‘ 전문문가 ’ 가 보기에는 다양한 텍스트의의 결결합으으로 이루어져 있있지만 ‘ 문문외한 ’ 에게는 봉<br />

합면 없는 매끄러운운 대중소설 , 혹은은 역사소설로 보인인다는 점에서 몽몽타주보다 합성에<br />

가깝다고 할 수 있있다 . 마노비치도 책 뒤쪽에서는 뉴미디어가 시간적 몽몽타주보다 공공간


<strong>새로운</strong> <strong>매체와</strong> <strong>예술의</strong> <strong>변화</strong> 353<br />

적 몽몽타주를 선호한다고 함으으로써 뉴미디어 문문화가 몽몽타주 자체와 대립된다는 자신<br />

의의 앞의의 주장장을을 완화시킨다 ( 뉴 214, 401).<br />

소프트웨웨어에 내장장된 카카메라를 조작해 탐색할 수 있있는 3차원원으으로<br />

시각화된 추상<br />

적 데이터 ,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있는 제프리 쇼의의 상호작용적 컴퓨터 설치작<br />

품 읽을을 수 있있는 도시 Legible City ,<br />

그리고 어드벤처 게임 , 일인인칭칭 총격게임 등 대<br />

부분의의 컴퓨터 게임에서 볼 수 있있는 것처럼 뉴미디어 문문화에서는 재현과과 경험이 공공<br />

간화되는 경향이 있있다 . 마노비치는 탈현대주의의가 시간보다 공공간을을 특권권화한다면 뉴<br />

미디어는 “ 이러한 공공간화를 문문자 그대로 성취취했다 ”( 뉴 , 127) 고 본다 . 그는 내비게이<br />

션 공공간을을 데이터베이스와 함께 뉴미디어가 인인간의의 존재와 경험 , 세계계를 재현하는 대<br />

표적인인 “ 문문화형식 ”( 뉴 , 281) 으으로 간주한다 .<br />

마노비치는 공공간 내비게이션의의 역사적 원원천을을 보들레르가 묘묘사한 19세기<br />

파리의의<br />

배회자 flaneur 와 마크 트웨웨인인 등 미국작가의의 소설에 나오는 탐험가에서 찾는다 . 네스<br />

케이프 내비게이터나 인인터넷 익스플로러 같은은 브라우저에서 넷 서퍼는 파리 군군중 속<br />

의의 배회자처럼 익명의의 네티즌 사이를 돌아다니거나 신대륙의의 탐험가처럼 데이터를<br />

찾아 미지의의 영역을을 탐험한다 . 뉴미디어에서 문문자 그대로의의 공공간 내비게이션 , 즉 3차<br />

원원 가상공공간 속에서의의 내비게이션이 중요한 역할을을 하는 가장장 대중적인인 장장르는 컴퓨<br />

터 게임이다 . 어떤 게임에서는 영화에서 로드무무비처럼 공공간 내비게이션 자체가 중요<br />

한 경우도 있있지만 서사가 있있는 게임의의 경우에도 서사는 3차원원<br />

공공간을을 가로지르는 움움<br />

직임 자체와 동일시된다.<br />

마노비치의의 해석에 따르면 컴퓨터 게임의의 캐캐릭터는 보들레르의의 배회자보다 미국<br />

소설의의 탐험가의의 전통에 있있다 . 게임의의 캐캐릭터는 가상공공간을을 가로지르면서 적을을 죽이<br />

고 아이템을을 획득하며 자신을을 형성한다 . 등장장인인물의의 심리적 긴장장 , 심리적 공공간이 중<br />

요한 현대 유럽의의 소설과과 영화에서와 달리 이 과과정에서 캐캐릭터의의 내면은은 전혀 재현<br />

되지 않는다 . 마노비치는 이러한 점에서 컴퓨터 게임을을 “ 고대 그리스의의 원원래적 의의미<br />

의의 서사 ”( 뉴 , 316) 로의의 회귀로 간주하기도 한다 . 그러나 컴퓨터 게임에서와 달리 고대<br />

그리스의의 서사에서는 사회적 규범과과 관관습이 중요한 역할을을 했다 . 일리아스 같은은<br />

고<br />

대 그리스의의 서사시는 현대소설처럼 탈관관습적 postkonventionell 이지는 않지만 주인인공공<br />

의의 육체적 힘과과 능력이 가장장 중요한 역할을을 하는 타잔잔 이나 슈퍼맨 처럼<br />

전관관습적<br />

präkonventionell 이지도 않다 . 39) 이러한 점에서는 액션 중심의의 컴퓨터 게임 서사도 전


354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관관습적 단계계로의의 퇴행으으로 볼 수 있있을을 것이다.<br />

3. 뉴미디어와 탈산업사회<br />

제임슨이 탈현대주의의를 ‘ 후기자본주의의의의 문문화논리 ’ 로 규정한다면 마노비치는 뉴미<br />

디어와 탈현대주의의를 탈산업사회와 연관관시킨다 . 그는 책 서문문에서 1950년대부터<br />

산<br />

업사회의의 경제적 토대가 변하기 시작해 1970 년대에 탈산업사회로 , 그리고 그 후에<br />

네트워워크 사회로 이행했다 ( 뉴 , 45) 고 하지만 본문문에서 탈산업사회와 정보사회의의 개념<br />

을을 엄밀히 구분해서 사용하지는 않는다 . 마노비치에 따르면 뉴미디어와 탈현대주의의<br />

의의 핵심원원리인인 ‘ 선택의의 논리 ’ 는 탈산업사회 자체를 규정하는 원원리이다 . 그럼으으로써<br />

그의의 매체미학에서도 벤야민의의 매체미학에서처럼 기술 - 문문화 - 사회가 조응응관관계계에<br />

놓이게 된다.<br />

산업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대량생산된 표준화된 상품을을 구매하고 같은은 신념을을<br />

공공유한다 . 매체도 여기에 상응응해 헐리우드에서 하나의의 원원본으으로부터 복제된 똑같은은<br />

영화가 전 세계계인인에게 배포된다 . 그에 반해<br />

탈산업사회에서 모든 시민은은 다수의의 선택항에서 자신의의 맞춤 생활방식을을 구축하고 자신의의<br />

이데올로기를 ‘ 선택할 수 있있다 .’ 마케팅은은 동일한 객체 / 정보를 다수의의 대중에게 강요하기보<br />

다 각 개인인을을 목표로 삼으으려 한다 . 뉴미디어 기술의의 논리는 이렇듯 <strong>새로운</strong>운 사회의의 논리를<br />

반영한다 . 모든 웹웹사이트 방문문자들은은 자동적으으로 데이터베이스에서 즉시 만들어진 자신의의<br />

맞춤 사이트를 가지게 된다 . 보이는 텍스트 , 콘텐츠 , 광광고 언어 , 이 모든 것들은은 주문문 제작<br />

될 수 있있다 .( 뉴 , 86)<br />

이러한 점에서 뉴미디어는 대량생산과과 대량소비가 지배적인인 산업사회가 아니라<br />

생산과과 소비의의 유연성 , 즉 다품종 소량생산과과 소비의의 다양성으으로 특징 지워워지는 탈산<br />

업사회에 상응응한다는 것이다 . 뉴미디어와 탈현대주의의 , 탈산업사회를 관관통하는 ‘ 선택<br />

의의 논리 ’ 는 일과과 여가 , 생산자와 소비자 , 저자와 독자의의 관관계계도 <strong>변화</strong>시켰다 . 우리는<br />

39) Vgl. Jürgen Kreft: Moralische und ästhetische Entwicklung, in: Fritz Oser(Hg.): Moralische Zugänge<br />

zum Menschen - Zugänge zum moralischen Menschen: Beiträgen zur Entstehung der moralischen<br />

Identität, München 1986, S. 264.


<strong>새로운</strong> <strong>매체와</strong> <strong>예술의</strong> <strong>변화</strong> 355<br />

직장장이나 가정에서 같은은 컴퓨터 인인터페이스를 사용하고 전문문가용 소프트웨웨어와 아마<br />

추어용 소프트웨웨어의의 기능과과 가격차이도 많이 좁아졌다 . 하이퍼텍스트와 상호작용적<br />

매체예술 , 컴퓨터 게임과과 가상현실은은 더 이상 우리를 수동적인인 관관람자가 아니라 선택<br />

하고 개입하고 상호작용하는 적극적 참여자로 만든 것처럼 보인인다 . 벤야민이 바라던<br />

사회와 문문화가 - 생산관관계계의의 <strong>변화</strong> 없이 - 탈산업사회와 뉴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진 것<br />

일까?<br />

그러나 마노비치가 묘묘사하는 탈산업사회의의 모습은은 산업사회의의 모든 문문제가 해결결<br />

된 “ 다원원주의의적 목가 ” 40)는 아니다 . 영화와 뉴미디어의의 관관계계와 마찬가지로 산업사회<br />

와 탈산업사회의의 관관계계에도 연속성과과 불연속성의의 변증법이 지배하며 여기서 두 사회<br />

의의 연속성은은 그 어두운운 면의의 연속성이기도 하다 . 이 점에서 마노비치는 산업사회와<br />

탈산업사회의의 불연속성만을을 강조하는 대부분의의 정보사회론자들과과 다르다. 41) 마노비<br />

치는 탈산업사회가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공하는 것은은 개인인적 취취향에 소구함으으로써 판<br />

매량을을 올리고 소비자에게 노동을을 전가하기 위위한 전략에 불과과하며 , 따라서 주어진 메<br />

뉴에서 선택함으으로써 자신의의 정체성을을 표현한다는 것은은 주관관적 착각에 불과과하다고<br />

“ 개성의의 이데올로기 ”( 뉴 , 181) 를 비판한다 . 하이퍼텍스트와 뉴미디어 설치작품이 수<br />

용자의의 개성적인인 선택과과 상호작용을을 가능하게 함으으로써 수용자를 “ 공공동작가 ”( 뉴 ,<br />

102) 로 만들고 예술사와 미학에 근본적인인 <strong>변화</strong>를 가져와 “ 독특한 개인인들로 이루어진<br />

이상사회 ”( 뉴 , 87) 를 실현할 것이라는 매체미학자들의의 낙관관적인인 견견해에 대해서도 마<br />

노비치는 회의의적이다 . 그가 뉴미디어의의 언어 에서<br />

상호작용을을 가상현실 , 원원격행위위와<br />

함께 뉴미디어의의 <strong>새로운</strong>운 가능성으으로 거듭 언급하면서도 책 1 장장에서 “ 상호작용성의의<br />

신화 ”( 뉴 , 102) 를 비판적으으로 분석하는 것은은 뉴미디어 기술에 투사된 이러한 과과도한<br />

미학적 기대를 경계계하기 위위해서라고 할 수 있있다.<br />

수용미학에 따르면 현대예술작품의의 특징은은 구조의의 개방성에 있있다 . 현대 예술작품<br />

에는 규정되지 않은은 많은은 빈틈 Leerstelle이<br />

존재하며 이 빈틈을을 메우기 위위해 수용자<br />

40) Peter V. Zima: Moderne/Postmoderne, Tübingen 1997, S. 90.<br />

41) F. 웹웹스터 ( 조동기역 ): 정보사회이론 , 서울울 1997, 24 면 이하 참조 . 그에 반해 현재 사회를 탈산업사<br />

회로 보는 마노비치와 후기자본주의의로 규정하는 제임슨 사이에는 분명히 사회관관의의 차이가 존재<br />

하지만 마노비치가 소외 , 정신의의 규격화 등 탈산업사회의의 부정적인인 면에 주목하고 제임슨이 후기<br />

자본주의의에서 사물화의의 심화에 초점을을 맞추기 때문문에 실제로 그 차이는 크지 않다.


356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는 자신의의 상상력과과 이해력을을 능동적으으로 발휘한다는 것이다. 42) 일부 매체미학자들<br />

은은 , 상호작용적인인 뉴미디어 작품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음 더 나아가 수용자가 단순히<br />

자신의의 방식으으로 작품을을 이해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우스를 클릭하는 등의의 조<br />

작을을 통해 <strong>새로운</strong>운 페이지나 이미지 , 장장면을을 선택함으으로써 자기만의의 작품을을 창조할 수<br />

있있다고 주장장한다 . 그러나 마노비치는 이러한 주장장이 ‘ 정신적 상호작용 ’ 과과 ‘ 육체적 상<br />

호작용 ’ 을을 혼동한 결결과과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 뉴 , 104). 텍스트나 이미지를 이해하는데<br />

필수적인인 빈틈 채워워 넣기와 가설 세우기 같은은 인인지적 과과정은은 조이스틱이나 마우스의의<br />

조작 , 혹은은 몸몸의의 움움직임을을 통해 미리 프로그램된 링크구조를 따라가는 것과과 동일시될<br />

수 없다 . 상호작용적 뉴미디어 작품에서도 탈산업사회의의 소비활동에서처럼 선택의의<br />

자유는 환상일 뿐이다 . 수용자는 마우스 버튼을을 눌러 이미지를 선택함으으로써 자신의의<br />

개인인적인인 연상을을 따라가고 있있다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예술가가 미리 만들<br />

어놓은은 궤궤도 중 일부를 뒤따라가고 있있을을 뿐이기 때문문이다.<br />

심혜련은은 디지털 매체<strong>예술의</strong>의 <strong>새로운</strong>운 패러다임 이라는<br />

글에서 뉴미디어 <strong>예술의</strong>의<br />

상호작용성에 대한 마노비치의의 비판적 견견해를 재비판하고 있있는데 이 재비판은은 필자<br />

가 보기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 먼저 이 글에서 제시 되고 있있는 것과과 달리 마노비치는<br />

결결코 상호매체성을을 상호작용성과과 동일시한 적이 없다 . 그리고 이 글에서는 디지털 매<br />

체에서의의 상호작용은은 “ 구체적인인 행위위를 통해 가능한데 마노비치는 이를 중요하게 취취<br />

급하지 않는다 ” 고 하고 있있지만 마노비치는 바로 육체의의 ‘ 구체적인인 행위위 ’ 를 정신적 상<br />

호작용과과 혼동하는 것이 문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있다 . 또 마노비치가 디지털 아트의의 수용<br />

자는 “ 작가에게 조력할 수 있있는 적극적 수용자이자 그 작품의의 유저라는 사실을을 너무무<br />

간단하게 취취급하고 있있다 ” 고 하고 있있지만 바로 이 ‘ 유저 ’ 의의 몫도 결결국 작가에 의의해 이<br />

미 모두 프로그래밍되어 있있다는 마노비치의의 지적은은 간과과하고 있있다. 43)<br />

42) 퓌른케스는 벤야민의의 미학에서 아우라의의 종말이 현대적인인 수용미학의의 시작을을 의의미한다고 하지만<br />

(Vgl. Fürnkäs: Aura, S. 121) 현대 수용미학에서 중요한 것이 텍스트의의 개방성 , 비규정성이라고<br />

할 때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 왜냐하면 벤야민은은 텍스트의의 의의미를 작가가 명확히 규정해야 한<br />

다고 보기 때문문이다 . 그는 이러한 관관점에서 사진에 “ 설명문문구 Beschriftung” 를 붙임으으로써 수용자<br />

에게 해석의의 “ 지침침 Direktive” 을을 부여하는 것을을 긍정적으으로 평가한다 : “ 이 지침침은은 그 후 영화에서<br />

한층층 더 구체적이고 강압적인인 성격을을 띠게 되었는데 영화에서는 개개 화면의의 의의미가 선행하는 다<br />

른 화면들의의 연속에 의의해 규정된 것으으로 보이기 때문문이다 .”( 선집 2, 60) 영화의의 의의미가 이렇게 빈<br />

틈없이 규정되며 해석의의 ‘ 지침침 ’ 이 수용자에게 ‘ 강압적으으로 ’ 부여된다는 것은은 수용자의의 상상력과과<br />

이해력의의 능동적인인 발휘를 강조하는 현대의의 수용미학과과는 거리가 멀다.


<strong>새로운</strong> <strong>매체와</strong> <strong>예술의</strong> <strong>변화</strong> 357<br />

영화나 패션 같은은 산업사회의의 문문화가 우리를 다른 사람의의 육체적 이미지와 동일시<br />

하게 만들었다면 탈산업사회의의 “ 상호작용적 매체는 다른 사람의의 정신적 구조와 동일<br />

시하게 만든다 ”( 뉴 , 108). 오늘날의의 사회나 문문화에서 “ 표면적인인 자유 아래 더 깊은은 차<br />

원원의의 규격화 ”( 뉴 , 260) 가 지배한다고 보는 점에서 마노비치의의 사회론은은 주류 탈산업<br />

사회론자의의 견견해보다 초기 보드리야르 Baudrillard 의의 소비사회론에 더 가깝다 . 보드리<br />

야르도 소비의의 사회 에서<br />

“ 영웅웅적 생산시대 ” 와 “ 행복한 소비시대 ” 의의 - 부정적 - 연<br />

속성에 주목하고 구매자의의 개인인적인인 필요에 의의한 자유로운운 선택과과 소비를 통한 개성<br />

의의 표현을을 소비사회의의 이데올로기로 폭로한다 : “ 소비자의의 자유와 주권권은은 산업체계계의의<br />

이데올로기이다 . 선택의의 자유는 소비자에게 강요된다 . 개인인의의 자유의의 기하학적 장장소<br />

인인 슈퍼마켓과과 선거투표소는 체제의의 두 개의의 유방이다.” 44) 그에 반해 정작 후기 보드<br />

리야르의의 매체론은은 마노비치의의 매체미학과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 보드리야르는 후<br />

기에 사회와 문문화의의 기호학적 분석을을 포기하고 역설로 가득 찬 자신의의 담론을을 통해<br />

서 “ <strong>매체와</strong> 실재 사이의의 구별과과 차이가 뭉뭉개진 ” 45) 총체적인인 시뮬레이션의의 상황을을 스<br />

스로 연출해 보인인다 . 그에 반해 마노비치의의 미학에서는 아직 <strong>매체와</strong> 실재 , 스크린의의<br />

안과과 밖이 구별가능하고 , 기술과과 문문화 , 사회의의 상호작용을을 비판적으으로 분석할 수도<br />

있있다 . 보드리야르와 달리 그는 우리가 총체적인인 시뮬레이션의의 사회에서 살고 있있는가<br />

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있지만 “ 우리 사회가 스크린의의 사회인인 것은은 의의심의의 여지가 없<br />

다 ”( 뉴 , 145) 고 보기 때문문이다 . 46)<br />

마노비치가 뉴미디어의의 ‘ 선택의의 논리 ’ 를 탈산업사회의의 경제이데올로기와 연관관시킨<br />

43) 심혜련 : 디지털 매체<strong>예술의</strong>의 <strong>새로운</strong>운 패러다임 , 실린 곳곳 : 같은은 이 : 사이버 스페이스 시대의의 미학 , 서<br />

울울 2006, 134-5 면 . 디지털 문문학에서 상호작용성의의 신화의의 몰몰락에 대해서는 유현주 : 디지털 문문학과과<br />

상호작용성 , 독일문문학 101 집 (2007년 3 월월 ), 214 면 이하 참조 .<br />

44) 장장 보드리야르 ( 이상률역 ): 소비의의 사회 , 문문예출판사 1991, 107, 91 면 .<br />

45) 장장 보드리야르 ( 하태환역 ): 시뮬라시옹 , 민음음사 1992, 149 면 .<br />

46) 보드리야르의의 매체이론은은 엄밀히 말해서 뉴미디어의의 이론이 아니다 . 시뮬라시옹 에서<br />

그가 주로<br />

다루는 매체는 컴퓨터가 아니라 텔레비전이다 . 그가 여기서 시뮬레이션이라고 하는 것도 컴퓨터<br />

시뮬레이션에 국한되지 않으으며 “ 원원본없는 이미지 ” 로서의의 시뮬라크르도 컴퓨터가 만든 인인조이미<br />

지 만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스크린의의 안과과 밖 , 이미지공공간과과 실재공공간<br />

을을 구별할 수 있있다고 해도 <strong>매체와</strong> 실재의의 “ 용해 ” 로 이미 실재 자체가 매체의의 압도적인인 영향 하에<br />

있있으으므로 이러한 물리적 구별은은 더 이상 아무무런 의의미가 없다고 할 것이다 . 그에게 문문제되는 것은은<br />

가상현실 같은은 뉴미디어 특유의의 문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매체문문화 일반에 의의한 의의식과과 사회의의 1차<br />

원원화 그리고 그로 인인한 타자 das Andere 의의 종말이기 때문문이다 .( 같은은 책 , 9, 75, 200 면 )


358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다면 컴퓨터 게임 등에서 환영과과 제어의의 연속전환은은 오늘날의의 정치이데올로기와 상<br />

관관관관계계에 있있는 것으으로 파악한다 . 스탈린 , 히틀러 등 20세기<br />

초의의 독재자들은은 자신들<br />

의의 실제 모습과과는 거리가 먼 숭고한 인인간의의 환영을을 통해서 대중을을 지배했다 . 그에 반<br />

해 오늘날의의 정치지도자들의의 경우는 부패 스캔캔들을을 통한 ‘ 탈아우라화 ’ 에도 불구하고<br />

지지도가 떨어지지 않는다 . 마노비치에 따르면 그것은은 “ 자기비평 , 스캔캔들 , 기계계장장치<br />

의의 노출이 현대 이데올로기의의 <strong>새로운</strong>운 구조적 요소가 되었 ”( 뉴 , 274) 기 때문문이다 . 47)<br />

영화에서 관관객의의 몰몰입이 환영의의 지속성에 근거하고 있있는데 반해 환영과과 그 해체가<br />

반복되는 컴퓨터 게임에서 사용자는 환영을을 제어할 수 있있다는 이유 때문문에 환영에<br />

매달린다 . 그것은은 오늘날 대중이 스캔캔들에 의의한 환영의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선거를 통<br />

해서 ‘ 제어 ’ 할 수 있있다는 이유로 정치지도자를 계계속 지지하는 것과과 마찬가지다 . 영화<br />

의의 ‘ 고전적 사실주의의 ’ 가 파시즘과과 스탈린주의의라는 ‘ 고전적 이데올로기 ’ 에 상응응한다면<br />

게임의의 ‘ 메타사실주의의 ’ 는 오늘날의의 정치이데올로기와 상관관관관계계에 있있다 . ‘ 선택의의 논리 ’<br />

와 마찬가지로 ‘ 메타사실주의의 ’ 도 단순한 “ 컴퓨터 기술의의 발전단계계의의 산물이 아니라<br />

현대사회의의 구조적 특징 ”( 뉴 , 275) 이라는 것이다 .<br />

IV.<br />

결론<br />

벤야민은은 자신의의 영화론을을 사회주의의적 산업사회로의의 이행기의의 미학으으로 이해했다.<br />

그가 기술복제시대의의 예술작품 의의<br />

서두에서 “ 상부구조의의 변혁이 하부구조의의 변혁보<br />

다 훨씬 느리게 진행된다 ”( 선집 2, 42) 고 할 때 그것은은 동시에 , 기술적 경제적 하부구<br />

조는 이미 오래전에 산업사회로 접어들었는데 문문화적 상부구조에는 여전히 전산업사<br />

회에 속하는 아우라적 예술과과 자율율성 미학의의 잔잔재가 남아 있있다는 것을을 가리킨다 . 전<br />

위위주의의는 상부구조에서 전산업사회적 미학에 속하는 “ 창조성과과 천재성 , 영원원한 가치<br />

와 비밀 같은은 일련의의 전승된 개념들 ”( 선집 2, 42) 을을 파괴괴하고 과과거와 급진적으으로 단절<br />

하려 했지만 단지 선구적 시도에 그쳤을을 뿐이다 . 벤야민은은 대중매체로서의의 영화가 비<br />

47) 마노비치가 여기서 현대 이데올로기 라고 하는 것은은 계계몽몽된 허위위의의식 으으로서의의 냉소주의의와 구<br />

‘ ’ “ ”<br />

조가 같다(Peter Sloterdijk: Kritik der zynischen Vernunft, Frankfurt a. M. 1983. S. 37).


<strong>새로운</strong> <strong>매체와</strong> <strong>예술의</strong> <strong>변화</strong> 359<br />

로소 낡은은 미학을을 청산하고 낡은은 예술을을 <strong>새로운</strong>운 예술로 대체할 뿐 아니라 “ <strong>예술의</strong>의<br />

정치화 ”( 선집 2, 96) 라는 기능전환을을 통해 사회주의의적 산업사회로의의 이행을을 촉진시킬<br />

것으으로 기대했다 . 영화를 통한 ‘ <strong>예술의</strong>의 정치화 ’ 는 스타숭배 그리고 무무엇보다 파시즘<br />

에 의의한 “ 정치의의 심미화 ”( 선집 2, 96) 에서 볼 수 있있는 것 같은은 자본주의의적 산업사회에<br />

서의의 아우라의의 퇴행적 부활에 직면해서도 그에게 유일한 대안으으로 보였다.<br />

마노비치도 뉴미디어의의 언어 의의<br />

한국어판 서문문에서 기술의의 발전에 비할 때 “ 문문화<br />

적 상부구조 ”( 뉴 , 9) 의의 느린 <strong>변화</strong> 속도에 대해서 말한다 . 그도 벤야민과과 마찬가지로<br />

현재의의 시점을을 역사적 이행기로 간주하고 자신의의 매체론을을 “ 현재의의 이론 ”( 뉴 , 45) 으으<br />

로 이해한다 . 그러나 그의의 매체미학은은 영화가 아니라 뉴미디어의의 <strong>새로운</strong>운 미학적 가능<br />

성을을 탐구한다는 점에서만 벤야민의의 매체미학과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 기술복제시<br />

대의의 예술작품 을을<br />

쓸 무무렵 벤야민이 <strong>새로운</strong>운 사회주의의적 <strong>예술의</strong>의 전망으으로서 염두에<br />

둔 모델은은 무무엇보다 러시아의의 생산주의의였다 . 러시아 생산주의의자들은은 자율율성 미학을을<br />

청산한 <strong>예술의</strong>의 궁궁극적인인 과과제가 <strong>예술의</strong>의 경계계를 넘어 세계계 자체를 재구축하는데 있있다<br />

고 보았다 . 그들은은 물건을을 직접 디자인인함으으로써 생산을을 조직할 뿐 아니라 선전을을 통<br />

해서 대중의의 정신과과 의의식도 조직하려 했다 . 그들의의 미학은은 결결국 극단적인인 기능주의의와<br />

사회공공학을을 통한 “ <strong>예술의</strong>의 총체적인인 공공리화 ” 48)로 귀착된다 . 그들은은 세계계의의 재구축이<br />

라는 총체적인인 프로젝트의의 실현을을 위위한 배타적인인 권권리를 요구했으으므로 당시 러시아<br />

의의 정치권권력과과 충돌해 결결국 좌절했지만 , 그들의의 프로젝트 자체는 스탈린에 의의해 사회<br />

주의의 사회라는 ‘ 총체예술작품 ’ 의의 건설이라는 이름으으로 계계승되었다 . 보리스 그로이스<br />

Boris Groys가<br />

지적하는 것처럼 러시아 전위위주의의자들 자신에게 중요한 것도 결결국<br />

“ 정치적 심미적 프로젝트의의 통일성였지 그것이 <strong>예술의</strong>의 정치화로 귀착되는가 정치의의<br />

심미화로 귀착되는가가 아니었다.” 49)<br />

마노비치가 뉴미디어의의 언어 에서<br />

“ 산업적 현대주의의의의 문문화와 이데올로기는 과과<br />

거와 극단적으으로 거리를 두고 일종의의 백지상태 Tabula rasa 에서 출발하려 했다 ”( 뉴 ,<br />

48) 보리스 그로이스 ( 최문문규역 ): 아방가르드와 현대성 - 러시아의의 분열된 문문화 , 서울울 1994, 74 면 .<br />

49) 같은은 책 , 67 면 . 미국의의 미술비평가인인 벤자민 부흘로는 벤야민도 “ 매체낙관관주의의 때문문에 산업사회<br />

의의 <strong>새로운</strong>운 관관람층층을을 위위한 동시적 , 집단적 수용의의 조건을을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소련의의 전체주의의적<br />

스탈린주의의적 선전의의 무무기고를 준비하는 것이 되었다는 점을을 깨닫지 못못했다 ” 고 지적한다 ( 벤자민<br />

부흘로 : 러시아 구성주의의와 정치 : 팍투라에서 팍토그람으으로 , 실린 곳곳 : 이영철 : 현대미술과과 모더니<br />

즘론 , 1995, 26 면 ).


360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359) 고 전위위주의의와 공공산주의의에 의의해 수행된 과과거와의의 심미적 , 정치적 단절에 대해서<br />

불신을을 표시하는 것은은 탈현대주의의의의 영향으으로 볼 수도 있있지만 그가 러시아 출신의의<br />

미학자로서 현실사회주의의의의 폐해를 직접 경험한 것과과도 무무관관치 않다. 50) 마노비치는<br />

벤야민과과 달리 자신의의 매체론을을 사회주의의 사회가 아니라 정보사회의의 문문화로의의 이행<br />

기의의 미학으으로 이해한다 . 그리고 이행기의의 예술적 <strong>변화</strong>를 <strong>새로운</strong>운 매체에 의의한 <strong>예술의</strong>의<br />

전면적인인 패러다임 교교체가 아니라 기존의의 문문화전통과과 <strong>새로운</strong>운 매체기술의의 혼합으으로<br />

표상한다 . 산업사회를 대표하는 대중예술인인 영화에서 벤야민이 기대했던 <strong>예술의</strong>의 기<br />

능전환은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환영주의의의의 전통은은 - 체제와 무무관관하게 - 영화를 통해<br />

끊어지기는커녕 오히려 확산되었고 관관조적 수용방식이 정신분산적 수용방식으으로 대<br />

체되지도 않았다. 51) 뉴미디어 문문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매체낙관관주의의의의 전도사들이 예<br />

언한 신세계계는 도래하지 않았으으며 환영주의의의의 전통에 있있는 헐리우드 영화의의 ‘ 인인조사<br />

실주의의 ’, 컴퓨터 게임과과 상호작용적 설치예술에서 전통적 환영과과 <strong>새로운</strong>운 제어의의 혼<br />

합 , 그리고 원원격행위위처럼 혁신적인인 가능성들이 병존한다 . <strong>새로운</strong>운 디지털 기술을을 통해<br />

예술생산자와 수용자의의 접근 , 예술작품의의 촉각적 , 정신분산적 수용 등 벤야민이 영화<br />

에 기대했던 효과과 중 일부가 가능해지지만 그것이 미학의의 전면적인인 패러다임 교교체로<br />

이어지지는 않는다 . 연속성과과 불연속성의의 변증법은은 하부구조에서도 나타난다 . 마노비<br />

치에 따르면 정보사회에서 인인간의의 규격화 , 소외 같은은 산업사회의의 문문제들은은 변형될 뿐<br />

결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 이 점에서 그는 컴퓨터 기술과과 정보산업이 산업사회의의<br />

모든 핵심 문문제를 해결결해줄 것으으로 기대하는 기술낙관관주의의적인인 정보사회론자들과과 구<br />

별된다.<br />

벤야민과과 마노비치의의 매체미학은은 동시에 매체사회학적 성격도 가지고 있있다 . 벤야<br />

민이 영화 - 전위위주의의 - 산업사회를 지각구조의의 <strong>변화</strong>를 중심으으로 매개한다면 마노비<br />

치는 뉴미디어 - 탈현대주의의 - 탈산업사회를 ‘ 선택의의 논리 ’ 라는 범주를 중심으으로 연<br />

50) 러시아 출신의의 철학자인인 리클린도 굴굴락에서의의 대량학살 등 러시아인인이 “ 인인류사의의 아방가르드 ” 로<br />

서 치르었던 “ 지나친친 대가 ” 때문문에 “ 새로움움 ” 에 대해서 가지고 있있는 불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 미<br />

하일 리클린 ( 최진석역 ): 해체와 파괴괴 , 서울울 2009, 311 면 )<br />

51) 탈아우라적 예술로서의의 영화는 벤야민이 기대한 것과과 달리 대중영화가 아니라 고다르 등의의 일부<br />

작가주의의 영화에서 부분적으으로 구현되었을을 뿐이다 . 뷔르거는 매체의의 <strong>변화</strong>가 예술제도의의 <strong>변화</strong>로<br />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인인식에서 벤야민이 영화에 투사한 자율율성 미학의의 해체 시도를 ‘ 전위위주의의의의<br />

이론 ’ 으으로 되돌려 해석한다 .(Vgl. Peter Bürger: Theorie der Avantgarde, S. 30ff)


<strong>새로운</strong> <strong>매체와</strong> <strong>예술의</strong> <strong>변화</strong> 361<br />

관관시킨다 . 많은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벤야민은은 <strong>매체와</strong> 문문화 , 사회를 매개하는데 있있<br />

어 주로 유추 Analogie에<br />

의의존하는데 52) 이 점에서는 마노비치도 방법론적으으로 크게<br />

다르지 않다 . 벤야민이 영화의의 충격적 , 정신분산적 수용방식을을 산업사회의의 지각방식<br />

을을 촉진하는 동시에 반영하는 것으으로 보았다면 , 마노비치가 ‘ 선택의의 논리 ’ 라는 개념<br />

을을 중심으으로 뉴미디어와 탈산업사회를 연관관시키는 방식도 비슷하다 . 유추는 지금까<br />

지 문문학사회학 등에서 일종의의 발견견술 Heuristik로서<br />

흔히 사용되어왔지만 실증적 연<br />

구보다는 즉흥적인인 연상에 토대를 두기 때문문에 순환논리에 빠질 수 있있다는 문문제점이<br />

있있다. 53) 벤야민의의 유추적 가설이 오늘날 현실과과 거리가 있있는 것으으로 드러났다면 마<br />

노비치의의 것이 역사의의 시험을을 통과과할 수 있있을을 지는 아직 두고 봐야 할 것이다.<br />

마노비치는 급진적 단절적 <strong>변화</strong>가 아니라 점진적 연속적 <strong>변화</strong>를 옹호할 뿐 전통의의<br />

지속성을을 맹목적으으로 옹호하지는 않는다 . 그는 언젠가는 “ 문문화의의 컴퓨터화 ” 가 완수<br />

되어 “ 산업적 현대주의의와는 다른 정보사회의의 <strong>새로운</strong>운 미학인인 정보미학 ”( 뉴 , 9) 이 관관철<br />

될 것으으로 본다 . 여기서 분명하지 않은은 것은은 <strong>새로운</strong>운 정보미학도 여전히 혼성적인인 성<br />

격을을 가질 것인인가 하는 것이다 . 뉴미디어의의 언어 에서<br />

‘ 혼성성의의 미학 ’ 이 뉴미디어<br />

문문화의의 본질인인지 아니면 ‘ 문문화의의 컴퓨터화 ’ 과과정에서 과과도기적 성격만을을 가진 것인인지<br />

는 분명치 않다 . “ 매체의의 특수성 (‘ 모든 매체는 그만의의 독특한 언어를 발전시켜야 한<br />

다 ’) 이라는 현대주의의자의의 개념이 한물갔다 ” 고 하면서도 “ 뉴미디어만의의 고유한 서사 ”<br />

( 뉴 , 305) 를 요구하는 데서도 알 수 있있듯이 마노비치도 “ 매체특정적인인 현대주의의의의 모<br />

델” 54)을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못한다 . 탈현대주의의가 현대를 극복하려는 시도 자체를<br />

통해서 다시 <strong>새로운</strong>운 것의의 추구라는 ‘ 현대의의 고질병 ’ 에 발목 잡히곤곤 하듯이 뉴미디어<br />

의의 미학에서도 현대는 어쩌면 우리가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운운명인인지도 모른다.<br />

52) Vgl. Richard Shiff: Digitized Analogies, in: Hans Ulrich Gumbrecht/Michael Marrinan: Mapping<br />

Benjamin, S. 68; Hans Ulrich Gumbrecht/Michael Marrinan: History, in: dies.: 240f.<br />

53) 레이몬드 윌윌리엄스 ( 이일환역 ): 이념과과 문문학 , 서울울 1982, 129 면 ; 피에르 지마 ( 정수철역 ): 문문학의의 사<br />

회비평론 , 서울울 1996, 82 면 참조 .<br />

54) 할 포스터외 : 1900 년 이후의의 미술사 : 모더니즘 , 반모더니즘 , 포스트모더니즘 , 678 면 .


362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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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br />

Neue Medien und Wandel der Kunst<br />

-Mediensthetik von Walter Benjamin und Lev Manovich<br />

Chung, Yongwhan (Sangmyung Uni)<br />

Die Computertechnologie und die Informationsindustrie, die sich seit der zweiten<br />

Hälfte des 20. Jahrhunderts rasant entwickeln, haben zu großen Änderungen in allen<br />

Lebensbereichen geführt. Von dieser Entwicklung ist nun auch die Kunst erfaßt. In der<br />

medienästhetischen Szene ist sogar von einem Paradigmenwechel der Kunst die Rede,<br />

der durch die digitale Technologie verursacht würde, wobei man häufig als historisches<br />

Modell auf die medienästhetischen Überlegungen Walter Benjamins um den Essay Das<br />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zurückgreift.<br />

Für Benjamin war der Film, damal die neueste Medien, zugleich das Paradigma der<br />

neuen Kunst, das den “den Gesamtcharakter der Kunst” verändert habe. Im Film sieht<br />

er die Aura, das Kern der traditionellen Kunst, endgültig zerstört, was die Dadaisten


<strong>새로운</strong> <strong>매체와</strong> <strong>예술의</strong> <strong>변화</strong> 365<br />

mit ihrer Provokation vergeblich versucht hat. Dieses destruktive Potential steckt -<br />

nach Benjamin - in der filmischen Technik selbst: Die Vermittlung des<br />

Filmschauspielers durch die Kamera führe zu dessen Vergegenständlichung und damt<br />

zum Verlust seiner Aura; die Montage als technisches Verfahren des Films zerstöre<br />

den schönen Schein der alten Kunst; die rasche Abfolge der Film-Bilder<br />

verunmögliche mit ihren Schockwirkungen dem Zuschauer die kontemplatvie<br />

Versenkung. Der Film als neue Medien bewirkt nicht nur die Verabschiedung der<br />

traditionellen Ästhetik sondern auch einen grundsätzlichen Funktionswandel der Kunst,<br />

durch den die Masse, die bis dahin von der Kunst weitgehend ausgeschlossen waren,<br />

nun sowohl an der Rezeption als auch an der Produktion der Kunst aktiv teilnehmen<br />

könnten. Angesichts der drohenden Machtexpansion der Faschisten sah Benjamin in<br />

dem Film als politischer Massenkunst auch die einzige Alternative zu deren<br />

“Ästhetisierung der Politik”.<br />

Mit The Language of New Media(2001) von Lev Manovich liegt nun nicht nur eine<br />

erste umfassende und systematische Ästhetik der Neuen Medien vor, sondern auch ein<br />

anderes Konzept als das Benjaminsche, über den Wandel der Medien und Kunst zu<br />

denken. Inzwischen haben sich nicht nur Benjamins Ansichten über den Film, z. B.<br />

seine Beschreibung des Kinopublikums als “eines zerstreuten Examinators” als<br />

realtätsfern erwiesen: Die sozialistische ‘große Erzählung’, die für Benjamin die<br />

Alternative zum Faschismus darstellte, ist selbst so tief in Mißkredit geraten, dass wir<br />

nicht mehr ohne weiteres sein Vertrauen an Geschichte und Kollektiv teilen können.<br />

Im Buch von Manovich werden nicht nur die ganze Bereiche der Neuen Medien wie<br />

Websites, Digitalfilme, Virtuelle Welten, interaktive Installationen detailiert analysiert,<br />

sondern auch dieser Zeitwandel mitreflektiert: In Erinnerung an den Preis der<br />

Zerstörung der Vergangenheit durch die Avantgarde und den Sozilalismus wird der<br />

ästhetische Wandel nicht mehr als einen gewaltsamen Traditionsbruch gedacht, sondern<br />

als einen kontinuierlichen, wechelseitigen Prozeß, in dem die neue mediale Technik<br />

und die alte visuelle Kultur zu einer Hybridisierung kommen.<br />

Wenn Benjamins Filmtheorie mit ihrem Antitraditionalismus, Geschichtsoptimismus


366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und Technikkult zur Moderne gehört, könnte Manovichs Ästhetik der Neuen Medien<br />

als postmodern bezeichnet werden. Manovich versucht auch, die Parallelitäten zwischen<br />

den Neuen Medien, der postmodernen Kultur und der postindustrieller Gesellschaft<br />

aufzuspüren, wie bei Benjamin die filmische Wahrnehmung zur avantgardistischen<br />

Kunst und modernen Industriegesellschaft in Anlogie gesetzt wird. In der vorliegenden<br />

Arbeit handelt es sich um eine vergleichende Studie über die Medienästhetik von<br />

Benjamin und Manovich. Dabei werden nicht nur Gemeinsamkeiten untersucht: Der<br />

Hauptaugenmerk gilt deren historischen und konzeptuellen Unterschiede.<br />

Keyword<br />

( 한글 / 독일어 )<br />

벤야민<br />

Benjamin<br />

필자<br />

E-Mail: yhchung@smu.ac.kr ( 정용환 )<br />

마노비치<br />

Manovich<br />

매체미학<br />

Medienästhetik<br />

투고일<br />

: 2009년 12월 30 일 / 심사일 : 2010년 1월 15 일 / 심사완료일 : 2010년 1월 31일<br />

뉴미디어<br />

Neue Med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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