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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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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레니의 연구<br />

-바이마르 시대 영화 문화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br />

<strong>남완석</strong>(우석대)<br />

0. 들어가며<br />

1919년부터 1933년까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독일영화는 ‘독일 영화의 1차 전<br />

성기’로 간주될 만큼 세계영화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그 시대에<br />

제작되었던 이른바 ‘표현주의 영화’는 영화의 본질에 대한 생각과 표현양식에 있어서<br />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일례로 대표적인 표현주의 영화로 일<br />

컬어지고 있는 (Robert Wiene,<br />

1920)은 현재까지도 독일 영화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이야기되고 있<br />

고, 이 작품이 세계 영화사에 끼친 지대한 영향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br />

그런데 이 시대 영화에 대한 관심은 유독 표현주의 영화와 프리츠 랑 Fritz Lang,<br />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 F. W. Murnau, 에른스트 루비치 Ernst Lubitsch 등 이른<br />

바 ‘거장 감독’들의 작품에 집중되어 왔다. 최근 당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장르<br />

영화에 대한 사회문화사적 관심이 증대하면서 과거의 다소 편향적이었던, 특히 표현<br />

주의 영화를 중심으로 한 연구 경향이 수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표<br />

현주의 영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는 달리 정작 표현주의 영화에 속하는 개별 작<br />

품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심도 깊은 연구는 소수 영화에 집중되어 있을 뿐, 의외로 많<br />

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1924년 발표된 파울 레니 Paul Leni의 1) 역시 대표적인 표현주의 영화로 손꼽히고 있지<br />

1) 영화의 제목을 올바르게 번역을 하자면 ‘밀랍인형 전시실’ 혹은 ‘전시관’ 등으로 하거나, 아니면 영<br />

어 제목인 “Waxworks”를 번역해서 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 영화의 제목과 내용이 갖<br />

고 있는 (여기에서도 사실 맥락상 전시실이나 전시관이 올바른 번역이었<br />

다)과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해서 그냥 ‘밀실’로 변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여 제목을 이렇


298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만, 이에 대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분석과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국내의<br />

경우도 이나 와 같이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있<br />

는 소수의 작품들로 연구가 집중되어 있고 처럼 잘 알려져 있지<br />

않은 작품들에 대한 연구는 매우 드물다.<br />

본 논문의 목적은 을 당시 독일의 영화 문화적 상황에 대한 알<br />

레고리로 읽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혼란과 위기의 시대이자 동시에 다양성의 시대였<br />

던 바이마르 공화국시대에 독일의 영화계도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들을 보였고, 영화<br />

는 당시 독일 문화계에서 벌어졌던 ‘영화논쟁 Kinodebatte’과 그 논리적 귀결로서 영<br />

화의 본질에 대한 논란 속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과도기적 영화 Übergangsfilm” 2)<br />

로 평가되기도 했던 이 보여주고 있는 여러 가지 특징들은 당시<br />

독일의 영화 문화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을 제공한다.<br />

1.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영화문화<br />

19세기말에 있었던 영화의 발명으로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유럽 영<br />

화계에서 독일은 그 존재가 미미한 후진국에 불과했다. 기술적 수준과 산업화 단계에<br />

서 주변국에 비해 독일 영화산업은 많이 뒤쳐져 있었다. 그래서 초창기 독일 영화계<br />

는 미국, 프랑스,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 외국 영화들의 지배아래 있었다. 하<br />

지만 1914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상황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br />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영화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적성국’ 영화들의 수입이 금지되<br />

었고 이로 인해 생겨난 시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무수한 영화사들이 등장하여<br />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또한 당시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위정자들은 영화의 대중적<br />

파급력에 주목해서 이를 국가적 통제아래 놓고자 했다. 이러한 목적에서 당시 군소<br />

업체들로 난립하고 있던 영화계를 점진적으로 통합하게 된다. 그 결과 1917년 설립<br />

된 것이 바로 UFA Universum Film Aktiengesellschaft였다. 독일은 일거에 유럽 최대<br />

게 번역하였다.<br />

2) Herbert Jhering in: Berliner Börsen-Courier v. 14.11. 1924.


파울 레니의 연구 299<br />

의 영화 제작사를 소유한 나라로 부상하면서 당시 세계 영화계에서 점차 주도적인<br />

역할을 수행하게 된 미국의 영화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br />

패전과 더불어서 1919년 등장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는 정치, 경제적 혼란과 위<br />

기의 시대였지만, 독일 영화계는 오히려 산업적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경제적인<br />

불안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독일 영화 제작의 국제 경쟁력을 높였기 때문이다. 산업<br />

적 측면에서 독일 영화산업은 당시 독일에서 세 번째로 거대한 산업분야가 되었고,<br />

전 세계에서도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규모를 갖게 되었다.<br />

영화는 당시 이미 보통사람들의 도시적 삶의 정서에 상응하는 오락거리로서 자리<br />

를 공고히 했다. 영화관람 형태는 다양한 여흥거리들과 결합된 기존의 바이에테 방식<br />

이나 관객을 찾아서 장터를 떠돌던 이동극장의 형태에서 탈피하여 대도시에 상설극<br />

장을 설립하여 종일 상영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3) 극장들은 노동자 계층을 위한 축<br />

구나 술집 또는 중산층을 위한 연극, 라디오 등과 같은 기존의 다른 대중 오락거리와<br />

대등한 경쟁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br />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설립부터 시작해서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때까<br />

지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독일 영화는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된다. 4) 그 첫 번째 단<br />

계는 1919에서 1924년까지로, 전후의 정치적 불안정과 살인적 인플레이션이 지배하<br />

던 기간이었다. 이 기간 중 독일영화는 역설적이게도 다른 나라의 영화보다 상대적으<br />

로 유리한 여건에 놓이게 된다. 즉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독일의 화폐가치가 하락<br />

하게 되자, 영화 제작의 국제 경쟁력이 높아지게 되어 수출을 통해서 큰 이익을 남길<br />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힘입어 1920년에는 한 해 동안 무려 500편의 영화<br />

가 제작되기도 했다. 제작비의 하락은 동시에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벗어나서 보다 자<br />

유로운 실험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기존의 영화형식을 벗어난<br />

3) 당시의 통계에 의하면 1900년에는 독일 전역에 상설영화관이 두 군데에 불과했으나 1910년에는<br />

29개 도시에 456개 그리고 1913년에는 2,371개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종전이 되던 해인 1919년<br />

에 독일에는 약 200개의 영화 제작사가 등록되어 있었고, 한 해 동안 약 500편의 영화가 제작되었<br />

으며 전국에는 3,000여 개의 극장이 있었다고 한다. 일일 평균 관객 수는 약 100만 명에 달했다.<br />

1922년에는 일일 평균 관객 수가 약 200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Vgl. Heinz-B. Heller, Literarische<br />

Intelligenz und Film: zu Veränderungen der ästhetischen Theorie und Praxis unter dem Eindruck des<br />

Films 1910-1930 in Deutschland. Tübingen 1985, S.19.<br />

4) Vgl. Sabine Hake, German National Cinema. New York 2002, p.26f.


300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표현주의 영화’가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br />

두 번째 단계는 1924년에서 1929년까지로, 이 기간은 미국의 경제원조와 새로운<br />

화폐인 렌텐마르크의 도입을 통해 인플레이션이 진정되고 일시적으로나마 경제가 안<br />

정되었던 시기이다. 경제적 안정으로 제작비에서의 상대적 우위가 사라지자 영화계<br />

는 할리우드와의 직접적인 경쟁을 목적으로 (Fritz Lang,<br />

1924), (Fritz Lang, 1926)와 같은 초대작 영화들을 제작하<br />

여 수출에 주력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제작했던 UFA는 기대 밖의 흥행실패로 파산<br />

지경에 이르게 되어 우익 성향의 후겐베륵 Hugenberg 미디어회사에 의해 경영권이<br />

인수된다. 새로 UFA를 이끌게 된 후겐베륵은 보다 대중지향적인 노선을 선택하여<br />

다양한 장르영화를 제작했으며, 할리우드와의 물적, 인적 교류도 활발히 하였다. 한<br />

편 경제 원조를 통해 독일 내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얻은 미국과 미국 영화들은 최<br />

첨단 현대 문화의 상징으로 환영과 동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영화계 역시 미국 영화<br />

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통계를 보면 1923년에는 102편의 미국영화와 253편의 독일<br />

영화가 독일극장에서 상영된 것에 반해, 1926년에는 216편의 미국 영화와 185편의<br />

독일영화가 상영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물론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미국 영화로 인한<br />

새로운 세계군국주의의 등장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5) 결국 독일 영화계는 이<br />

에 대응하기 위해서 국내 영화 제작 실적이 있어야만 외국영화 수입을 허용하는 쿼<br />

터제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위적 조치는 독일영화의 제작을 북돋아서 경쟁<br />

력을 강화한다는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단지 쿼터를 채우기 위한 졸속 제작이라는<br />

부작용만 낳기도 했다.<br />

마지막 단계는 1929년부터 1933년 나치가 집권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일시적<br />

안정을 구가하던 독일 경제는 전 세계를 덮친 경제공황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다시<br />

위기에 봉착한다. 국내 사정이 어려워지자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뿐 아니라 독일 영화<br />

계도 급격한 보수화와 국수주의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 문화에 대한 동<br />

5) Vgl. Herbert Jhering, UFA und Buster Keaton 1926, in: ders., Von Reinhardt bis Brecht. 2.Band.<br />

(O-)Berlin 1961.: “Die Zahl der Menschen, die Filme sieht und keine Bücher liest, geht in die<br />

Millionen. Sie alle werden dem amerikanischen Geschmack unterworfen, werden gleichgemacht,<br />

uniformiert. ... Der amerikanische Film ist der neue Weltmilitarismus. Er rückt an. Er ist gefährlicher<br />

als der preußische. Er verschlingt nicht Einzelindividuen. Er verschlingt Völkerindividuen.


파울 레니의 연구 301<br />

경은 비독일적인 이물질이란 비판으로 바뀌었고, 나치의 집권을 목전에 둔 32년에<br />

개정된 영화 쿼터법은 독일인만이 영화제작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으며, 독일<br />

내에서의 외국인과 유태인의 영화제작을 금지했다. 한편 이 기간 중에는 당시 “무기<br />

로서의 예술”을 내세운 예술 전반의 정치화 성향의 영향을 받아 현실 사회 문제에<br />

개입하려는 영화들이 다수 등장하였다. 그러나 영화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커다란<br />

사건은 바로 유성영화의 등장이었다. 1929년 독일에 처음으로 등장한 유성영화는 영<br />

화제작비의 상승과 영화제작의 기술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수많은 영화인들로부터<br />

‘재앙’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에 힘입어 유성영화는 빠르게<br />

영화의 표준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6)<br />

2. 영화논쟁 Kinodebatte<br />

영화가 대표적인 대중오락으로서 자리를 잡으며 다양한 장르로 발전함과 동시에<br />

영화예술의 가능성도 제시했던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와 중첩이 되는 매우 독일적인<br />

문화현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문화계 인사들이 영화에 대해서 격렬하게 논쟁을 벌<br />

인 이른바 “영화논쟁”이다. 이 영화논쟁은 당대 독일영화의 특징과 발전양상에 지대<br />

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br />

안톤 케스 Anton Kaes는 이 영화논쟁을 세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7) 그 첫 단계는<br />

영화가 탄생한 1895년부터 1909년까지로, 이 시기에 영화는 단지 ‘신기한 기술적 볼<br />

거리 technisches Kuriosum’에 불과했다. 영화를 발명했던 뤼미에르 형제나 에디슨조<br />

차도 영화는 곧 지나갈 유행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br />

논의가 이루어지는 대신, 신기한 경험에 대한 감상이나 체험을 이야기하는 수준에 머<br />

물고 있었다. 두 번째 단계는 1909년부터 1920년까지로, 이 시기에 영화는 대도시에<br />

6) 참고로 통계를 보면 1929년에는 아직도 무성 영화(175편)가 유성 영화(8편)에 비해 압도적이었으<br />

나 이듬해인 1930년부터는 상황이 역전되어 무성 영화(45편)가 유성 영화(101편)의 절반에도 미치<br />

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해인 1931년에는 전체 영화 중 무성 영화는 단 2편이 제작되었고<br />

1932년부터는 무성 영화가 전혀 제작되지 않게 되었다.<br />

7) Vgl. Anton Kaes, Kino-Debatte. Texte zum Verhältnis von Literatur und Film 1909-1929. Tübingen<br />

1978.


302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상설극장으로 정착하기 시작하고 촬영 기술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게 되면서 대중문<br />

화의 선봉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따라서 이시기에 영화논쟁은 가장 격렬한 양상을<br />

보이게 된다. 세 번째 단계는 1920년부터 1929년까지로 이 기간에 영화는 독자적인<br />

예술매체로서 인정을 받게 되고, 문학 역시 영화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은 것을 인<br />

정하게 된다.<br />

초기의 비관적인 전망과는 달리 영화는 대중의 열렬한 환호와 지지를 받으며 전<br />

세계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단시간 동안에 커다란 기술적 발전<br />

을 이루면서 대중매체로서의 잠재력과 파급력을 키웠다. 급속한 산업화의 여파로 달<br />

라진 문화적 상황과 그 선봉에 선 영화의 빠른 확산은 서서히 기존 문화계의 주목을<br />

받기 시작했고, 심지어 일부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기존 문화예술계를 위협하는 것으<br />

로 간주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게 된다. 특히 다<br />

른 분야에 비해서 더 큰 위기감을 느꼈던 문학계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이 시작되었<br />

다.<br />

이러한 배경에서 촉발된 본격적인 ‘영화논쟁’을 케스는 문학의 독점적 위치가 위<br />

협을 받는 데에서 기인한 일종의 “강제된 논의”라 규정하고 있다. 즉 지배적인 위치<br />

에 있던 문학이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낌으로 해서 촉발된 논의라는 것이다. 따라서<br />

이 논의에 임하는 문학계는 미묘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한편으론 지금까지 자신들의<br />

주된 수용자였던 고전적 자유주의적 시민계층의 몰락으로 자신들의 사회적 위상과<br />

역할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학계는 새로 대두되기 시작<br />

하는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엄청난 반응에 대해 비판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새<br />

로운 활동 영역에 대한 기대를 갖기도 했다.<br />

영화를 통해서 위기감을 느낀 많은 문학인들은 한편으로는 영화의 저속함과 통속<br />

성을 근거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의 직접적인 현실 재현을 근거로 영화의<br />

예술적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래서 “영화에 의한 영혼의 중독<br />

die seelische Vergiftung durch die Filmdramatik” 8) 이 주는 사회적 폐해는 알코올중독<br />

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주장하거나 영화의 새로운 매체로서의 가능성을 간파하고<br />

열광했던 토마스 만 Thomas Mann도 영화의 예술로서의 가능성에는 다음과 같이 부<br />

8) Julius Bab, Die Kinematographenfrage. Zit. nach Heinz Heller, a.a.O., S.48.


파울 레니의 연구 303<br />

정적인 입장을 취했다.<br />

영화는 예술이 아닙니다. 영화는 삶이요 현실입니다. 그리고 벙어리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br />

있는 영화의 작용은 예술의 정신적 작용과 비교하자면 조야하고 선정적입니다.<br />

Er ist nicht Kunst, er ist Leben und Wirklichkeit, und seine Wirkungen sind, in ihrer<br />

bewegten Stummheit, krud sensationell im Vergleich mit den geistigen Wirkungen der Kunst. 9)<br />

고상한 정신의 세계요 은근하고도 간접적인 예술과는 달리 영화는 현실 그 자체이<br />

며, 그 작용 또한 지나치게 직접적이라는 것이다. 즉 영화는 마치 양파를 뺨에 대고<br />

문지르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눈물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10)<br />

하지만 일부에서는 영화의 대중성과 잠재성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하<br />

였다.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칼로 미렌도르프 Carlo Mierendorff는 “영화를 소유한 자<br />

가 세상을 들어 올리게 될 것이다 Wer das Kino hat, wird die Welt aushebeln.” 11) 라<br />

며 영화의 대중적 잠재성을 부러워했다. 또한 연극평론가이자 작가였던 페르디난트<br />

하데코프 Ferdinand Hardekopf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영화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영<br />

화를 옹호했다.<br />

영화를 욕하는 대신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좋은 취향’의 대변자인 문화 지식계층이 영화에<br />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br />

Astatt den cinema zu schelten sollte gerade die kulturelle Intelligenz als der gesellschaftlich<br />

institutionaliserte ‘gute Geschmack’, alles Interesse darauf richten, auf den Film Einfluß zu<br />

gewinnen. 12)<br />

여기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는 당시 영화는 좋은 취향에 부합하지는 못하지만 그렇<br />

다고 욕을 하는 것보다는 영향력을 행사해서 그것에 부합하도록 만드는 것이 더 바<br />

9) Thomas Mann, Über den Film, in: ders, Werke. Miszellen. Frankfurt a.M. 1968, S.149-151.<br />

10) Vgl. Thomas Mann, ebd.: das (Kino) wirkt wie Zwiebel ..., die Träne kitzelt im Dunkeln, in<br />

würdiger Heimlichkeit verreibe ich sie mit der Fingerspitze auf den Backenknochen.”<br />

11) Carlo Mierendorff, Hätte ich das Kino, in: Die Weißen Blätter 7, H.2(1920), S.92, H. z. aus Kaes,<br />

S.15.<br />

12) Ferdinand Hardekopf, Der “cinéma”, in: Der Demokrat 2 (1910), Nr.42, 12. Okt. 1910.


304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람직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많은 문화계 인사들이 영화제작에 직, 간접적으로<br />

가담하였다. 그래서 가령 하우프트만 Gerhart Hauptmann 등 당시의 저명한 작가들이<br />

영화 제작 작업에 처음부터 깊숙이 관여하였고 약관의 브레히트 Bertolt Brecht 역시<br />

새로운 매체인 영화에서 자신의 활동기회를 찾기도 했다. 13)<br />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문화계와 영화계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br />

루어졌던 것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부합했기 때문이다. 대도시에 정착을 한 영화는 안<br />

정적인 관객의 확보를 위해서 기존의 프롤레타리아 계층 뿐 아니라 그때까지 영화를<br />

천박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던 시민계층을 관객으로 끌어올 현실적인 필요성이 존재<br />

했다. 이를 위해서 영화는 이후 대중화의 길을 모색했던 기성 예술과는 정반대로 예<br />

술화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이를 위해서 영화계는 특히 교양시민 계층의 주된 ‘오<br />

락’ 대상이었던 문학과 연극에 접근하게 된다. 그래서 영화제작자들은 유명한 연극<br />

연출가와 배우를 영화에 참여시키거나 저명한 작가가 쓴 시나리오에 바탕을 둔 이른<br />

바 “작가영화 Autorenfilm”를 만들기 시작했다. 기성 문화계의 입장에서도 막강한 대<br />

중적 파급력을 발휘하고 있는 영화는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경제적인 안<br />

정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했다.<br />

영화논쟁의 과정에서 영화의 예술적 가능성과의 연관 속에서 영화의 본질적인 특<br />

성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당시 영화의 본질을 자연주의적, 기록적인 특성으로<br />

파악하고자 하는 입장과 환상적 양식화에서 찾으려는 입장이 대립하고 있었다. 전자<br />

의 경우 영화의 기계적인 현실 재현 능력이 영화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br />

입장은 당시 독일에서는 영화의 예술적 가능성을 부정하는 논거로 사용이 되었다. 그<br />

이유는 당시 독일을 지배하고 있던 관념적 예술관이 예술을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유<br />

리되고 고양된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인용한 토마스 만의 말에서 분<br />

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즉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대상과 영상, 또는 이미지간의 일치<br />

라는 인상은 날 것을 기술을 통해 기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예술<br />

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4) 따라서 당시 독일에서는 영화가 예술이 되려면 가능<br />

13) Vgl. Sigfrid Hoefert, Haumptmann und der Film. Berlin 1996; Paul Werner, Die Skandalchronik des<br />

deutschen Films. Frankfurt am Main 1990.<br />

14) Vgl. Karl Hoffmann, Das Kino, in: Die Tat (1913/14), S.1077.


파울 레니의 연구 305<br />

한 이러한 기록적 특성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멀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br />

많았다. 그 결과 영화의 본질은 카메라를 이용해서 현실을 기계적으로 복제해서 재현<br />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특유의 기술적인 기법들을 사용하여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br />

을 가시화하고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꿈과 현실의 경계를 깨뜨리는데 있는 것으로<br />

보는 입장이 득세를 하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 시기 독일영화의 두드러진 특징<br />

이라고 할 수 있는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의 선호 경향이 이해될 수 있다. 이<br />

경향을 잘 보여주는 보기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하데코프의 취지에<br />

따라서 영화의 예술적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선 작가인 쿠르트 핀투<br />

스 Kurt Pinthus, 하젠클레버Walter Hasenclever, 엘제 라스커-쉴러 Else Lasker-<br />

Schüler 등에 의해 쓰여 진 시나리오집인 “Das Kinobuch” 15) 이다. 이 책에 담긴 작품<br />

들 대부분이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또한 영화의 예<br />

술적 가능성을 처음으로 보인 것으로 평가되었던 (Stellan Rye, Paul Wegener, 1913) 16) 이나 유대인의 전설을 소재로 한 (Henrik Galeen, Paul Wegener) 역시 파우스트를 연상시키는 악마와의 계<br />

약, 진흙인형 골렘의 살인으로 인한 공포와 같은 환상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br />

러한 경향은 이 시대 독일영화를 대표하는 표현주의 영화로 이어지면서 독일영화의<br />

‘독일적인’ 특징을 형성하기에 이르게 된다.<br />

3. 독일 표현주의 영화<br />

영화논쟁의 와중에서 영화의 예술적 가능성을 증명하고자 했던 독일 영화계가 선<br />

택한 길은 이른바 ‘독일 표현주의 영화’로 일컬어지는 일련의 공통적 특징들을 지니<br />

고 있는 작품들을 내놓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계 영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것으<br />

로 인정받고 있는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실체는 아직까지도 모호하다고 할 수 있<br />

다. 17) ‘표현주의 영화’의 개념정의도 아직 확립되지 못하고 있고 이에 포함이 되는<br />

15) Kurt Pinthus (Hg.), Das Kinobuch. Zürich 1963 (1. Aus. Leipzig 1914).<br />

16) Vgl. Fritz Martini, Literatur und Film, in: Werner Kohlschmidt und Wolfgang Mohr (Hg.),<br />

Realexikon der deutschen Literaturgeschichte. Bd. 2: L - O 2. Aufl. Berlin 1965.


306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영화의 수와 범위도 경우에 따라서 상이하다. 어떤 이들은 ‘표현주의 영화‘를 표방한<br />

최초의 영화인 을 ‘유일한 표현주의 영화’로 인정하는 데 반<br />

해서, 다른 이들은 의 성공 직후 비슷한 구상으로 만들어진<br />

6, 7편의 영화만으로 한정하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이 영화를 전후로 해서 유사한<br />

주제와 스타일을 일부 갖고 있는 영화들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가령 이전에 제작된 과 같은 영화들이나 이후<br />

에 제작된 (Fritz Lang, 1921)이나 (F. W. Murnau, 1922)처럼 표현주의적 주제와 스타일의<br />

일단을 보여주는 영화들까지도 표현주의 영화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심지어 또<br />

다른 이들은 단순한 표면적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내면세계의 표출이란 의미에서 심<br />

리 묘사에 치중한 이른바 ‘실내극영화 Kammerspielfilm’까지도 영화의 전반적인 사실<br />

주의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표현주의에 포함을 시키기도 한다.<br />

이러한 입장 차이는 일차적으로 ‘표현주의 영화’에 대한 상이한 정의에서 기인한<br />

다. 어떤 이들은 영화에서의 표현주의를 (영화)예술의 한 사조라는 입장에서 1920년<br />

대 초반에 독일에서 제작된, 유사한 스타일과 주제의 영화들로 한정한다. 표현주의<br />

영화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라고 할 수 있는 1926년 간행된 루돌프 쿠르츠 Rudolf<br />

Kurtz의 “Expressionismus und Film”에서 저자는 “표현주의 영화”라는 제목의 장에서<br />

모두 6편의 영화만을 언급하고 있다. 18) 1990년에 출간된 위르겐 카스텐 Jürgen<br />

Karsten의 “Der expressionistische Film” 역시 총 7편의 영화만을 표현주의 영화 항목<br />

에서 언급하고 있다. 19) 반면 어떤 이들은 이를 ‘형식주의’적 입장에서 직접적 현실재<br />

현을 지양하는 영화 표현스타일의 일종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외<br />

국에서 이루어진 표현주의 영화에 대한 연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따라서 이 경<br />

우 표현주의적 스타일의 특징을 포함하는 영화라면 시대와 장소에 상관없이 표현주<br />

의라 지칭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입장에서 보면 부분적으로 그러한 특징을 보이<br />

는 영화들 또한 ‘표현주의 영화’라는 개념 속에 포괄되게 된다.<br />

17)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특징과 범위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본 논문의 범위를 초과하는 주제이<br />

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개략적인 설명으로 한정한다.<br />

18) Vgl. Rudolf Kurtz, Expressionismus und Film. Berlin 1926.<br />

19) Vgl. Jürgen Karsten, Der expressionistische Film. Münster 1990.


파울 레니의 연구 307<br />

이러한 혼란은 먼저 표현주의라는 개념 자체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쿠르츠의<br />

설명처럼 표현주의는 처음부터 일관성이나 통일성이 없는 개념으로, 단지 기존의 인<br />

상주의에 반대한다고 하는 공통점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20)<br />

또한 이는 ‘표현주의 영화’가 탄생하게 된 당시 독일 영화계의 독특한 상황에서<br />

기인하기도 한다. 영화의 예술적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예술분야와의 교류나<br />

그것의 모방을 추구했던 독일영화계에는 연극, 문화, 회화,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br />

활동하던 예술가들이 영화제작 작업에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었다. 따라서 표현주의<br />

영화는 다양한 표현주의 예술장르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그 양상이 작업에 참여한<br />

인적 구성에 따라서 매우 이질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br />

또한 영화가 표현주의를 차용할 무렵 이미 다른 예술분야에서는 표현주의가 쇠퇴<br />

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반발로서 다시 일상생활의 객관적 묘사를 중시하는 ‘신 즉물<br />

주의 Neue Sachlichkeit’가 등장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표현주의 영화는 문화적 패러<br />

다임이 막 변화하는 시점에 등장한 것이었기 때문에 순수한 표현주의 영화보다는 표<br />

현주의적 요소와 신 즉물주의적 요소가 혼합된 영화들이 제작이 되었던 것이고, 그로<br />

인해서 표현주의 영화를 규정하고 분류하는데 어려움이 생기게 된 것이라 할 수 있<br />

다.<br />

여기에 1924년을 기점으로 영화제작의 주변 상황과 여건에도 큰 변화가 발생했다.<br />

혼란에 빠져있던 독일 경제는 1924년 미국의 대규모 경제원조와 렌텐마르크의 도입<br />

등으로 일시적인 안정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적 안정은 이전의<br />

살인적 인플레이션에 의해서 독일 영화계에게 주어졌던 영화 제작 및 수출상의 이점<br />

을 말소시켜 버렸다. 특히 의 국제적 성공에 고무되어 비슷한 콘셉트와<br />

기대로 이후 제작된 표현주의 영화들은 대부분 외국, 특히 미국 시장에<br />

서 아무런 성공도 거두질 못했다. 그러자 독일 영화계는 곧 ‘독일영화’의 차별화 전<br />

략을 수정하여 ‘환상성’ 대신 ‘독일적인 것’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br />

20) Kurtz, a.a.O., S.9: “Vielleicht steckt die Schwierigkeit, darin, dass der Expressionismus eine Fülle<br />

verschiedenartiger Erscheinungen deckt, die nur durch ihre Konfrontierung mit einer ihnen<br />

gemeinsamen gegnerischen Einstellung, dem Impressionismus, den Schein einer gewissen<br />

Gleichförmigkeit erhält..“


308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4. 파울 레니와 <br />

크라카우어에 의해서 “전후시대 최고 감독 중 하나 one of the outstanding film<br />

directors of the post-World War I era” 21) 로 평가되었던 파울 레니는 당시 독일 영화<br />

계에서 다방면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주요 인물이었다. 1885년 슈트트<br />

가르트에서 출생한 레니는 15세에 베를린 미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후, 26살의 나<br />

이에 막스 라인하르트 극단에서 연극 무대 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한다. 1900년대<br />

그는 “슈트름Der Sturm”과 연관된 아방가르드 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영화 플래<br />

카드와 포스터 제작으로 영화계와 인연을 맺게 된 레니는 1913년부터 영화계에 입문<br />

해서 죠 마이 Joe May, 막스 막 Max Mack 등 당시 여러 유명 감독들의 영화에서 무<br />

대 디자인을 담당했다. 군에 입대한 그는 군대에서 홍보용 다큐-극영화인 (1917)를 감독하였고, 1차 대전이 한창이던 때<br />

, 등 다수<br />

의 영화를 연출한 후, 자신이 직접 ‘파울 레니 영화사 Paul Leni-Film GmbH’를 설립<br />

하고 의 제작을 추진한다. 재정적 상황의 악화로 결국 ‘넵툰 영화<br />

사 Neptum Film’의 지원으로 1923년에 완성된 은 여러 가지 사정<br />

으로 인해 1924년에 개봉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을 계기로 레니는 1927년 할리우드로<br />

진출하여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감독이 되어 1927년 , 를 연출하면서 이후 유니버설 사에서<br />

제작한 공포영화 시리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28년 빅토르 위고 원작의<br />

, 1929년 를 연<br />

출하며 할리우드의 기대 속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던 레니는 44세의 나이에 LA에서<br />

폐혈증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당대의 명성에 비해 오늘날 그의 이름이 다른 독<br />

일 출신 감독들과 비교해서 잘 알려지지 않는 것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인 것<br />

으로 보인다.<br />

당시 많은 영화인들처럼 파울 레니도 영화가 아닌 인접 분야에서 영화계로 입문을<br />

21) Siegfried Kracauer, From Caligari To Hitler. A Psychological History of the German Film. Princeton<br />

and Oxford 1947, Revised and Expanded Edition 2004, p.85.


파울 레니의 연구 309<br />

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계에 입문할 당시<br />

그는 영화판에서 한 몫을 잡으려는 무명의 신출내기가 아니라 자기분야에서 능력을<br />

인정받고 있던 거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영화는 예술로서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br />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인접 예술분야의 인력을 영화계로 영입하<br />

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가령 당시 최고의 연극배우였던 파울 베게너 Paul<br />

Wegener는 을 제작해서 처음으로 영화의 예술적 가능성을 인정받<br />

기도 했다. 파울 레니가 영화계에 입문하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 때문으로, 그는 자<br />

신의 미술적 재능을 움직이는 그림인 영화 속에서 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이<br />

러한 결단은 자신이 쌓아 놓은 명성을 위협할 수도 있는 위험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br />

는 것이었다.<br />

영화는 그림이다. 화가의 일이다. 일차적으로. 영화가 움직이는 그림이라는 사실도 아무런<br />

것을 달라지게 하지 않는다.<br />

Der Film ist Bild. Sache des Malers. In erster Linie. Dass der Film ein sich bewegendes<br />

Bild ist, ändert nichts. 22)<br />

이처럼 영화와 회화의 동일성에서 출발한 레니는 영화도 그림처럼 구도와 톤, 색<br />

채 등을 필요로 하며, 무대배경과 장면들이 빛과 그림자, 차단과 강조를 통해서 이야<br />

기에 가담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대로 등장인물과 공간도 구성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br />

고 생각했다. 영화의 장면은 움직이는 그림으로서 만들어져야 하며, 관객들에게서 줄<br />

거리에 의해 호출되는 인상과 분위기를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반대로<br />

촬영된 무대배경은 극적 줄거리의 분위기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레<br />

니는 영화에서 무대배경이 단순히 이야기나 등장인물의 배경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br />

고, 여러 가지 기법을 통해서 “줄거리와 하나가 되고, 그 자체가 줄거리가 되어야 한<br />

다” 23) 고 봄으로써, 영화에서 무대배경과 무대디자인 Bildgestaltung의 중요성을 특별<br />

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무대디자이너는 예쁜 세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물<br />

의 표현을 투시해서 그 심장에 도달하고 분위기를 창조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br />

22) Leni, Das Bild als Handlung. Der Maler als Regisseur, in: Kunst im Film, Nr. 2, 1921, S. 12-14.<br />

23) Ebd.


310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영화에서 무대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레니는 그러나 자신의 전문분야만을<br />

고집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영화계에서 다방면으로 활동을 하면서 이미지 메이킹이<br />

나 마케팅 분야까지도 관여를 했던 연극과 영화에 대해서도 전문가였다. 24)<br />

물론 그의 재능이 가장 잘 발휘되었던 분야는 역시 무대디자인이었다. 그는 조 마<br />

이, 에른스트 루비치, 에발트 두폰트 Ewald André Dupont 등 저명한 감독들의 영화<br />

에서 무대디자인을 담당했고, 본인이 무대디자인과 연출의 일부를 담당했던 대표적<br />

인 실내극영화인 (칼 마이어, 파울 레니 1921)은 칼 마이어의<br />

연출이나 배우들의 연기가 아니라 “파울 레니에 의해 고안된 정취 넘치는 영상, 그의<br />

빛과 그림자와의 유희 die stimmungsvoll entworfenen Bilder Paul Lenis, sein Spiel mit<br />

Licht und Schatten” 25) 을 통해서 빛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당시 독일 영화에<br />

서 특이한 점 중 하나가 감독의 역할이 연출 Spielleitung과 무대디자인 Bildgestaltung<br />

으로 나뉘어져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 경우<br />

에도 파울 레니가 감독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 외에도 우크라이나 출신의 레오 비린<br />

스키 Leo Birinski가 연출 Spielleitung로 표시되어 있다. 인터넷에서 일부 비린스키가<br />

이 영화의 감독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br />

당시의 영화제작에서의 역할분담이 오늘날처럼 전문화, 분업화되어 있지 못했고 그<br />

래서 감독의 역할이 여러 사람의 협력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br />

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그만큼 무대 디자인의 비중이 독일 영화에서 컸음을<br />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편집을 통한 움직임의<br />

창조가 아니라 잘 짜인 미장센 속에서 배우들의 움직임이나 표정의 변화를 통해서<br />

영화의 움직임을 창조하려고 했던 당시 독일영화의 특징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는<br />

것으로 보인다.<br />

파울 레니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은 1922년 자신이 설립<br />

한 영화사의 첫 작품으로 제작이 시도되었다.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 영화가 매<br />

24) Vgl. Hans-Michael Bock (Hg.): Paul Leni - Grafik, Theater, Film. Frankfurt Deutsches Filmmuseum<br />

1986: “... mit einer ganz und gar in der Theater- und Filmindustrie verankerten Persönlichkeit zu tun<br />

und nicht etwa mit einem exzentrischen Künstler.”<br />

25) Hans Michael Bock, Paul Leni, E11, in: ders.(Hg.), CineGraph - Lexikon zum deutschsprachigen<br />

Film. München: edition text + kritik., Paul Leni E1-E22.


파울 레니의 연구 311<br />

우 야심차게 기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의 각본은 (1914)을 감독했고 (1920), 의 각본을 집필했던 헨<br />

릭 갈렌 Henrik Galeen이 1920년도에 완성을 했던 것으로, 4개의 개별적인 에피소드<br />

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로 구상이 되었다. 그리고 영화에는 당대 최고의 남자 배우<br />

4명(에밀 야닝스 Emil Jannings, 콘라드 바이트 Conrad Veidt, 빌헬름 디털레 William<br />

Dieterle, 베르너 크라우스 Werner Krauß)이 출연하였다. 개별 에피소드가 펼쳐지는<br />

장소도 매우 다채로워서, 아라비아 칼리프인 하룬 알 라시드가 등장하는 1번 에피소<br />

드는 아라비아를, 이반 대제가 등장하는 2번 에피소드는 러시아를, 전설의 도적 리날<br />

도 리날디니가 등장하는 3번 에피소드는 이탈리아를, 공포의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br />

가 등장하는 4번 에피소드는 런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대목장 Jahrmarkt의<br />

밀랍인형 전시실을 배경으로 하면서 4개의 개별 에피소드를 아우르는 틀이야기<br />

Rahmenhandlung 구조를 취하고 있었다. 야심찬 기획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의 심<br />

화로 인한 자금문제에 봉착하면서 작품의 제작이 늦어지게 되었고, 거기에 제작이 지<br />

연되자 비슷한 각본을 다른 곳에 판 시나리오 작가 갈렌과의 법정 소송이 진행되면<br />

서 영화제작은 더욱 지체되었다. 첫 번째 에피소드 촬영은 1923년 7월에 시작되었고,<br />

그해 9월까지 1, 2, 4번 에피소드의 촬영이 완료되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촬영할<br />

예정이었던 3번째 에피소드는 제작비의 조달 실패로 끝내 무산되었고, 다른 에피소<br />

드에 비해서 이례적으로 짧은 마지막 4번 에피소드도 미봉책으로 졸속 제작된 미완<br />

으로 보기도 한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23년에 완성된 영화는 확실치 않은 이유로<br />

상영이 미루어지다가 마침내 1924년에 개봉을 하기에 이른다. 초연시 에피소드의 순<br />

서는 현재 보존된 판본의 순서와는 달리 이반 대제, 잭 더 리퍼, 하룬 알 라시드의 순<br />

서로 편집되어 상영되었다고 한다. 26)<br />

5. 의 알레고리적 해석 시도<br />

영화의 제목이나 이야기 설정, 배우들의 면모를 보면 이 영화는 먼저 의도적으로<br />

26) Vgl. Jürgen Karsten, a.a.O., S.87.


312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직전의 다른 영화들과의 연관성을 과시하고 있다. 먼저 영화의 제목은 명백히 을 연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여러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옴니버<br />

스 형식의 이야기 구조는 프리츠 랑의 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하나의 틀이야<br />

기가 에피소드를 아우르는 형식은 독일 낭만주의적 전통과 연관됨과 동시에 앞의 두<br />

영화와 공통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에서 중요한 장소로<br />

등장하는 대목장의 장터가 이 영화에서 틀줄거리가 펼쳐지는 장소로 설정이 된 것도<br />

유사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캐스팅에서도 과의 긴밀한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에서 칼리가<br />

리 박사와 세자르로 출연했던 베르너 크라우스와 콘라트 바이트가 이 영화에서 각각<br />

잭 더 나이프와 이반대제로 출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영화가 의 성공을 반복하고자 하는 기대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br />

고, 표현주의 영화의 후광효과를 다분히 노리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br />

1924년 관객 앞에 선을 보인 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흥행에서<br />

의 실패와는 상관없이 대체적으로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한 평론가는 이 영화<br />

를 “독일 영화의 풍미를 세련화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일보 전진 einen bedeutenden<br />

Schritt vorwärts in der Geschmacksverfeinerung des deutschen Films.” 27) 이라 평가했<br />

다. 또 다른 평론가는 소재를 비현실적이고 동화적인 것으로 변형시키는 영화적인 방<br />

식에 있어서 과 (아서 로빈슨 Arthur<br />

Robinson, 1923)를 뛰어넘는 것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28)<br />

그러나 회의적인 평가도 있었다. 특히 저명한 연극평론가였던 헤르베르트 예링<br />

Herbert Jhering은 이 영화를 표현주의 영화라기보다는 “과도기적 영화 Übergangsfilm”<br />

또는 “뒷북 Nachzügler” 29) 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로테 아이스너 Lotte Eisner는 영화<br />

를 구성하고 있는 3개의 에피소드 중 마지막 에피소드만이 표현주의적이라고 보았고,<br />

영화의 지나치게 완벽하고 정교한 무대배경이 오히려 부정적으로 작용한다고 평가하<br />

27) Vgl. Film- Kurier, 14.11.1924.<br />

28) Vgl. Lichtbild-Bühne, 15.11.1924: “Das Ganze ist eine Künstlerlaune, ein graziöses und von Geist<br />

sprühendes Spiel, in dem das malerische weitaus die Hauptsache ist. ... Hier wird der Stoff mit eine<br />

Virtuosität ins filmisch dankbarste Gebiet des Unwirklich-Märchenhaften übertragen auf eine Art, die<br />

selbst im CALIGARI und in dem SCHA'ITEN ohnegleichen ist.<br />

29) Herbert Jhering, a.a.O.


파울 레니의 연구 313<br />

였다. 30) 반대로 크라카우어는 이 영화를 표현주의적 무대장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br />

으로 평가하면서 특히 마지막 에피스드를 “영화 예술의 가장 위대한 성과 중 하나<br />

among the greatest achievement of film art” 31) 로 격찬하였다.<br />

당시는 물론이고 현대 연구자들에게 이 영화가 특이하게 비춰졌던 이유는 영화가<br />

지니고 있는 비균질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현대의 연구자들은 이 영화가<br />

바이마르 시대 독일영화의 전환점, 특히 표현주의 영화의 종말과 동시에 새로운 패러<br />

다임의 등장을 알리는 영화로 평가하거나 32) 이 작품을 미완성 작품으로 보는 경우도<br />

있다. 나아가서 이 영화를 자기 성찰적 영화로 접근하기도 한다.<br />

토마스 엘세서 Thomas Elsaesser는 “많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고전영화들이 영<br />

화제작에 대한 자기성찰적 영화들 daß viele Weimarer Filmklassiker selbstreferentielle<br />

Filme über das Filmemachen sind”이라고 규정하면서 그러한 성찰성은 당시 독일 영<br />

화계가 직면하고 있던 두 가지 싸움, 즉 국내적으로는 기성의 예술장르나 제도들과의<br />

싸움, 그리고 국외적으로는 할리우드 영화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는 위협과의 싸<br />

움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문화적 인정과 시장점유율을 위한 이중의 노력<br />

doppelte Streben um kulturelle Anerkennung und Marktanteile”의 결과라고 설명하고<br />

있다. 33)<br />

프란체스코 피타시오 Francesco Pitassio도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자기성찰적 측<br />

면을 부각시키면서 이 영화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영화의 표현양식이나 연기방식<br />

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차용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br />

고 있다. 34) 그리고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이 영화에 대한 연구에서는 그 보다 한발<br />

30) Vgl. Lotte H. Eisner, Die dämonische Leinwand, Überarbeitete, erweiterte u. autorisierte Neuauflage,<br />

Frankfurt am Main: Kommunales Kino 1955, S. 60.<br />

31) Vgl. Siegfried Kracauer, a.a.O., p.86f.<br />

32) Jürgen Karsten, a.a.O., S.87: “Schlußpunkt expressionistischer Filmproduktion, ... Vorläufer eines<br />

beginnenden ästhetischen Paradigmawechsels.”<br />

33) Thomas Elsaesser, Das Weimarer Kino – aufgeklärt und doppelbödig. Berlin: Vorwerk 8. 1999,<br />

S.11.<br />

34) Vgl. Francesco Pitassio, Wachsfiguren? Zur Beziehung von Figur, Akteur und bildlicher Darstellung<br />

in Das Wachsfigurenkabinett von Paul Leni (D 1924), in: Montage/AV, Figur und Perspektive (1),<br />

15/2 2006, S. 63-83, S.63.


314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더 나아가서 이 영화를 표현주의 공포영화로 보는 기존의 시각을 뒤집으면서 작품<br />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코미디적 요소를 부각시킴과 동시에 이 영화의 비<br />

대칭적인 구조와 틀이야기구조의 구성을 근거로 이 영화를 표현주의 영화에 대한 일<br />

종의 패러디이면서 동시에 당시에 이루어진 영화와 문학간의 교류와 긴장관계에 대<br />

한 영화로 해석하기도 한다. 35) 조엘 웨스터데일 Joel Westerdale은 이 영화를 “글쓰기<br />

에 대한 영화 a film about writing” 36) 로 보고 있다. 밀랍인형 전시를 위해서 젊은 작<br />

가가 고용이 되어 밀랍인형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낸다는 영화의 틀줄거리 설정은 이<br />

러한 해석에 설득력을 준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비균질적인 특성을 당시 벌어졌던<br />

영화논쟁의 반향 가운데서 생성된 문학의 언어와 영화 이미지간의 갈등으로 본다. 그<br />

증거로서 그는 영화의 비균질적인 구성과 표현방식을 제시한다. 대체적으로 일관성<br />

이 있는 하룬 알 라시드와 이반대제의 에피소드는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서 만들어진<br />

이야기로 제시가 됨으로써 작가가 영화에 대해 통제권을 갖고 있음을 의미하고, 반면<br />

에 다른 에피소드와는 전혀 다른 구조와 표현양식을 보여주는 마지막 잭 더 리퍼의<br />

에피소드는 그의 문학적 작업의 산물이 아니라 그가 꾸는 악몽으로 제시됨으로써, 그<br />

가 그러한 통제를 상실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37) “내러티브 상황에 대한 작가의<br />

통제력이 줄어들면서 이미지의 힘이 커지며, 잭 더 리퍼의 위협이 증가하면서 내러티<br />

브에 대한 요구도 약화된다.” 38) 그러면서 표현주의 호러영화가 아니라 코미디적 요<br />

소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를 위해서 그는 기획되었다가 누락된<br />

리날도 리날디니 에피소드를 각본을 토대로 고찰하면서 이 에피소드 안에 하룬 알<br />

라시드의 에피소드 보다도 더 많은 코미디적 요소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br />

다. 문학의 언어와 영화의 영상간의 긴장관계를 설명하는 논거로서 ‘미완성’인 마지<br />

막 에피소드의 내러티브적, 영화적 특성을 제시하고 있음과 동시에 코미디적 요소에<br />

대한 근거로서 누락된 에피소드를 논거로 제시하는 방식에는 논리적 모순이 있기는<br />

하지만 웨스터데일의 이러한 분석은 문학과 영화의 긴장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br />

35) Joel Westerdale, The Lighter Side of Early Weimar Cinema's Dark Canon: Paul Leni's Das<br />

Wachsfigurenkabinett., in: German Quarterly, Winter 2012, 85.1, p.1-17, p.3.<br />

36) Ebd..<br />

37) Vgl. ebd., p.4.<br />

38) Vgl. ebd., p5: “As the writer's mastery over the narrative situation declines, the power of the image<br />

grows, and as the threat of Jack the Ripper increases, the demands of narrative abate.”


파울 레니의 연구 315<br />

매우 뛰어난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를 자기성찰적 영화를 넘어서서<br />

당시 영화문화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br />

영화의 이야기 구성을 보면 한 젊은 작가가 “밀랍인형 전시장에서 홍보일을 할 창<br />

의적인 작가” 39) 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밀랍인형 전시관을 찾아온다. 전시관 주인<br />

은 그에게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밀랍인형에 대한 이야기를 써달라고 부탁한다.<br />

그는 곧 작업에 착수해서 하룬 알 라시드와 이반대제에 대한 이야기를 완성한다. 영<br />

화는 작가가 써내려가는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마지막 잭<br />

더 나이프에 대한 에피소드는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그가 글을 쓰다가<br />

잠이든 사이에 꾼 꿈의 내용으로 펼쳐진다. 그는 꿈속에서 주인 딸과 함께 잭 더 나<br />

이프에게 쫓기던 끝에 그의 칼에 찔린다. 하지만 주인 딸이 작가를 흔들어 잠에서 깨<br />

우고 두 사람은 안도하며 포옹한다.<br />

먼저 이야기의 장소가 대목장의 밀랍인형 전시실로 설정이 되어 있는 것에서 영화<br />

에 대한 자기성찰성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목장은 다름이 아니라 “영화상영<br />

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 the birthplace of cinematic exhibition” 40) 이기도하기 때문이다.<br />

그곳에서 영화는 “값싼 반-부르주아적 오락의 한 형태로서 천막 안에서 상영이 되었<br />

다 presented in tents as a form of cheap, anti-bourgeois entertainment.” 41) 동시에 대<br />

목장은 에서도 핵심적인 장소로 등장하면서 이후 독일 영화<br />

에서 “하나의 상징적인 기능 eine emblematische Funktion” 42) 을 지니게 되었다. 이렇<br />

게 볼 때 밀랍인형 전시관은 영화를 상영하던 이동극장을 상징하며 그곳에 전시되어<br />

있는 밀랍인형은 사람들에게 놀람과 두려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이상의 것<br />

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던 초창기 영화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속 한 장면에<br />

서 전시실 주인이 이반대제 밀랍인형의 태엽을 돌려서 인형이 움직이도록 하는데, 이<br />

는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단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시관을 홍보하기 위<br />

해서 작가를 고용한다는 설정은, 단순한 시각적 볼거리를 제공하던 초창기 영화가 자<br />

39) 이하 영화의 내용에 대한 직접 인용은 영어판 영화에 삽입된 중간자막을 번역한 것임을 알려둔다.<br />

40) Westerdale, a.a.O., p.4.<br />

41) Ebd.<br />

42) Francesco Pitassio, a.a.O., S.66.


316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신의 미천한 신분을 벗어나서 부르주아계층을 영화의 관객으로 확보하기 위해 기성<br />

예술계, 특히 문학과 연극계의 도움을 받았던 상황을 상징하고 있다. 즉 생명력이 없<br />

는 밀랍인형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처럼 문학의, 스토리의, 상상력의 힘이 영화에<br />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해준다는 것이다. 작가에게 이야기를 지어달라고 부탁하는 주<br />

인과 딸이 약간 망설이고 있는 작가에게 적극적으로 글을 쓰도록 권유하는 대목 역<br />

시 당시 영화계가 적극적으로 문학과 연극계 인력을 영화제작을 위해 고용했던 상황<br />

을 떠올리게 한다.<br />

다음으로 전시관에 들어온 작가는 이야기를 지어나가는 과정에서 주인 딸에게 끌<br />

리게 되고, 그래서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 속에 자신과 딸을 연인이나 부부로 등장시<br />

킨다. 이러한 설정에서 전시장 주인의 딸은 영화에 대한 상징으로, 작가와 그녀의 관<br />

계는 문학과 영화의 협력, 또는 그러한 협력을 통해서 탄생하게 되는 새로운 영화예<br />

술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작가의 이야기 속에서 밀랍인형들은 그 둘을, 혹은 그들<br />

의 관계를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하는데 여자가 영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br />

둘의 결합은 새로운 영화 예술의 탄생을, 그리고 각각의 밀랍인형은 이것을 방해하고<br />

위협하는 그 무엇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br />

먼저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아랍의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는 “가장 로맨틱<br />

하고 장난을 좋아하는 지배자”이고 단조로움을 싫어해서 매일 밤 여자를 갈아치우는<br />

왕으로 소개된다. 영화 속에서 그는 신하들과 체스를 두며 소일하다가 시합에서 지자<br />

마침 날아온 연기에 핑계를 대며 그 연기의 주인을 “알라신에게 보내버리라”고 수상<br />

에게 명령한다.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연기의 진원지를 찾아 나선 수상이 도착한<br />

곳은 제빵사인 아사드와 그의 아내 자라가 사는 곳이다. 아사드의 목을 베려는 찰라,<br />

수상은 자라의 미모에 넋을 빼앗겨 자신의 임무도 잊은 채 왕궁으로 돌아간다. 자라<br />

의 미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칼리프는 밤에 변복을 하고 몰래 자라의 집을 찾<br />

아 나선다. 한편 수상이 아내에게 보인 관심에 질투심이 생긴 아사드는 자신의 남자<br />

다움을 보여주겠다며 칼리프의 소원반지를 가져오겠다고 하고서 궁으로 잠입한다.<br />

그 사이 자라의 집에 몰래 들어온 칼리프는 자라에게 자신의 신분을 알리고 목걸이<br />

를 걸어주기도 하면서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애쓴다. 한편 왕궁으로 잠입한 아사드는<br />

칼리프가 잠행할 때 침대에 뉘어 놓은 가짜인형을 칼리프로 착각해서 그의 반지 낀<br />

팔을 칼로 잘라 추격해오는 병사들을 피해 왕궁을 빠져나온다. 집에 도착한 아사드는


파울 레니의 연구 317<br />

잠겨 있는 문을 두드리고 당황한 자라는 마찬가지로 당황한 칼리프를 오븐 속에 숨<br />

도록 한다. 자라에게 자신이 칼리프를 죽이고 반지를 가져왔다고 말한 아사드는 그를<br />

추격해 온 병사들에 의해 체포된다. 이때 자라는 기지를 발휘해서 가짜 소원반지에<br />

칼리프가 살아서 이곳에 나타나기를 바란다는 소원을 빌고, 바로 그때 오븐 속에서<br />

칼리프가 나타나면서 모두는 위기를 모면한다. 그리고 칼리프는 자라의 청에 의해 아<br />

사드를 궁정 제빵사로 임명한다.<br />

그림 1: 하룬 알 라시드 에피소드의 장면들<br />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되는 이 이야기에서 칼리프는 배에 기름이 잔뜩 낀, 게으르<br />

고 욕정으로 가득 찬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br />

이반대제와는 달리 잔인한 지배자가 아니라 익살스럽고 때로는 너그러운 지배자로<br />

묘사가 된다. 칼리프의 역할을 연기한 에밀 야닝스의 과장되고 익살스러운 연기, 그<br />

리고 캐리커처를 연상시키는 기묘한 형태의 배경이 그러한 익살스러움을 뒷받침해준<br />

다. 자라를 탐해서 그녀를 찾아가지만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오븐 속에 숨어서 재를<br />

뒤집어쓰는 칼리프의 모습은 이 에피소드의 코미디적인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자라


318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의 기지로 위기를 모면한 그는 아사드와 자라의 관계를 인정하고 궁으로 불러들인다.<br />

여기에서 칼리프는 새로운 영화예술의 탄생을 한편으로는 방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br />

는 탐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당시의 기성 예술에 대한 상징으로 읽힌다.<br />

고급 예술로서의 높은 권좌에 앉아서 모든 것을 누리고 있지만, 정작 새로운 활력은<br />

찾아볼 수 없는, 뚱보가 되어버린 기성 예술의 오만함과 나태함, 탐욕스러움에 대한<br />

풍자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에 칼리프가 두 사람을 망토로 감싸 안는 장면은<br />

기성예술과 매혹적인 영화 그리고 영화와 사랑에 빠진 문학의 행복한 화해와 조화에<br />

대한 희망으로도 보인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시각적으로 둥글둥글한 형태들이 많이<br />

등장한다. 왕궁의 원형 지붕이나 소원반지, 칼리프의 살찐 배, 아사드 집의 언덕과 문<br />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둥글둥글한 형태는 이 에피소드에 전체적으로 깔려 있<br />

는 익살스럽고 동화적인 분위기를 강조하면서 세 주인공의 화해와 조화를 암시한<br />

다. 43) 그리고 이 형태는 마지막에 칼리프가 두 사람을 망토로 감싸 안는 장면에서 최<br />

종적으로 완성이 된다(그림 1 참조).<br />

두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이반 대제는 “피에 미친 괴물”로 뼈로 만든 관과 도<br />

끼가 그의 왕관이요 왕홀이고 그의 회의실은 고문실이고 악마와 죽음이 그의 재상들<br />

인 제왕으로 소개가 된다.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며 크렘린 궁에 칩거하고 있는 이<br />

반은 죄수들에게 독을 먹인 후 그가 살 수 있는 시간을 모래시계로 보여주면서 죄수<br />

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 즐긴다. 자신의 독제조사가 자신을 독살할 수도 있다는 말에<br />

그의 제거를 명령하고 그는 신하의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궁을 나선다. 이때<br />

그는 자신에 대한 암살을 두려워하여 신하와 옷을 바꿔 입는데, 마침 암살이 시도되<br />

어 신부의 아버지가 죽게 된다. 결혼식장에 도착한 이반은 “나는 죽음보다도 강하다”<br />

라고 외치며 결혼식 파티를 강행하도록 시키고 슬픔에 빠져있는 신부를 궁으로 납치<br />

해 신랑대신 자신이 첫날밤을 치르려한다. 신부가 완강하게 저항을 하자 이반은 그녀<br />

에게 신랑이 고문당하고 있는 고문실을 보여주어 신부의 의지를 꺾는다. 하지만 이반<br />

이 신부를 범하려는 순간, 황급히 달려온 신하가 이반이 독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br />

43) derbe rundliche Formen, die den märchenhaften und burlesken Motivgehalt in verspielte Dekors<br />

übersetzen(Kasten,90)


파울 레니의 연구 319<br />

알린다. 자신을 제거하려는 것을 눈치 챈 독제조사가 모래시계에 이반의 이름을 적어<br />

놓았던 것이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모래시계를 바라보며 이반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br />

으로 공포에 떨다 결국 미쳐버리고 만다.<br />

그림 2: 이반 대제 에피소드의 장면들<br />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코미디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면, 두 번째 에피소드<br />

는 전체적으로 매우 어둡고 억압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이반<br />

은 높이가 낮은 통로를 구부정한 자세로 지나간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은 지하실이나<br />

화면 뒤편으로 향한다. 즉 그는 어둠 속으로 숨는다. 결혼식이 벌어지는 장소 역시<br />

천정이 매우 낮아 사람들을 압도하는 느낌을 자아낸다. 이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br />

두려움으로 가득하면서 동시에 타인의 죽음을 즐기는 이중적이고 사디스트적인 인물<br />

로 묘사된다. 이반 역할을 연기한 콘라드 바이트는 에서 연기한 세자르의<br />

경우와 마찬가지고 기계적인 움직임과 무표정한 얼굴, 불안한 듯 시종일관 두리번거<br />

리는 눈동자 등을 통해서 이반의 불안과 잔인함 그리고 광기를 표현한다. 이 에피소


320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드에서는 이반이 걸어가는 복도와 결혼식장의 낮은 천정과 대들보처럼 배경이 주로<br />

직선으로 묘사된다. 또한 화면 위의 공간을 비워두거나 어둠으로 채워둔다. 이를 통<br />

해서 모든 것이 무엇이가에 의해 압도되고 억눌려 있음을 표현한다. 권좌에 있는 이<br />

반조차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되어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 다닌다. 사람들을 고<br />

문하고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며 결혼한 신부를 유린하려는 이반은 잔<br />

혹한 권력을 휘둘러 예술을 유린하려고 하는 검열과 같은 정치적 권력이나 종교적<br />

권력에 대한 상징으로 읽힌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옷을 갈아입고 나타난 이반<br />

의 궁 성문에 그려진 성화가 보이는 장면은 이러한 해석에 근거를 제공해 준다(그림<br />

2 참조). 크라카우어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독일 영화 속에 절대적인 권력자에 대<br />

한 내밀한 갈망이 표현되고 있다는 자신의 이론적 주장에 근거해서 이 영화를 “가상<br />

폭군 영화 imaginary tyrant films” 44) 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반 대제의 에피소드는 그<br />

의 그러한 해석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br />

그림 3: 잭 더 리퍼 에피소드의 장면들<br />

잭 더 리퍼가 등장하는 마지막 에피소드는 앞의 두 에피소드와는 다른 방식으로<br />

전개된다. 즉 잭 더 리퍼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려가던 작가는 피곤이 몰려오면서 깜<br />

빡 잠에 빠진다. 그리고 그 때 꾼 꿈속에서 그와 주인 딸이 잭 더 리퍼를 피해서 도<br />

망을 다닌다. 이 에피소드에는 진짜 꿈속에서처럼 장소에 대한 특정도 일관된 내러티<br />

브도 존재하지 않고 두 사람의 도망과 잭 더 리퍼의 추격 장면들이 겹쳐지면서 연속<br />

44) Siegfried Kracauer, a.a.O., p.84.


파울 레니의 연구 321<br />

적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순간 갑자기 나타난 잭 더 리퍼에 의해서 작가는 칼에 찔려<br />

가슴을 움켜쥔다. 그런데 그 순간 주인 딸이 잠자고 있는 그를 흔들어서 깨우고, 두<br />

사람은 안도하며 포옹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br />

영화를 구성하는 마지막 에피소드인 이 에피소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앞의 에피소<br />

드와는 크게 다른 면들을 지니고 있다. 먼저 분량 상으로도 이 에피소드는 총 85분의<br />

전체 분량 중 5분에 불과하다. 45) 또한 앞의 에피소드는 작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허<br />

구적’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 에피소드는 작가가 꾸는 악몽의 형식을 취<br />

하고 있다. 에서 칼리가리 박사를 연기했던 베르너 크라우스<br />

가 연기한 잭 더 리퍼 역시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마치 밀랍인형이 등장한 것처<br />

럼 거의 아무런 움직임도 표정변화도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그가 어디에서 왜 나타<br />

났는지에 대한 설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이 에피소드에서는 표현주의적 무대배<br />

경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앞의 에피소드에서와는 달리 종이에 그려진 과장되고 왜<br />

곡된 배경들이 사용이 되고 있다. 또한 이중노출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시공간<br />

이 중첩되고 경계가 허물어지는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그림 3 참조). 결국 이 에피소<br />

드에서는 내러티브가 와해되고 끊임없는 움직임과 이미지의 중첩만이 이어진다. 아<br />

이스너에 의해서 이 영화 중 유일하게 표현주의적인 부분으로 평가되었고, 크라카우<br />

어에 의해서는 영화 예술의 위대한 성과로 칭송이 된 이 에피소드는 가장 짧으면서<br />

도 가장 인상적인 느낌을 준다. 그리고 내러티브도 캐릭터도 사라지고 오직 움직임만<br />

이 존재하는 이 에피소드는 영화를 움직이는 그림으로 보았던 파울 레니의 생각이<br />

가장 잘 표현이 된 부분으로 보이기도 한다. 1888년 5명 이상의 매춘부를 살해했지<br />

만 결국 체포되지 않은 익명의 연쇄살인마의 별명인 잭 더 리퍼는 이 에피소드에서<br />

독자적인 개성이나 등장하는 이유도 없는 하나의 위협의 정적인 상징으로 묘사된<br />

다. 46) 작가와 주인 딸은 대목장과 거리에서 그의 위협을 피해 도망을 다닌다. 하지만<br />

그는 마치 유령처럼 두 사람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난다. 심지어 한 장면에 그는 다중<br />

45) 영화 전체에서 개별 에피소드가 차지하는 분량을 살펴보면, 전체 약 85분의 분량 중 틀이야기가<br />

차지하는 분량은 약 10분, 첫 번째 에피소드의 분량은 약 40분, 두 번째 에피소드의 분량은 약 30<br />

분, 마지막 에피소드의 분량은 약 5분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세 번째 에피소드의 분량이<br />

크게 차이가 있어서 이 부분이 미완성이라는 추측이 나오기도 한다.<br />

46) Jürgen Karsten, a.a.O., S.88: “als statisches Symbol einer Bedrohung, ohne eigene Charakterzüge<br />

oder Molivierung seines Auftretens gezeigt”


322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노출 기법을 이용해서 여러 명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정체를 알 수<br />

없는 존재 자체가 모호한 존재,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존재로서<br />

잭 더 리퍼는 결국 극장에 찾아와 영화를 보고 사라지는 익명의 관객과 대중에 대한<br />

상징으로 읽힌다. 대중의 사랑을 얻으려고 애 쓰는 문학과 영화에게 관객과 대중은<br />

정체를 알 수 없는, 피하거나 벗어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이<br />

다.<br />

영화의 기획 당시에는 포함되었다가 예산문제로 포기되었던 리날도 리날디니 에<br />

피소드를 시나리오를 토대로 구성해보면, 먼저 리날도 리날디니는 테오오라 왕과 결<br />

혼을 하기 위해 여행 중이던 아름다운 처녀 비오란테를 그녀를 납치한 페그고레제의<br />

부하들로부터 구출한다. 의적이었던 리날디니는 미래의 여왕이 될 비오란테와 정열<br />

적인 하루밤을 함께 한 후 헤어진다. 아홉 달 후 리날도는 체포되어 처형될 위기에<br />

처하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여왕은 마지막 순간 여왕이 대를 이을 왕세자를 출산한<br />

날에 사람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를 들어 그의 처형을 저지한다.<br />

이 에피소드 또한 다른 에피소드들과는 다른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먼저 다른 밀<br />

랍인형들이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들인 것에 반해서 리날도 리날디니는 허구적인 인<br />

물이다. 그는 괴테의 처남이었던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풀피우스 Christian August<br />

Vulpius(1762-1827)가 1799년에 발표한 산적소설 “리날도 리날디니, 산적두목<br />

Rinaldo Rinaldini, der Räuberhauptmann”의 주인공으로 이탈리아 코르시카섬을 무대<br />

로 로빈 훗처럼 의적활동을 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이 역할을<br />

맡은 배우는 바로 작가로 등장했던 배우 빌헬름 디텔레로, 다른 에피소드의 밀랍인형<br />

주인공들이 작가와 주인 딸에게 위협을 가하는데 반해서, 이 에피소드에서는 밀랍인<br />

형이 주인 딸을 구하는 것으로 설정이 되어 있다. 한편 이 에피소드에서는 첫 번째<br />

에피소드에서 보다도 코미디적 성향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총격<br />

전이 벌어지는 대목에서 주인공이 바지 속에서 여러 자루의 총을 연속적으로 꺼내어<br />

쏘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총격전을 해학적으로<br />

풍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에피소드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br />

당시 영화 문화에 대한 알레고리적 측면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산적<br />

으로 분한 작가가 공주로 분한 주인딸을 악당들로부터 구출하여 사랑에 빠진다는 설<br />

정은 문학이 위기에 처한 영화를 구해주고 사랑에 빠진다는 의미로 해석이 되며, 그


파울 레니의 연구 323<br />

이후의 이야기 전개는 드디어 영화가 권좌에 오르고 문학이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br />

에서 영화가 문학의 죽음을 막아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볼 때<br />

아마도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권좌를 계승할 것이라는 점은 문학과 영화<br />

의 만남으로 태어난 새로운 영화 예술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br />

있다.<br />

6. 결론<br />

지금까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영화 문화와 당시에 벌어졌던 영화논쟁의 상황<br />

을 살펴 본 후에 대표적인 표현주의 영화로 간주되고는 있지만 영화텍스트의 비균질<br />

적인 특징으로 인해서 과도기영화나 뒷북으로 평가되거나 장식적 표현주의영화로 치<br />

부되고 있던 파울 레니의 을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영화<br />

문화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관점에서 해석을 시도해 보았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br />

이 영화의 비균질적 특성이나 비표현주의적 특징들이 시대를 잘못 만남으로써 생긴<br />

것이 아니라, 당시의 바이마르 영화가 처해 있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br />

방법의 모색에서 연원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영화는 표현주의 영화의 성공에 뒤늦<br />

게 편승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표현주의의 쇠퇴와 새로운 패러다임이 도<br />

래하는 시점에서 바로 그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고자 했던 시도라 할 수 있는 것<br />

이다. 이를 위해서 파울 레니는 당시 대중들이 좋아하는 영화장르 - 코미디, 공포,<br />

(모험), 스릴러 그리고 러브스토리를 한 편의 영화 속에 나란히 배열하고 그리고 각<br />

각의 장르적 특성, 이야기 설정, 등장인물의 특징에 맞추어서 무대배경을 다르게 디<br />

자인함으로써 각각 차별적인 스타일을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표현<br />

주의 영화 이후 독일 영화가 당면하게 된 과제들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일종의 예를<br />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파울 레니의 할리우드 행과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br />

무성에서 유성으로의 영화의 기술적 변화로 인해 그의 이러한 모색이 완전한 결실을<br />

맺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패한 표현주의 영화로 치부되기에 은 너무나도 많은 시사점들을 던져주고 있다.


324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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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stellung in Das Wachsfigurenkabinett von Paul Leni (D 1924). In:<br />

Montage/AV, Figur und Perspektive (1), 15/2 2006, S. 63-83.<br />

Werner, Paul: Die Skandalchronik des deutschen Films. Frankfurt am Main 1990.<br />

Westerdale, Joel: The Lighter Side of Early Weimar Cinema's Dark Canon: Paul Leni's<br />

Das Wachsfigurenkabinett. In: German Quarterly, Winter 2012, 85.1, p.1-17.<br />

Zusammenfassung<br />

Eine Studie über Paul Lenis Das Wachsfigurenkabinett<br />

-Als eine Allegorie für die Weimarer Filmkultur-<br />

NAM, Wan-Seok(Woosuk Uni)<br />

In dieser Studie wird versucht, Paul Lenis Film Das Wachsfigurenkabinett als eine<br />

Allegorie auf die Weimarer Filmkultur zu analysieren. Der Film gilt generell als der<br />

letzte expressionistische Film, der stilistische und narrative Heterogenität aufweist.<br />

Diese Heterogenität ist die Folge der Referentialität des Films mit dem Filmemachen<br />

in der Weimarer Zeit, wo der Film versuchte, sich einerseits als ein Kunstmedium mit<br />

den anderen zu etablieren, und andererseits um die Vormachtstellung mit dem<br />

Hollywood Kino zu kämpfen.<br />

Um als ein ernsthaftes Kunstmedium Anerkennung und damit mehr Publikum zu<br />

gewinnen, versuchte der Film die anderen etablierten Künste nachzuahmen und mit<br />

Hilfe der Künstler und Autoren anspruchsvollere Werke zu schaffen. Dabei gewann in


326 브레히트와 현대연극<br />

Deutschland die Einstellung Überhand, dass das Wesen des Films nicht in der<br />

Wiedergabe der Realität, sondern in der Visualisierung des Unmöglichen und<br />

Unwirklichen liegen sollte. Dieser Versuch gelang dem Film, als der sog.<br />

expressionistische Film von der ganzen Welt als eine völlig neuartige<br />

Darstellungsweise und imaginäre Filmwelt aufgenommen wurde.<br />

Als Das Wachsfigurenkabinett vorgestellt wurde, hatte ein Paradigmenwechsel im<br />

Filmemachen in Deutschland schon begonnen. Deshalb wurde er als ein<br />

„Übergangsfilm“ oder ein „Nachzügler“ betrachtet. Einige moderne Wissenschaftler<br />

fanden aber in ihm einen reflektiven Film über das Filmemachen.<br />

Durch die allegorische Interpretation können einige interessante Aspekte ans Licht<br />

gebracht werden. Die fiktiven Episoden sowie die Rahmenhandlung des Films können<br />

als eine Allegorie auf die damalige Filmkultur betrachtet werden, wobei der Weimarer<br />

Film an zwei Fronten steht, einerseits versucht er gegenüber den anderen Künsten als<br />

Kunst Anerkennung zu gewinnen, andererseits steht er in Konkurrenz mit den<br />

ausländischen Filmen vor allem mit den Hollywood-Filmen.<br />

Dass ein Poet für das Wachsfigurenkabinett engagiert wurde, um für das Publikum<br />

attraktive Geschichten zu erdichten, symbolisiert die Zusammenarbeit zwischen<br />

Literatur und Film, was den Interessen der beiden entsprach. Die Wachsfiguren, die in<br />

den einzelnen Episoden als Antagonisten das Protagonistenpaar bedrohen,<br />

symbolisieren die Bedrohungen, die die Zusammenarbeit zwischen Literatur und Film<br />

und die Geburt der Filmkunst beeinträchtigen. Die stilistische und narrative<br />

Heterogenität des Films kann auch als ein Versuch betrachtet werden, diverse<br />

filmische Richtungen auszuprobieren, um die damalige Lage der Weimarer Filme zu<br />

verbessern. In dieser Hinsicht hat Paul Lenis Film eine besondere Stellung in der<br />

Filmgeschichte der Weimarer Republik.


파울 레니의 연구 327<br />

Keyword<br />

(한글/독일어)<br />

밀랍인형의 밀실<br />

Das Wachsfigurenkabinett<br />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영화<br />

Film in der Weimarer Republik<br />

표현주의 영화<br />

Der expressionistische Film<br />

파울 레니<br />

Paul Leni<br />

알레고리<br />

Allegorie<br />

∙ 필자 E-Mail: jumpcut9@naver.com (<strong>남완석</strong>)<br />

∙ 투고일: 2013년 6월 29일/심사일: 2013년 7월 14일/심사완료일: 2013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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